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한양에 빙고가 두 군데 있다는 것은 보통 알고 있다. 동빙고동, 서빙고동이 있으니 그것쯤은 알고 있는데 이곳 동빙고 터 표석은 엉뚱하게 옥수동에 있다. 답사하면서 뭔가 이상해서 잘 살펴보니 처음에 이곳에 있다가 나중에 동빙고동 쪽으로 옮겨갔다고 한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에 얼음 보관은 매우 중요했으리라. 국상이라도 당하면 대략 5개월 가량 시신 보존용 얼음이 엄청나게 필요했으리라. 그 외에도 얼음은 참으로 귀한 재료가 아닐 수 없다. 지금에 생각해 보면 얼음 없이 여름을 보낼 수 있다고 생각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기록에 보면 여름 복날 임금의 하사품으로 얼음을 새끼에 묶어서 주었다고 하는데 그거 가지고 집에 당도할 쯤이면 새끼줄만 남지 않았을까? 그냥 웃어 본다.


 

동빙고 터(東氷庫址)
조선시대 종묘사직의 제사 때 쓰일 얼음을 보관하던 창고동빙고(東氷庫)는 한강연안 두모포(豆毛浦), 현재 성동구 옥수동 8번지에 있었다가 용산구 동빙고동으로 이전했다.동빙고가 용산구 동빙고동으로 옮기게 된 것은 연산군 10년(1504) 10월에 왕의 사냥터로 확정된 경계표지내에 동빙고가 있었기 때문으로 둔지산(屯智山) 밑으로 이전시켰다. 서빙고(西氷庫) 동쪽에 위치한다 하여 동빙고라 칭하고 동빙고동이란 명칭이 현재 남아 있다.빙고(氷庫)는 나라의 제향(祭享)에 사용하기 위해 얼음을 저장하고 출납하는 것을 관장하던 관아였다. 특히 종묘(宗廟)·사직(社稷) 이하의 제사 때에는 동빙고에서 얼음을 공급하는데 얼음을 공급하는 시기는 음력 3월 1일부터 시작되어 음력 10월 상강일(霜降日)에 끝냈다. 조선초 태조 5년(1396)에 동빙고와 서빙고의 양고(兩庫)를 설치하여 이를 예조의 속아문(屬衙門)으로 두기도 했었다. 양빙고(兩氷庫)는 광무 2년(1898)에 폐지되었다.빙고에 얼음을 저장할 때에는 두모포 앞에 있는 저자도(楮子島) 사이의 얼음을 채취하였고 채취할 때에는 개천 하류의 더러운 곳을 피해 얼음을 따냈다. 채취되는 얼음 두께는 4촌(寸) 이상이 되어야 채빙하기 시작했는데 동빙고에서 저장한 얼음의 양은 서빙고의 양보다는 적어서 10,244정(丁)이었다. 빙고는 조선초에 종5품아문(衙門)에 속했으나 영조 때 종5품인 별좌(別坐)를 감원했으므로 별제(別提, 종6품)의 품계에 따라 종6품아문이 되었다. 그리하여 별제 2명과 별검(別檢, 종8품) 2명을 두었다.조정에는 날씨가 추워져 얼음이 잘 얼게 해달라는 제사, 곧 사한제(司寒祭)를 지내기도 하였다. 사한제는 기한제(祈寒祭) 또는 동빙제(凍氷祭)라고도 불렀는데 정해진 날에 지내는 것이 아니라 필요하다고 생각될 때 날을 가려서 지냈다.<문화콘텐츠닷컴에서 인용>


▼ 동빙고 터(東氷庫址) 표석

 

 

▼ 동빙고 터(東氷庫址) 표석... 미타사유치원 앞에 있다. 

 

 

▼ 동빙고 터(東氷庫址) 표석... 사한단 터 표석과 나란히 있다.

 

 

▼ 동빙고 터(東氷庫址) 표석... 옥수현대아파트 입구에 있다.

 

 

▼ 동빙고 터(東氷庫址) 표석... 옥수현대아파트 정문 입구...

 

 

▼ 동빙고 터(東氷庫址) 표석... 옥수역에 바짝 붙어 있다.

 

 

▼ 동빙고 터(東氷庫址) 표석은 옥수역 7번 출구에서 가깝다.

 

 

▼ 동빙고 터(東氷庫址) 표석 위치...

 

 

 

 

728x90
반응형
Posted by 이방인야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