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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릉(貞陵:태조 계비 신덕왕후릉) 원찰(願刹) 3곳을 다녀왔다.(1)

 

조선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 강씨(神德王后康氏)의 정릉(貞陵) 원찰(願刹)은 릉의 이력만큼이나 복잡하게 얼켜있어서 뭐가 진짜인지 알 수 없는데 요즘에는 원찰이 크게 주목받지 못하는데 굳이 진실게임을 할 필요가 있을까 싶어 정릉 원찰로 얘기 되고 있는 세 곳의 사찰을 하나로 묶어 이번에 다녀왔다. 그래서 사찰 소개도 한꺼번에 하기로 한다. 그러다보니 내용이 길어질 것 같아 편의상 세번으로 나눠서 글을 올리니 이해 바란다.

 

조선왕릉 명칭 중에 정릉이 두 군데에 있다보니 한자로 쓰던지 아님 릉 주인을 함께 부르며 신덕왕후 정릉(貞陵), 중종의 정릉(靖陵)으로 구분해서 불러야 이해가 간다. 문화재청에서는 서울 정릉(서울 貞陵), 서울 선릉과 정릉(서울 宣陵과 靖陵)으로 구분해서 부르고 있다. 오늘 소개할 곳은 신덕왕후 정릉(貞陵)과 원찰(願刹)을 소개하고자 한다.

원래 충북지역 풍수문화답사를 가려고 계획했는데 전날에 눈이 내려 산길은 위험하고 새벽에 출발하는데 길도 미끄러울것 같아 취소하고 하루가 아까워서 집 근처 절 답사를 했다.   
우리 동네 근처에 정릉이 있는데 이 릉의 주인공은 태조 이성계의 계비 신덕왕후 강씨(神德王后康氏)의 릉이다. 강씨는 이방원과 처음에는 사이가 좋았으나 세자책봉의 문제로 서로 앙숙이 되었다가 후에 태종이 왕이 된 후에는 릉까지 파헤쳐지는 비운을 맞았다. 
 
처음 정릉의 위치는 지금의 정동 근처에 있다가 태종에 의해 현재 정릉동으로 옮겨졌다. 태종은 신덕왕후 강씨의 신분을 왕비의 신분에서 후궁의 신분으로 격하시키고 왕릉도 도성 안에 묘를 둘 수 없다 하여 천묘를 단행했다. 원래 왕릉을 옮기면 천릉(遷陵)이라해서 여러 격식을 갖추지만 정릉은 그런 격식도 없이 릉을 파헤치고 후에는 심지어 릉 석물을 백성들이 밟고 다니라고 광통교 석부재로 썼다. 
 
정릉이 처음 조성될 때 태조는 원찰(願刹)로 흥천사(興天寺)를 지정하고 흥천사의 종소리를 들어야만 잠을 잤을 정도로 애뜻했다고 한다. 정릉이 옮겨지고 릉에서 후궁묘로 격하된 후 다시 왕릉으로 복위 될때까지 약 260여년이 흘렀는데 그때 왕릉으로 복위하면서 원찰(願刹)을 봉국사(奉國寺)로 지정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봉국사는 원찰로서 기능을 다하지 못했는지 실록에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고 한다.

선조 때 함취정유지(含翠亭遺址)로 절을 옮겨 짓고 신흥사(新興寺)라 이름을 고쳤다. 1794년(정조 18년)에 새롭게 중창하면서 지금의 자리로 옮겼고, 1865년(고종 2년)에 흥선대원군의 지원으로 대방과 요사를 짓고 절을 중창한 뒤 다시 흥천사라는 이름을 되찾았다. 이때 대원군이 손수 흥천사(興天寺)라고 써준 사액현판이 흥천사에 남아있다. 그런데 내가 1970년대에 이 절 부근 아리랑고개를 자주 드나들었는데 그때 이 절을 신흥사라고 불렀었다. 어린 시절이라 정식이름이 신흥사인지 흥천사인지 확인해 보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대중들 사이에서는 그때까지도 신흥사로 알려져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지금 현재 정릉 부근에는 최초의 원찰 흥천사(興天寺) 이름의 절이 있고 후에 원찰(願刹)로 지정된 봉국사(奉國寺)가 있다. 특이하게 원찰이 두곳이나 있는 셈인데, 인근에 있는 경국사(慶國寺)도 정릉 원찰이라는 꼬리표가 달려있으니 아마도 왕실의 보호아래 성장한 사찰이 아닌가 싶다. 봉국(奉國)이나 경국(慶國)이나 그 이름에 내포된 의미가 호국사찰(護國寺刹)임을 짐작케 하고 있으니 인근의 정릉 원찰이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옴직 한 것이 사실이다.

 

요즘에 들어와서 원찰(願刹)의 개념이 무뎌지고 특별한 혜택도 없으니 굳이 원찰이 어디냐가 중요한 이슈가 되는건 아니다. 답사객은 그냥 발길 닫는데로 세 군데를 모두 돌아보는 것으로 일정을 잡으면 굳이 원찰이 어디냐 따질 필요도 없고 오히려 세 군데 부처님을 모두 뵈니 스스로 넉넉한 불심을 보시한 것과 같으니 얼마나 맘이 편하겠는가?

특별히 어떤 목적을 갖고 다녀온 것이 아니라 원찰이라 여기고 절간을 구경한다 생각하면서 유유자적하면서 다녀와서 누락된 전각, 탑, 문화재도 많다보니 허술하게 느껴진다. 그래도 다녀온 곳이니 큰 맘 먹고 글을 올린다.

 

흥천사(興天寺)
 
흥천사는 조선 태조임금이 신덕왕후를 정릉에 모시고 왕비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1396년에 착공하여 1397년에 170여 칸이나 되는 대가람으로 창건된 절이다.
일년뒤 1398년에는 왕명에 따라 절의 북쪽에 대규모의 사리전을 세웠다. 조선초기의 고승이신 신미대사(1403-1480)가 세종임금의 명을 받아 한글창제를 도왔던 도량도 흥천사였다 흥천사는 도성안에 있었던 대찰로서 1424년(세종 6년)에는 선종도회소(禪宗都會所)가 되었는데 현재 조계종 최초의 총본산이었다. 1429년(세종 11년)에는 왕명으로 절을 크게 중창하고, 1437년에 다시 사리전을 중수하면서 이 절을 관청 건물처럼 정기적으로 보수 수리하도록 법제화했다. 이처럼 흥천사는 창건 이후 억불의 시대적 조류 아래에서도 왕실의 지원과 장려를 받으며 꾸준히 법통을 이어갔다. 왕실의 제사나 왕족이 병들면 치병을 위한 기도가 이루어졌고, 가뭄에는 기우제가 열리기도 했다. 그러나 성종 이후 왕실의 지원이 줄면서 퇴락하기 시작했다. 1504년(연산군 10년)에는 화재가 일어나 전각이 완전히 소실되고 사리전만이 화재를 면했는데 1510년(중종 5년)에는 사리각까지 불타 완전히 폐허가 되었고 절터는 대신들에게 분배되었다.
그뒤 1569년(선조 2년)에 왕명으로 함취정유지(含翠亭遺址)로 절을 옮겨 짓고 신흥사(新興寺)라 이름을 고쳤다. 1794년(정조 18년)에 새롭게 중창하면서 지금의 자리로 옮겼고, 1865년(고종 2년)에 흥선대원군의 지원으로 대방과 요사를 짓고 절을 중창한 뒤 다시 흥천사라는 이름을 되찾았다. 이때 대원군이 손수 흥천사라고 써준 사액현판이 흥천사에 전해지고 있다.
1885년 대방을 중수하고, 1891년에 42手 관음상을 봉안하였으며, 1894년에 명부전을 중수하였다. 흥천사에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인 영친왕이 5세때 쓴 글씨가 남아있고, 조선왕조의 마지막 왕비인 순정효황후가 6.25전쟁때 피난생활을 한 곳이기도 하다. 2013년 지치고 힘든 이들의 휴식처이자 치유처인 삼각선원을 지었다. 2015년 저소득 맞벌이가정 아이들의 보육을 위한 아동복지시설인 흥천어린이집을 건립, 개원하였다.<흥천사홈페이지에서 인용>

흥천사(興天寺)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 조계사(曹溪寺)의 말사이다. 1395년(태조 4) 신덕왕후 강씨(神德王后康氏)가 죽자 1396년 능지(陵地)를 정릉(貞陵)에 정하여 조영(造營)하고, 그 원당(願堂)으로 능 동쪽에 170여 칸의 절을 세워 흥천사라 칭하였으며, 조계종의 본산(本山)으로 삼았다. 초창기 이 절은 좌선(坐禪)을 하는 것으로 항규를 삼았다.
1398년 6월에는 왕명으로 3층 사리각과 사리탑을 절의 북쪽에 세웠고, 7월에는 우란분재(盂蘭盆齋)를, 8월에는 신덕왕후의 천도회(薦度會)를 베풀었다. 그러나 1403년(태종 3) 태종이 이 절의 노비와 밭의 양을 감하게 하였고, 1408년 의정부의 건의에 따라 이 절을 화엄종(華嚴宗)에 귀속시키는 한편, 태평관(太平館)을 철거한 뒤 그 밭과 노비를 이 절에 이양하였다. 1410년 태조의 유지(遺旨)를 좇아 절을 수리하였고, 이듬해에는 사리각을 중수하였다.
1424년(세종 6) 이 절은 교종에 속하게 되었다. 1435년 사리각을 중수하였고, 1437년 왕명으로 이 절을 중수하였으며, 1440년 9월 대장경을 봉안하였다. 1441년 3월 이 절의 중수공사가 끝나자 5일 동안 경찬회(慶讚會)를 개최하였으며, 1443년 4월 회암사(檜巖寺) 주지로 있던 만우(卍雨)를 이 절에 머무르게 하였다. 또한, 1447년 안평대군(安平大君)을 시켜 사리각에 불골(佛骨)을 봉안하게 하였다.
1469년(예종 1) 명나라 왕과 왕후가 불번(佛幡)을 만들어 보냈으므로 이 절에 봉안하였다. 1480년 절을 다시 중수하였으며, 1504년(연산군 10) 내원당(內願堂)을 이 절로 이주시켰다. 그러나 같은 해 12월에 절이 불타고, 1510년(중종 5)에 사리각까지 불타 완전히 폐허가 되어버렸고, 그 땅을 탐내는 자도 많이 생겼다. 다만, 그때의 대종(大鐘)만은 덕수궁으로 옮겨져 지금까지 남아 있다. 1569년(선조 2) 왕명으로 함취정유지(含翠亭遺址)로 절을 옮겨 지었다.
1794년(정조 18) 이 절의 승려 성민(聖敏)·경신(敬信) 등의 발원으로 현재의 위치로 옮겨 짓고 절 이름을 신흥사(神興寺)라 하였다. 그 뒤 1846년(헌종 12)구봉화상(九峰和尙)이 칠성각(七星閣)을 지었고, 1849년 성혜(性慧)가 적조암(寂照庵)을 창건하였으며, 1853년(철종 4) 대웅전(지금의 極樂殿)을, 1855년 명부전(冥府殿)을, 1865년(고종 2) 대방과 요사채를 짓고 이름을 다시 흥천사라 하였다.
1885년에는 대방(大房)을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堂宇)로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계(多包系)의 팔작지붕인 극락보전을 비롯하여 명부전·용화전(龍華殿)·칠성각·독성각(獨聖閣)·만세루(萬歲樓)·승방(僧房)·대방·일주문(一柱門)·종각(鐘閣) 등이 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인용>

 

문화재지정 서울시 전통사찰
문화재명칭 정릉(貞陵) 원찰(願刹) 흥천사(興天寺)(1)
소재지 서울시 성북구 흥천사길 29(돈암동)
관리자(연락처) 흥천사 (02)929-6611~2

 

▼ 정릉(貞陵) 원찰(願刹)이었던 흥천사(興天寺)를 이어 선조 때 신흥사(新興寺)로 고쳐 짓고, 정조 때 현재의 위치에 절을 옮겨 지었으며, 고종 때 흥선대원군의 지원으로 대방과 요사를 짓고 흥천사(興天寺)라는 이름을 되찾았다. 흥천사(興天寺) 사찰 안내도...

▼ 정릉(貞陵)과 원찰(願刹)로 알려진 세 사찰 지도...

▼ 흥천사(興天寺) 입구에 세워진 안내판

 

신덕왕후 정릉(貞陵) 바로가기

 

▼ 인근에 있는 태조 계비 신덕왕후 정릉(貞陵) 능침 모습

흥천사(興天寺) 경내

▼ 흥천사(興天寺) 대방... 앞쪽 범종각 옆으로 계단이 있었는데... 지금은 철거되었다.

▼ 흥천사(興天寺) 오르는 길...

▼ 흥천사(興天寺) 명부전(서울시유형문화재 67호)...

▼ 흥천사(興天寺) 명부전 앞쪽으로 삼족섬(三足蟾)이 있는데... 만지면 두가지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해서 열심히 만지고 왔다.

▼ 흥천사(興天寺) 용화전 가는 길... 십이지신상을 조각으로 해 놓았다.

▼ 흥천사(興天寺) 용화전...

▼ 흥천사(興天寺) 극락보전

▼ 흥천사(興天寺) 극락보전(서울시유형문화재 66호)

▼ 흥천사(興天寺) 극락보전에는 아미타삼존불이 모셔져 있다. 목조아미타여래좌상(서울시 유형문화재 제413호)을 주존불로, 좌우협시를 목조대세지보살좌상(유형문화재 제414호)과 42수 금동천수관음보살좌상(보물 제1891호)이 있다.

▼ 흥천사(興天寺) 종각...

▼ 흥천사(興天寺) 종각에 있는 흥천사 범종과 덕수궁에 있는 원래의 흥천사 동종(보물 제1460호)

▼ 흥천사(興天寺) 대방 전경과 후경... 흥천사 현판은 흥선대원군 필체다.

▼ 흥천사(興天寺) 대방에서 바라본 선원

▼ 흥천사(興天寺) 전경... 언덕 위에 탑이 있는데... 길이 미끄럽기도 하고 시간도 부족해서 지나쳤다.

▼ 흥천사(興天寺) 독성각 가는 길에 있는 소나무숲... 눈 쌓인 모습이 너무 멋지다.

▼ 흥천사(興天寺) 삼각선원...

▼ 흥천사(興天寺) 독성각이 있는 언덕... 진입로가 달라 그냥 지나쳤다.

▼ 흥천사(興天寺)를 내려오면서... 우측이 명부전이다.

▼ 흥천사(興天寺)에서 적조사(寂照寺)로 오르는 길... 눈 쌓인 오솔길을 걷는 기분이란...

적조사(寂照寺)

 

적조사(寂照寺)
 
적조암은 원래 흥천사의 산내암자로 전체적인 규모는 큰 편이 아니지만 아담함 분위기에 전형적인 암자의 틀을 갖추고 있는 절이다. 특히, 대웅전 앞의 두 소나무가 사격을 한층 높여주며, 주위를 둘러싼 아름다운 수림은 청정도량으로서 적조암의 분위기를 대변해준다. 
적조암의 창건은 1849년(헌종 15)에 혜암성혜(慧庵性慧)스님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그는 이절을 염불관선(念佛觀禪)의 도량으로 삼았다. 창건주인 성혜스님에 대한 자료가 전혀 남아 있지 않아 창건배경 등을 알기 어려우나,『동사열전(東師列傳)』에는 백파(白坡)스님의 제자로 혜암이라는 스님이 등장하고 있어 생존연대를 추정할 때 그를 동일인으로 추정할 수도 있다. 하지만 단정할 근거는 없는 상태이다.

그 뒤 가람이 소실되어 폐허로 있던것을 1958년 경산스님이 주지로 부임하여, 1960년대 가람을 정비하였으며, 1977년에는 경산희진(京山喜璡)스님에 의해 건물과 가람이 복원되어, 당시 관자재보살의 강림도량으로 알려졌다. 아울러 이곳은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을 세 번이나 역임한 경산스님이 입적하기 전까지 전법교화(傳法敎化)하셨던 장소로, 경산스님의 수행과 업적은 현대불교사의 전개과정에서 반드시 주목되어야할 부분이다. 1970년대 이후 총무원장과 동화사 주지 등 불철주야로 교단정화와 화합에 앞장선 경산스님은 1974년에 자공(慈空)스님에게 주지직을 물려주었다. 이후 자공스님은 대웅전 내부의 불상과 탱화불사를 시작하여 1974년에 석가삼존상 조성과 1975년에 칠성탱, 독성탱, 산신탱 조성, 1976년에 신중탱을 조성하여 전각내 모든 성보를 이 당시 조성하게 되었다.

또 1979년에 경산스님이 입적한 후에는 스님의 사리를 수습하여 1982년 사리탑과 비석을 조성하였으며, 2002년에는 상좌인 자성(慈成)스님이 주지직을 이어 받아 현재 가람의 기틀을 이루었다. 스님은 오랜세월 굳굳히 부처님을 모신 빛 바랜 대웅전 복원 불사에 원을 세워 기도에 전념하신 바 주지로 부임하신지 3년 후인 2005년에 현재 대웅전의 전면 보수공사를 성취하게 되었다. 자성스님은 경산스님의 시봉하기 위해 강원에서의 공부를 중단하고 어린시절 서울 적조암에 올라와 20여년을 경산스님을 모신 상좌로서 누구보다 더 적조암을 아끼고 사랑하는 진심어린 마음을 가지신 분이다. 그러기에 경산스님에 대한 자료가 전무한 가운데 경산대종사의 자료를 수집ㆍ발췌하여 스님의 업적과 종단화합에 힘쓴 다양한 생애를 근래 책으로 엮어 놓게 되었다.<대한민국구석구석에서 인용>

 

적조사(寂照寺)는 흥천사의 산내암자로 있다 최근에 조계종직할교구 사찰로 되었다.

적조사(寂照寺) 입구

▼ 적조사(寂照寺) 관음상... 눈이 쌓여 있어서인지 깊은 고뇌가 느껴진다.

▼ 적조사(寂照寺) 학월경산스님 사리탑

▼ 적조사(寂照寺) 대웅전과 이쁜 소나무...

▼ 적조사(寂照寺) 승방...

▼ 적조사(寂照寺) 대웅전 옆으로 이 한겨울에 봄꽃이 만발했다...ㅎ 지형적인 구조가 음기가 넘치는 곳이므로 꽃으로 비보를 하는 것도 괜찮아 보인다.

적조사(寂照寺) 너머로 언덕을 넘으면 북악스카이웨이길이 나오고 그 아래로 내려가면 신덕왕후 정릉 입구가 나온다. 답사를 계획한다면 흥천사~적조사~정릉~봉국사~경국사로 이어지는 코스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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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방인야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