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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초구 표석으로 되있는 동재기 나루터 표석이 동작역 4번출구로 옮겨온 것을 모르고 서울시 표석을 작성했다가 우연히 동재기나루터 표석 위치가 바뀐 걸 알고 올렸던 글을 내렸다. 추후 수정하여 다시 올릴 예정이다.

그러다보니 서초구 표석이 하나로 줄어들었다. 양재역 터는 예전부터 이 일대가 말죽거리로 불렸는데 그때 이미 이곳이 예전 역 원 터였다는 것을 알았었다. 그런데 이곳에 지하철3호선이 지나면서 역 이름이 예전 조선시대 때의 이름인 양재역이 되었으니 역사는 정말 돌고 도는 것이 분명하다.

양재역 터는 지하철 양재역 11번 출구 바로 앞 화단에 있어서 특별히 눈여겨 보지 않아도 쉽게 보인다. 그러다보니 이곳을 지날 때 마다 사진을 찍어서 이곳 사진은 의외로 많다. 그런데 항상 포스팅을 하다보면 현재 상황이 중요해서 근자에 찍은 사진이 있어야 하는데 그러다보니 카카오맵 로드뷰 신세를 많이 지게 된다.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인용하고 있다.


 

 

▣ 양재역(良才驛)
강남구 역삼동에 있던 마을로서, 어질고 재주 있는 사람이 많이 살던 곳에 역이 설치된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良才는 고려 때 楊梓라고 했는데, 조선시대 역이 생기면서 중앙과 지방의 공문 전달, 관물・세공의 수송, 숙식 제공 등을 담당하였으며, 良才道 察訪을 두었다. 양재역과 관련된 일로는 ‘良才驛壁書의 獄’인 丁未士禍가 있으며, 역말・말죽거리・마죽거리라고도 하였다.<서울지명사전에서 인용>

▣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
당시 외척으로서 정권을 잡고 있던 윤원형(尹元衡)세력이 반대파 인물들을 숙청한 사건이며, 정미사화라고도 불린다. 

중종 말년부터 경원대군(慶源大君)의 외숙인 윤원로(尹元老)·윤원형을 중심으로 한 소윤(小尹) 일파와 세자의 외숙인 윤임(尹任)을 중심으로 하는 대윤(大尹) 일파 사이의 대립이 심화되었다.

중종의 뒤를 이은 인종이 재위 8개월 만에 병으로 죽고 경원대군이 즉위하는 한편, 윤원형의 누이인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수렴청정을 실시하자, 소윤 세력은 역모를 씌워 대윤을 중심으로 한 반대 세력을 숙청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을사사화로, 그 과정에서 사림(士林)계열의 인물들까지도 많이 희생되었다.이와 같은 상황에서 소윤 세력이 자신들에 대한 정적으로서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잔존 인물들을 도태시키려고 일으킨 것이다.1547년(명종 2) 9월 부제학 정언각(鄭彦慤)과 선전관 이로(李櫓)가 경기도 과천의 양재역에서 ‘위로는 여주(女主), 아래에는 간신 이기(李芑)가 있어 권력을 휘두르니 나라가 곧 망할 것’이라는 내용으로 된 익명의 벽서를 발견해 임금에게 바쳤다.윤원형·윤인경(尹仁鏡)·이기·정순붕(鄭順朋)·허자(許磁) 등은 이전의 처벌이 미흡하여 화근이 살아 있는 까닭이라고 주장하였다.이에 지난날 윤원형을 탄핵한 바 있는 송인수(宋麟壽), 윤임 집안과 혼인 관계에 있는 이약수(李若水)를 사사하고, 이언적(李彦迪)·정자(鄭磁)·노수신(盧守愼)·정황(鄭熿)·유희춘(柳希春)·백인걸(白仁傑)·김만상(金彎祥)·권응정(權應挺)·권응창(權應昌)·이천계(李天啓) 등 20여 명을 유배하였다.이 중에는 사림계 인물들이 많았다. 또한, 중종의 아들인 봉성군 완(鳳城君岏)도 역모의 빌미가 된다는 이유로 사사되었으며, 그 밖에 사건의 조사 과정에서 희생된 인물들이 많았다.1565년 소윤 일파가 몰락함으로써 노수신·유희춘·백인걸 등이 다시 요직에 등용되었으며, 선조가 즉위하고 사림 세력이 중앙 정계를 장악한 뒤로는 벽서사건 자체가 무고로 공인되는 한편, 연루된 인물들에 대한 신원과 포장이 여러 단계에 걸쳐 행해졌다. 이 사건은 익명으로 쓰여진 것을 문제삼았다는 절차상의 잘못이 많이 지적되기도 하였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인용>


 

▼ 양재역 터(良才驛址) 표석

 

 

▼ 양재역 터(良才驛址) 표석... 표석 뒤로 서초구청이 보인다.

 

 

▼ 양재역 터(良才驛址) 표석... 양재역 11번 출구 바로 앞에 있다.

 

 

▼ 양재역 터(良才驛址) 표석

 

 

▼ 양재역 터(良才驛址) 표석

 

 

말죽거리[마죽거리(馬粥巨里), 역마을, 역말, 역촌(驛村)]
서초구 양재동 양재역 부근에 있던 마을로서, 제주도에서 보낸 말을 한양으로 보내기 전에 이곳에서 손질하고 말죽을 쑤어 먹였기 때문에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일설에는 조선 초부터 공무로 여행하는 이들에게 마필과 숙식을 제공하는 양재역이 있었고, 근처에 주막도 있어 여행자들은 타고 온 말에게 죽을 끓여 먹이도록 하고 자신도 주막에서 여장을 풀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또 다른 설로는 李适의 난 때 인조가 피난을 가는 길에 이곳에 이르러 유생 金怡 등이 쑤어 올린 팥죽 또는 의이죽을 말 위에서 들고 갔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또 병자호란 때 이곳은 청나라 龍骨大가 지휘하는 우익군의 병참기지로, 남한산성을 공격한 후 교대로 이곳에서 말죽을 쑤어 먹였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하며, 마죽거・말죽거・마죽거리 등으로도 불렀다.

<서울지명사전에서 인용>

 

▼ 양재역은 말죽거리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 양재역 터(良才驛址) 표석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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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방인야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