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옥수하이츠아파트는 일명 김부선 아파트라해서 언론에 크게 나온 적이 있다. 그래서 관심이 있던 차에 그곳에 서울시 표석이 있다는 것을 알고 다른 곳 보다 먼저 다녀온 기억이 난다. 그 후로도 몇 차례 더 다녀왔는데 사진을 찾아보니 두 번만 찍혀있다. 아마도 이미 찍어온 곳이라 더 이상은 안 찍은 모양이다.

이곳은 두뭇개 나루터인데 한자로는 두모포(豆毛浦)라 하여 다른 곳처럼 진(津)이라 하지 않는 것은 특이하다. 이곳은 한강이 내려다 보이고 예전에 저자도(楮子島)도 있어서 왕실의 관리하에 많은 정자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세종 때 대마도 정벌 당시 이곳에서 이종무 장군에게 환송식을 배풀었다고 되어 있다. 

지금은 이곳에 동호대교가 가설되어 옛 나루터의 명성을 잇고 있다.


두모포(豆毛浦)


성동구 옥수동에 있던 나루터이다. 청계천이 서에서 동으로 흘러 내려가서 중랑천과 합수, 남서로 흘러서 저자도를 사이에 두고 한강 물과 두줄기 물을 이루다가 이곳에서 한강 물과 합수한다고 하여 두물개(이수포), 곧 두뭇개가 되었다. 두뭇개를 한자명으로 표기한 것이 두모포이다. 조선 중기 이후 뚝섬과 더불어 한강 상류지방에서 오는 고추,마늘,감자류 등 전곡과 목재,시탄의 집산지였다. 동호대교의 건설로 기능이 상실되었다. 동호나루터에 해당된다.

<서울지명사전에서 인용>


 저자도(楮子島)


서울특별시 강남구 압구정동과 성동구 옥수동 사이에 있었으나 현재는 이름만 전해지고 있는 한강의 섬.

한강 본류가 선회하는 지점이어서 잔잔한 호수처럼 보인다는 서호(西湖)와 함께 동호(東湖)에는 지금은 사라진 저자도가 있었다. 동호 일대에는 왕실 소유의 정자들과 함께 독서당(讀書堂)·압구정 등 문인들의 정자가 많았다. 따라서 승경지였던 저자도에 시인 묵객(墨客)들의 방문이 잦았다. 저자도에 별서를 두고 풍류를 즐긴 인물과 그들이 남긴 문학작품은 상당수에 이른다. 가장 앞선 시기의 인물은 고려 후기의 정승 한종유(韓宗愈)[1287~1354]였다. 조선 전기 저자도는 태조의 이복형제인 의안대군(義安大君) 이화(李和)[1348~1408]의 소유였다. 이후 저자도는 세종 대에 왕실 소유로 바뀌어 정의공주(貞懿公主)에게 하사하고, 공주는 아들 안빈세(安貧世)에게 내려주었고, 안빈세는 섬을 얻은 것을 기념하여 화공에게 「저자도도(楮子島圖)」를 그리게 하였다. 조선 전기 저자도는 왕이 즐겨 찾던 유상지였으며, 중국 사신이 왔을 때 저자도에서 양화도까지 선유(船遊)를 베풀었다. 또한 넓은 백사장을 가진 저자도는 기우제와 출정하는 병사들의 전송 행사를 하는 곳이었다. 이러한 공식적 용도 외에도 김창흡은 저자도에 머물며 풍류를 즐기고 ‘현성(玄城)’이라는 정자를 짓기도 하였다. 저자도는 여주강으로 나가는 중요한 수로로써 조선 초기부터 왕실 소유의 섬이었고, 기우제를 올리는 장소였으며, 문사들의 별서(別墅)가 있었던 큰 규모의 섬이었다. 1970년대 한강 개발 사업으로 골재 채취가 이루어지면서 저자도는 자취를 감추었다.

<강남구향토문화전자대전에서 발췌>


▼ 두뭇개 나루터(豆毛浦址) 표석... 옥수하이츠아파트 정문 앞에 있다.



▼ 두뭇개 나루터(豆毛浦址) 표석



▼ 두뭇개 나루터(豆毛浦址) 표석 옆에는 큰 느티나무가 있다.



▼ 성동구청에서 세운 두뭇개 나루터(豆毛浦址) 표석



▼ 두뭇개 나루터(豆毛浦址) 표석이 있는 옥수하이츠아파트 정문 앞 공원



▼ 두뭇개 나루터(豆毛浦址) 표석 위치






728x90
반응형
Posted by 이방인야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