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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일(南逸) 박응남(朴應男) 묘

 

의왕 답사는 묘지답사 초창기에 많이 갔었는데 근자에는 특별한 묘역이 없어서 가지 못했다. 그러다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전시한 장서각특별전을 관람하기 위해 판교, 의왕을 묶어 답사를 진행했다. 그러다 우연히 의왕저수지 끝자락에 있는 반남박씨 묘를 알게 되어 찾았다.

이곳은 임영대군 묘를 찾으면서 여러번 왔었고 백운저수지가 있어서 수시로 드나들던 곳인데 묘역을 뒤늦게 찾았으니 역시나 '아는 만큼만 보인다.'는 명제를 또한번 실감하게 된다. 해가 뉘엿뉘엿 할 때 찾았는데 동향의 묘역이라 해가 더 빨리 지는 묘역이다. 박응남 묘역은 임영대군 후손들 묘와 산을 서로 등대고 있는 지형이다. 묘역이 물을 가까이 마주하고 있으므로 재물은 넉넉한 지형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남일(南逸) 박응남(朴應男)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유중(柔仲), 호는 남일(南逸) 또는 퇴암(退庵). 박임종(朴林宗)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박조년(朴兆年)이고, 아버지는 사간 박소(朴紹)이며, 어머니는 남양홍씨(南陽洪氏)로 홍사부(洪士俯)의 딸이다.
8살에 어머니를 따라 서울에 와서 유조인(柳祖訒)에게 배웠고, 뒤에 성제원(成悌元)·이중호(李仲虎)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53년(명종 8)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과 육조의 참의·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대사헌으로 있을 때 국정을 전단하던 이량(李樑)의 죄를 탄핵하다가 귀양갔으나 왕이 특별히 용서하여 풀려났다. 명종이 임종할 때 좌승지로 금중(禁中)에서 숙직하다 영의정 이준경(李浚慶)과 함께 고명을 받아 선조가 왕위를 계승하는 데 공을 세웠다.
심의겸(沈義謙)과 친교가 두터워 조카딸(朴應順의 딸)을 선조비로 책봉하도록 하였으며, 궁중의 복색을 화사하고 선명한 것으로 바꾸도록 하였다. 이이(李珥)는 『석담일기(石潭日記)』에서 “고지식하며 말을 과감히 하고 겉으로는 시비를 분별하지 못하는 듯하나 속으로는 시비를 판단하는 기준이 있었다.”고 평하였다.
성품이 강직하였기 때문에 대사헌 재임 중 기탄없는 논박을 하여 원망하는 사람이 많았다. 또 왕비의 숙부였으므로 왕의 총애를 받으니 사림(士林)의 큰 힘이 되었고, 박응남이 죽자 사류(士類)들이 애석하게 여겼으며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문화재지정 미지정
문화재명칭 남일(南逸) 박응남(朴應男) 묘
소재지 경기도 의왕시 학의동 산 87
관리자(연락처) 반남박씨 토산공파 종중(潘南朴氏 兎山公派 宗中)

 

반남박씨(潘南朴氏) 토산공파 개조 남일(南逸) 박응남(朴應男)과 파조 박동점 사당 의곡재(義谷齋)

반남박씨(潘南朴氏) 토산공파 사당 의곡재(義谷齋) 편액 해의

의곡재(義谷齋) 정면

의곡재(義谷齋) 정초... 토산공 좌우명이 효제충서(孝悌忠恕)라고 한다.

▼ 의곡재(義谷齋) 

▼ 의곡재(義谷齋) 토산공 좌우명인 효제충서(孝悌忠恕)비

▼ 의곡재(義谷齋) 측경 

▼ 반남박씨(潘南朴氏) 남일(南逸) 박응남(朴應男) 묘역 안내문

▼ 의곡재(義谷齋)와 재실

▼ 반남박씨(潘南朴氏) 남일(南逸) 박응남(朴應男) 묘역

▼ 남일(南逸) 박응남(朴應男) 묘 측경

▼ 남일(南逸) 박응남(朴應男) 묘 전경

▼ 남일(南逸) 박응남(朴應男) 묘비

▼ 남일(南逸) 박응남(朴應男) 묘 석물

▼ 남일(南逸) 박응남(朴應男) 묘 후경... 앞쪽이 의왕저수지이며 멀리 우담산이 조산으로 조응한다.

▼ 남일(南逸) 박응남(朴應男) 묘 측후경

▼ 남일(南逸) 박응남(朴應男) 묘를 나오는 길에 셋째아들 토산공 박동점 묘가 있다.

▼ 토산공 박동점 묘

▼ 토산공 박동점 묘비

▼ 토산공 박동점은 남일(南逸) 박응남(朴應男)의 셋째 아들이다.

▼ 토산공 박동점 묘 후경

 

반남박씨(潘南朴氏) 토산공파 후손들 묘소

▼ 반남박씨(潘南朴氏) 토산공파 납골묘

▼ 반남박씨(潘南朴氏) 토산공파 숭모비

▼ 반남박씨(潘南朴氏) 토산공파 납골묘 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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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방인야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