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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국장도감의궤:세계일보, 신병주의 역사에서 길을 찾다 인용>

 

조선왕릉의 입지 및 구성

 

조선왕릉의 입지

 

왕이 승하하면 온 궁궐은 임금님을 잃은 슬픔에 잠기지만, 그와 동시에 왕의 장례인 국장(國葬)을 치르기 위해 일사분란하고 분주하게 움직였다. 왕실을 중심으로 한 대소 신하들은 우선 빈전도감, 국장도감, 산릉도감이라고 하는 임시 기관을 설치하고, 각 기관에 관리들을 임명하여 업무를 분담하도록 하였다. 국장도감은 장례에 필요한 의물 설비와 제도 운영을 진행하였다. 빈전도감은 왕의 옥체를 모신 빈전에서 행해지는 모든 일을 총괄하였고, 산릉도감은 왕릉을 조성하는 일을 맡은 기관이다.

각 기관에서는 국장을 치를 때마다 담당 업무 내용과 국장 준비 과정을 자세히 기술하여 의궤를 편찬하였다. 그 기록은 매우 세밀하고 정교하여, 조선시대 국장의 진행상황을 한 눈에 살펴볼 수 있는 매우 좋은 자료임과 동시에 의궤 자체로도 조선시대 기록문화의 높은 수준을 보여주는 가치를 지닌다. 이러한 조선시대 의궤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정조 국장 당시 선릉도감에서 편찬한정조건릉산릉도감의궤(正祖健陵山陵都監儀軌)에 실린 정자각도이다산릉도감은 이와 같이 왕릉 조영에 관한 것을 총괄하였다. 문화재청 조선왕릉>

 

왕의 옥체에 관한 일을 담당, 빈전도감

 

빈전이란 빈소의 높임말로서 국상 때 상여가 나갈 때까지 왕의 옥체를 모시는 곳이다. 따라서 빈전도감은 승하한 임금의 옥체에 관한 업무를 담당한다.
옥체를 여러 종류의 옷가지로 감싸는 과정인 소렴과 대렴 절차에서 필요한 수의, 홑이불 등 각종 물품을 준비하고, 빈전을 차리는 절차를 총괄한다. 왕세자, 대군 이하의 왕자, 왕비, 왕세자빈, 내외명부, 종친과 백관에 대한 상복 준비 역시 빈전도감의 역할이다. 제조(提調) 3, 도청(都廳) 1, 낭청(郎廳) 6명 등을 두었는데, 제조 3명 중 1명은 예조판서가 맡고, 낭청 6명 중에 1명은 예조 낭청으로 임명하여 충당하였다.

 

 

<국장 행렬 모형:조선왕릉전시관(태릉)>

 

◐ 발인에 필요한 의장 준비 담당, 국장도감

 

국장도감은 일반적으로 왕이 승하한 당일에 조직하고, 장례 뒤 우제가 끝날 때까지 약 5개월 동안 존속하며 국장 진행에 필요한 다양한 물품과 문서들을 총괄 제작하였다. 국장도감 아래에는 일방, 이방, 삼방을 설치하였는데, 일방은 왕의 옥체와 부장품 등 다양한 물품을 운반하는 가마와 그에 따른 부속품, 제구류를 주로 제작하였다. 이방은 길흉의장, 왕의 의복과 장신구, 명기 등을 제작하였다. 삼방은 시책, 시보, 애책 등과 만장, 제기를 제작하였다. 총호사(摠護使) 1, 제조 3, 도청 2, 낭청 6, 감조관 6명 내외 등을 임명하여 업무를 수행하게 하였다. 제조 3명은 호조판서, 예조판서, 선공감제조로 구성하였으며, 낭청은 예조낭청, 공조낭청, 선공감, 제용감의 관원으로 임명하여 충당하였다.

 

◐ 왕릉 조영에 관한 일을 담당, 산릉도감

산릉도감은 왕의 능을 조성하는 일을 맡은 기관이다. 왕이 승하한 날로부터 보통 5개월 후에 있을 장례 의식 전까지 능의 조영을 마무리해야 했다. 산릉도감이 설치되면 지관(地官)은 능을 조영할 지역을 가린다. 능을 어느 곳에 둘 것인가는 당시 매우 중요한 사안으로, 이를 두고 정치적인 대립이 생기기도 하였으며, 풍수지리가 좋지 않다는 이유로 훗날 천장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산릉도감의 당상관, 관상감의 영사, 제조, 예조의 당상관 등은 신중하게 능지를 결정하고, 회의를 거쳐 공사일정을 확정하고, 필요한 인력을 산정한 후 공사를 시작하였다. 능을 조영하는 과정에는 석물을 제작하는 일에서 시작하여, 흙을 다지고 풀을 뽑는 일, 정자각 등의 건물을 만드는 일 등이 포함되어 많은 인력이 요구되었다. 이 인력은 17세기 초까지 백성들에게 의무를 지워 부역의 형태로 조달하였으나, 이후에는 인력을 모집하여 고용하는 형태로 바뀌었다.

 

능지(陵地)는 보통 상지관(相地官)이 택지하게 되는데, 능지로서 적합한 자리 후보를 선정하고, 새로 즉위한 왕에게 천거하여 왕의 재가를 받아 결정한다. 때로는 왕이 친히 답사하기도 하며, 생전에 미리 능지를 선정하는 경우도 있다.

 

<조선왕릉 입지:태릉>

풍수 사상에 기초

 

조선왕릉의 입지는 풍수사상을 기초로 한다. 조선왕실과 국가의 번영을 위해 자연지형을 고려하여 터를 선정하는 것이 필수적인 사항이었다. 조선왕릉은 기본적으로 지형을 거스르지 않는 원칙을 고수하였기 때문에, 크기나 구성에 있어 자연친화적이며 주변경관과 잘 어우러지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조선왕릉은 크게는 도읍지인 한양(현 서울) 주변의 한강을 중심으로 한강 북쪽의 산줄기인 한북정맥과 남쪽의 지형인 한남정맥을 중심으로 택지되었다. 그리고 봉분을 중심으로 한 능침공간은 조선의 풍수사상에서 길지라고 일컫는 사신사(四神砂)가 갖추어진 곳과 잘 부합하게 된다. 이는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지형을 갖춘 곳으로, 주산(主山)을 뒤로 하고 그 중허리에 봉분을 이루며 좌우로는 청룡(靑龍, )과 백호(白虎, )의 산세를 이루고 왕릉 앞쪽으로 물이 흐르며 앞에는 안산(案山), 멀리는 조산(朝山)이 보이는 겹겹이 중첩되고 위요(圍繞:울타리처럼 둘러싸여 있는)된 곳이다.

 

왕과 왕비의 시신이 들어있는 현궁(玄宮)이 묻혀있는 봉분은 혈처(穴處)에 위치한다. 혈처는 땅의 기운이 집중되어 있는 곳으로, 봉분이 자리 잡고 있는 언덕()이 땅의 기운을 저장하고 능의 뒤쪽에 봉긋하게 솟아오른 잉()은 그 기운을 주입시켜주는 역할을 맡아 혈처를 이룬다.
그래서 조선왕릉은 전체적으로 야지(野地)도 아니며 산지(山地)도 아닌 비산비야(非山非野)의 자리에 입지하고 있는 특징을 가지게 되었다. 이것은 야지에 조성되어 있는 신라의 왕릉이나 산지를 선호했던 고려의 왕릉과는 다른 형태이기도 하다.

 

<조선왕릉 입지는 풍수사상에 기초하였다. 사진: 문화재청 조선왕릉>

 

 

도성과 가까운 입지조건 - ()의 실천

 

왕릉의 입지선정에는 풍수지리 이외에도 지역적 근접성을 고려하는 일이 중요하였다. , 풍수적으로 명당이면서도 왕궁이 있던 도성(한양)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곳이 왕릉의 최적지였다. 이와 같이 접근성이 중요한 입지 조건이 되는 것은 후왕들이 자주 선왕의 능을 참배하고자 하는 효심의 실천에서 비롯된 것이다.

 

 

 <조선왕릉의 분포도:문화재청 조선왕릉>

 

 

☞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조선왕릉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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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방인야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