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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 마포답사 때 독서당이 있어서 그때는 서울에 한군데만 있는 것으로 알았는데 동호에도 독서당이 있었다고 하니 학자들에 대한 배려가 크게 느껴진다. 어찌보면 독서당에 선발되면 가문의 영광이라고 할 수 있다.

후에 대제학은 반드시 독서당 출신에서만 뽑았다고 하니 그 권위가 가히 상상이 간다.

이곳도 정권에 따라 크게 부침이 일었던 것 같다. 세종의 집현전 시절에는 성황하다가 세조가 정권을 잡을 때는 사육신 문제 등으로 독서당이 폐쇄되고, 연산군 때도 폐쇄되는 운명을 맞았다. 임진왜란 때 불에 타버려 한동안 유명무실 해졌다가 영조 때까지는 지속적으로 유지된 듯 보이는데 아마도 정조 때 규장각이 활성화 되면서 독서당은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역대 왕들은 학문만을 위해서 장기 휴가를 주고 그를 또 우대해서 크게 중용을 했으니 독서당에 선발되는 것을 관리들은 큰 영광으로 여겼다. 멋진 곳에 건물을 짓고 휴식을 겸해 학문 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준 왕들의 큰 그림을 요즘에도 필요할거라 생각해 본다.



독서당(讀書堂)


호당(湖堂)이라고도 한다.

세종은 1426년 12월 젊은 문신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하는 사가독서제(賜暇讀書制)를 실시하였다. 그러나 독서를 할 수 있는 장소가 자택(自宅)으로 한정되었으므로 독서에만 전념하기에는 미흡하였다. 1442년 제2차 사가독서를 시행할 때 세종은 독서에 지장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신숙주(申叔舟)·성삼문(成三問) 등 6인을 진관사(津寬寺)에서 독서하게 하는 상사독서(上寺讀書)를 실시하였다.

이 상사독서는 1451년(문종 1)과 1453년(단종 1)에도 실시되다가,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여 집현전을 혁파함으로써 사가독서제는 폐지되었다. 

그 뒤 성종은 1476년과 1486년에 다시 사가독서제를 실시하였다. 그러나 자택에서 하는 독서는 내방객들 때문에 연구에 불편한 점이 많고, 상사독서는 유교정책의 견지에서 볼 때 불교의 여러 폐습에 오염될 가능성이 허다하므로 상설국가기구인 독서당을 두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서거정(徐居正)의 주청을 받아들여서 1492년(성종 23)에 남호독서당(南湖讀書堂)을 개설하였다.

그 장소는 지금의 마포 한강변에 있던 귀후서(歸厚署) 뒷쪽 언덕의 사찰이었다고 하며, 이 절을 20칸 정도로 확장하였다고 한다. 이 독서당에서는 1495년(연산군 1)부터 1498년까지 매년 5, 6명이 독서하였으나, 1504년 갑자사화의 여파로 폐쇄되었다.

연산군의 뒤를 이은 중종은 인재양성과 문풍진작을 위해서 독서장려책을 적극 권장하였고, 1507년에 독서당제도를 부활하여 지금의 동대문구 숭인동에 있던 정업원(淨業院)을 독서당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정업원이 독서에 전념할 수 있는 마땅한 장소가 아니라는 주청이 끊이지 않음에 따라 중종은 1517년에 두모포(豆毛浦) 정자를 고쳐 지어 독서당을 설치하고 동호독서당(東湖讀書堂)이라 하였다.

이때부터 임진왜란이 일어나서 소각될 때까지 동호독서당은 75년 동안 학문연구와 도서열람의 도서관 기능을 수행하게 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독서당은 복구되지 못하다가 1608년(광해군 즉위년)에 대제학 유근(柳根)이 다시 설치할 것을 청하여 우선 한강별영(漢江別營)을 독서하는 처소로 삼았다.

그러나 인조반정 뒤에 일어난 이괄(李适)의 난과 병자호란 등으로 인하여 사가독서제도가 정지됨에 따라 독서당의 기능도 크게 위축되었다. 인조의 뒤를 이은 효종 때에도 독서당에 관한 기사가 보이고는 있으나 재건에 관해서는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독서당은 영조 때까지 존립했던 것으로 보이나 정조 때 규장각(奎章閣)이 세워짐에 따라서 완전히 그 기능이 소멸되었다.

독서당은 공참부(公參府)의 성격보다는 연구기관으로서 학문적 기능을 뚜렷이 나타내고 있었으며, 옥당(玉堂)인 집현전이나 홍문관 못지않게 평가되었던 기관이었다. 역대 왕들의 독서당에 대한 총애와 우대는 지극하였다. 독서당에는 언제나 궁중음식 전담기관인 태관(太官)에서 만든 음식이 끊이지 않았고, 임금이 명마(名馬)와 옥으로 장식한 수레 및 안장을 하사하는 일이 많았다.

그리고 독서당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서 사가 인원을 줄이고 규정을 엄격히 하였다. 대표적인 예로서는 1515년(중종 10) 5월에 사가독서원으로 김안국(金安國) 등 16인을 선발하였으나 엄격히 재심한 결과 7인만이 최종적으로 뽑혔다는 것이다.

독서당의 선발 연령은 연소문신(年少文臣)으로 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으나 40세가 넘어서 선발되는 경우도 가끔 있었다. 그리고 대제학은 독서당을 거친 사람이라야 가능하게끔 제도화했다.

운영은 국비로 하되 왕들의 특별 배려에 의한 하사품이 운영의 보조구실을 하였다. 전성기에는 12인을 뽑아 일·숙직을 교대로 하게 하였으며, 대제학이 날마다 제술(製述)을 맡겨 매월 세 차례의 등급을 매겼다.

독서당 원수는 1426년부터 1773년까지 350여년 동안 총 48차에 걸쳐서 320인이 선발되었다. 매차별 인원 수로는 가장 적었을 때인 1585년이 1인, 가장 많을 때인 1517년과 1608년 등이 12인이었으나, 일반적으로는 6인 내외를 선발하였다.

한편 사림(士林)으로 공부하는 재야 지식인이나 관직자가 은퇴한 뒤 자연의 경관이 뛰어나고 독서하기에 알맞은 곳에 정자나 건물을 마련하여 독서당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인용>


▼ 독서당 터(讀書堂址) 표석...



▼ 독서당 터(讀書堂址) 표석... 옥수극동아파트 7동 앞에 있다.



▼ 독서당 터(讀書堂址) 표석 옆에는 성동구청에서 세운 기념안내판이 있다.



▼ 독서당 터(讀書堂址) 표석... 극동종합상가가 보인다.



▼ 독서당 터(讀書堂址) 표석... 극동아파트 정문 옆 화단에 조성되어 있다.



▼ 독서당 터(讀書堂址) 표석... 아파트 정문 옆



▼ 독서당 터(讀書堂址) 표석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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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방인야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