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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의 계비 신덕왕후 강씨(神德王后康氏)의 정릉(貞陵)

 

요즘 태종 이방원에 대한 역사 드라마가 인기있어 그동안 여러 차례 조선왕릉답사를 했지만 이곳 티스토리에는 글이 거의 없는 조선왕릉에 대한 글을 제 블로그에서 인용하여 다시 올리니 이해 바란다.

 

내가 사는 서울 성북구에는 조선왕릉이 2기가 있다. 정릉과 의릉. 조선왕릉 중에는 왕권이 강화된 강력한 왕 들도 많은데 또한 힘이 없거나 비운의 왕들도 있다. 성북구에 있는 두 왕은 어찌보면 비운의 왕릉으로 볼 수 있어서 답사는 자주 하면서도 글을 올리는데 인색한 것 같았다. 특히 정릉은 별로 올린 기억이 없다. 
이번에 풍수학우님들과 맘먹고 현장답사를 다녀와서 글을 올린다. 근자에는 조선왕릉을 지역민들과 친숙하게 개방하고 함께 공유하려는듯 재실도 개방하고 매주 토요일에는 능침도 개방을 하여 아주 친절한 곳이 되었다. 관심있는 분들은 매주 토요일 10시, 오후 2시에 정릉, 의릉을 찾으면 해설사와 함께 능침답사를 할 수 있으니 참고 바란다.

 

 

신덕왕후 강씨(神德王后康氏)의 정릉(貞陵)
 
조선 태조의 제2비 신덕왕후 강씨(神德王后康氏)의 능.사적 제208호.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동에 있다.
처음 능지를 정한 곳은 안암동이었으나 산역을 시작할 때 물이 솟아나와 지금의 정동에 자리를 정하게 되었다. 능이 성북구 정릉동으로 옮겨진 것은 1409년(태종 9)이며, 이것은 오로지 태조가 제8왕자 방석(芳碩)을 세자로 책봉한 데 대한 태종의 사감에서였다.
태종은 능을 옮긴 지 한달이 지나자 정자각(丁字閣)을 헐고 석물을 모두 묻어 없애고, 광교(廣橋)에 있던 흙다리가 무너지자 십이신상(十二神像) 등의 석물을 실어다 돌다리를 만들게 하였다.능을 옮긴 뒤 수백 년간 정릉은 왕후의 능이라기보다 주인 없는 무덤에 불과하였다. 1669년(현종 10)송시열(宋時烈)의 계청(啓請)으로 비로소 종묘에 배향하고 능묘로 봉심(奉審)하기로 하였으며, 이경석(李景奭) 등의 계청으로 능을 수리하고, 재실을 중건하여 수호군을 정해주기에 이르렀다. 능 관리를 위하여 영(令) 1원과 참봉 1원을 두었다.


신덕왕후 강씨(神德王后康氏)
 
?∼1396(태조 5). 조선 태조의 계비(繼妃).본관은 곡산(谷山) 또는 신천(信川). 판삼사사(判三司使) 강윤성(康允成)의 딸이다.
신덕왕후가 집권 거사에 참여하여 중요한 임무를 수행한 뒤 계비가 된 배경에는 신천강씨의 권문세족으로서의 위치가 컸다. 아버지 강윤성과 작은아버지 강윤충(康允忠)·강윤휘(康允暉) 형제들은 충혜왕·공민왕 때 재상권문가로서 세도를 떨쳤다.
강윤휘의 아들인 상장군(上將軍) 강우(康祐)는 이성계(李成桂)의 큰아버지인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의 쌍성만호 이자흥(李子興)의 사위로서 두 집안은 겹사돈 관계에 있었다. 강윤충은 충숙왕의 폐행(嬖幸)이 되어 세를 떨쳤고, 충혜왕 때에는 조적란(曺頔亂)을 평정한 공으로 일등공신에 책봉되었다. 아버지 강윤성도 충혜왕과 충목왕 때에 찬성사(贊成事)가 되었으며, 또한 강윤휘는 충정왕 때 판도사판서(版圖司判書)를 역임하였다. 그리고 1356년(공민왕 5)에 원나라의 파병 요청으로 장사성군(張士城軍)의 토벌군이 동원된 적이 있는데, 이 때 원나라에서 파견된 사신이 바로 원나라의 이부낭중(吏部郎中)의 직위를 가진 이성계의 재종숙 이나해(李那海)와 숭문소감(崇文少監)의 직위를 가진 강씨의 오빠 강순룡(康舜龍)이었다. 또한 부원기(附元期) 때 폐행 권신의 일족으로 발호한 영산신씨(靈山辛氏) 신귀(辛貴)의 처도 강씨의 아우가 된다.
이와 같이 고려 말기 권문세족의 배경을 가진 강씨는 이성계의 둘째 부인으로, 위화도회군을 할 당시에는 포천 철현(鐵峴)의 전장(田莊)을 맡아 살림을 따로하고 있었다. 이 때 변고에 대비, 일가족과 함께 동북면으로 피하여 이천에 있는 한충(韓忠)의 집에서 머물렀다.
이성계의 위화도회군 후 조선이 개국되자 1392년 8월에 현비(顯妃)로 책봉되었다. 신덕왕후의 친가는 이성계의 권력 집중과 조선개국 과정에서 중요한 임무를 수행했다는 많은 일화가 전해오고 있다. 사후 존호와 능호를 각각 신덕(神德)과 정릉(貞陵)으로 정하였다. 개국공신들의 헌의로 국모를 높이는 뜻의 공신수릉제(功臣守陵制)를 채용하여 조선의 항식(恒式)으로 삼았고, 개국공신 이서(李舒)에게 수릉직을 맡게 하였다.그런 뒤 기제(忌祭)를 맞아 경복궁 내 강씨의 처소를 인안전(仁安殿)으로 정하고 영정을 봉안했다가 이듬해 9월 정릉에 영각(影閣)을 지어 옮겼다. 
1399년(정종 1) 기일에 흥천사(興天寺)를 원당으로 삼아 제사할 때 태상왕(太上王: 태조)도 참례하였다. 태상왕이 사망한 뒤 1409년(태종 9) 2월에 묘를 사을한(沙乙閑)곡에 이장했다가 다시 한강 남쪽 공현(鞏縣)의 뒤에 이장하여 왕비의 제례를 폐하고, 봄·가을 중월제(中月祭)로 격하시켰다. 그 뒤 1412년 기제는 서모나 형수의 기신제(忌辰祭)의 예에 따라 3품관(三品官)으로 제사를 대행하게 하였다.
200여 년 뒤인 1581년(선조 14) 11월 먼저 3사(三司)에서 신덕왕후의 시호와 존호를 복귀하고, 정릉을 회복하자는 논의가 있었으나 6개월 여만에 정파된 바가 있다.이 때 중신들의 주장은 건원릉비(健元陵碑)에 신의(神懿)·신덕이 열거되어 있고, 강씨가 차비(次妃)로 서술된 점, 태조가 정한 강비의 시책(諡冊)에 칭송이 엄연한데 그 뜻과 달리 후대인들이 부묘(祔廟: 종묘에 신주를 모시는 일)를 폐하고 능을 옮겨 중대한 원(寃)을 남게 한 것 등이 모두 천리에 어긋난다는 것이었다.
그 뒤 현종 대에 이르러 정통명분주의에 입각한 유교이념이 강조되고 예론이 크게 일어나자 강씨의 부묘 문제는 다시 대두하였다. 즉 1669년(현종 10) 2월 판중추부사 송시열(宋時烈) 등은 정릉과 흥천사기문(興天寺記文)이 갖추어 있음을 지적하면서 신덕왕후를 종묘에 배향해야 한다는 차자(箚子)를 올렸다. 이로써 이 해 9월 강씨의 기신제가 8월 11일로 고정되어 260여 년만에 복구되었다. 그리고 추진 기구인 부묘도감(祔廟都監)에서 예조와 함께 시호 제정을 발의하여 순원현경(順元顯敬)으로 정하였다. 시호는 순원현경신덕왕후(順元顯敬神德王后)이고, 능호는 정릉(貞陵)으로 서울 성북구 정릉동에 있다. 소생으로 왕자 이방번(李芳蕃)·이방석(李芳碩)과 경순공주(敬順公主)를 두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인용>

 

문화재지정 사적 제208호
문화재명칭 신덕왕후 강씨(神德王后康氏)의 정릉(貞陵)
소재지 서울 성북구 아리랑로 19길 116
관리자(연락처) 문화재청

 

 

▼ 태조비 신덕왕후 강씨(神德王后康氏)의 정릉(貞陵) 안내판

정릉(貞陵) 세계문화유산 비

정릉(貞陵) 입구... 뒤로 보이는 건물이 재실이다.

정릉(貞陵) 금천교

정릉(貞陵) 홍살문

정릉(貞陵) 홍살문과 정자각...

정릉(貞陵) 홍살문

정릉(貞陵) 정자각과 능침 전경

정릉(貞陵) 전경

정릉(貞陵) 능침은 상당히 높은 곳에 위치한다.

정릉(貞陵) 정자각 동계...

정릉(貞陵) 비각 안내판

정릉(貞陵) 능비에는 대한 신덕고황후 라고 적혀있다. 고종 때 세운 것임을 알 수 있다.

정릉(貞陵) 수복방...

정릉(貞陵) 수라간...

정릉(貞陵) 정자각에는 기신제 순서와 진설도가 그려져 있어서 이해를 돕는다.

정릉(貞陵) 능침 아래 소전대... 소전대는 태조, 태종의 릉에만 있는 것으로 다른 왕릉의 예감 즉 축문을 태우는 시설이다.

정릉(貞陵) 능침을 오르면서 바라본 정자각...

정릉(貞陵) 전경

정릉(貞陵) 장명등은 예전 것 그대로라고 한다.

정릉(貞陵) 장명등

정릉(貞陵) 장명등 옆면...

정릉(貞陵) 고석...

정릉(貞陵)은 나중에 왕릉으로 복위되어 무인석이 없이 문인석만 존재한다.

정릉(貞陵) 청룡쪽 문인석

정릉(貞陵) 백호쪽 석물...

정릉(貞陵) 청룡쪽 석물

정릉(貞陵) 석양

정릉(貞陵) 석물...

정릉(貞陵) 석물...

정릉(貞陵) 능침에서 바라본 정자각과 안산... 

정릉(貞陵)은 능이 너무 높다. 안산 너머 아파트가 뾰족뾰족 화성체를 닮아있다.

정릉(貞陵) 입수는 커다란 바위가 박혀있다.

정릉(貞陵) 입수도두

정릉(貞陵) 후경

정릉(貞陵) 입구 마을에 심어져 있는 오래된 느티나무 아래 정릉에 대한 유래가 적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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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방인야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