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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릉(貞陵:태조 계비 신덕왕후릉) 원찰(願刹)(3) : 경국사(慶國寺)

 

경국사는 이름에서 이미 호국불교라고 느껴진다. 그래서인지 경국사를 정릉 원찰이라고 말하는 분들이 상당히 많다. 절 안내문 어디에도 정릉 원찰이라는 말이 없는데도 사람들은 나라에서 지원하는 절간으로 여겨 그렇게 보는 것 같다.
경국사는 예전 답사팀들과 함께 다녀온 적이 있었는데 벌써 15년 가까이 된듯하다. 이번에 정릉 원찰을 답사하면서 눈 온 뒤에 다시 찾았는데 내가 생각했던 아늑하고 포근한 절간이라는 생각보다 불사를 그 사이에 많이해서 전각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어서 마음이 급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여름에 찾으면 정릉천을 따라 숲속으로 들어가는 느낌이 강한데 겨울에 찾았더니 그런 시원함은 없고 뭔가 분주한 느낌이 자꾸 들었는데 그 이유를 잘 모르겠다.
이곳도 부처님을 뵙기 보다는 전각들을 둘러보고 초 하나 켜놓고 왔다. 극락보전 앞에 향초 켜는 곳이 있어서 작은 마음을 담고 초를 켰다. 눈 내린 뒤라 언덕길과 계단이 미끄러워 무척 조심스러웠다.
극락보전 뒤로 산신각, 영산전 등이 있어서 둘러보고 아래쪽은 계단이 미끄럽기도 하고 앞쪽 주차장에서 보면 절간 전체가 다 보여서 깊숙히 들어가지는 않았다. 그래도 한바퀴 둘러보는데 승방까지 다 본 듯 하다. 내려오면서 관음보살상이 있어서 사진 찍으려고 봤더니 유리 안에 있어서 사진이 안나온다. 
어떤 자료에서 보니 요나라 관세음보살이라고 되어있는데 정확한 내력은 모르겠다. 그 옆에 커다란 돌로 책 형상을 해놓은 것은 '불교대사림편찬발원문'이라고 한다. 입구 일주문 부근에 부도밭이 있는데 지관대종사사리탑과 자운율사사리탑이 있다. 언덕 위에 있어서 눈길이라 먼 거리에서 사진만 찍었다.

 

 

경국사(慶國寺)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본사 조계사(曹溪寺)의 말사(末寺)이다. 1325년(충숙왕 12) 율사 정자(淨慈)가 창건하여 청암사(靑巖寺)라 하였고, 1330년경 무기(無寄)가 머물면서 천태종(天台宗)의 교풍을 크게 떨쳤으며, 1331년 거사 채홍철(蔡洪哲)이 선방을 증축하여 선승들의 수도를 적극 후원하였다.
1352년(공민왕 1) 금강산 법기도량(法起道場)을 참배하고 남하한 인도 승려 지공(指空)이 주석(住錫)한 뒤부터 고승대덕의 수도처이자 호국안민을 위한 기도도량으로서 전승되었다. 1507년(중종 2) 억불정책으로 법당을 비롯한 모든 건물이 퇴락된 채 빈 절로 남아 있다가, 1545년 왕실의 도움으로 중건되었다.
1546년(명종 1) 명종의 즉위로 문정왕후가 섭정하게 되자, 왕실의 시주로 건물을 전면 중수하고 낙성식과 함께 국태민안을 위한 호국대법회를 열었다. 그 때 부처님의 가호로 나라에 경사스러운 일이 항상 있기를 기원하는 뜻에서 경국사라 개칭하였다.
그 뒤 1693년(숙종 19) 승성(昇誠)이 건물을 중수하고 천태성전(天台聖殿)을 신축하였으며, 1737년 의눌(義訥)이 주지에 취임하였고, 1793년 태흘(泰屹)이 크게 중수하였다.
1842년(헌종 8) 한국불교 계맥(戒脈)의 중흥조인 낭오(朗旿)가 관음전을 신축하였다. 1864년(고종 1) 왕의 등위축재(登位祝齋:왕의 등극을 축하하는 기도)를 열었고, 1868년 호국대법회 개설과 함께 삼성보전과 산신각을 신축하였으며, 왕실에서는 종을 희사하기도 하였다.
1878년 치능(致能)이 예조의 도움으로 각 요사를 중수하고 김대비(金大妃)의 사십구재를 지냈으며, 1915년에는 석찰(錫察)이 극락보전을 중수하였다.
1932년 이원우(李元雨)의 시주로 반야교(般若橋)를 중수하였고, 1921년에는 단청과 탱화의 대가인 보경(寶鏡)이 주지에 취임한 뒤, 1979년까지 퇴락된 건물을 중수하여 한국불교의 모범 사찰로 변모시켰다. 창건 이래 한국 계율의 맥을 이어 온 도량이며, 정토사상에 바탕을 둔 기도도량으로서도 대표적인 사찰이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극락보전·영산전·명부전·관음전·삼성보전·천태성전·산신각·봉향각·시방선원(十方禪院)·부림정사·동별당·요사 등 17동의 건물이 있다.
그 가운데 극락보전에는 아미타삼존불을 비롯하여 보물 제748호로 지정된 목각탱화 및 신중탱화·팔상탱화 등이 봉안되어 있으며, 시방선원에서는 매주 일요일에 일요선방이 개설되고 있다.
주변 산세가 묘하고 약수가 있어 참배객들이 많이 찾고 있다. 서울 주위의 대표적인 사찰로 이승만(李承晩)이 대통령 시절 자주 찾던 곳이며, 부통령시절에 방한 했던 미국의 닉슨(Nixon,R.M.)은 그의 『회고록』에서, 이 절에 참배했던 것이 가장 인상적이었다는 것과 함께 사진을 수록하기도 하였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인용>

 

문화재지정 서울시 전통사찰
문화재명칭 정릉(貞陵) 원찰(願刹) 경국사(慶國寺)(3)
소재지 서울 성북구 보국문로 113-10
관리자(연락처) 대한불교 조계종 경국사(02-914-5447)

 

▼ 정릉(貞陵) 원찰(願刹) 경국사(慶國寺) 안내문

▼ 정릉(貞陵) 원찰(願刹) 경국사(慶國寺) 일주문

▼ 경국사(慶國寺) 범종각

▼ 경국사(慶國寺) 관음성전

▼ 경국사(慶國寺) 관음성전 옆으로 극락보전 가는 길목에 경국사 현판이 있다.(이승만 대통령 글씨)

▼ 경국사(慶國寺) 극락보전 오르는 길...

▼ 경국사(慶國寺) 극락보전... 초 하나 밝히고 건강을 기원하며 경내를 두루 돌아보고 내려왔다.

▼ 경국사(慶國寺) 극락보전에는 목각탱이 있는데... 들어가지 않아서 문화재청 자료를 인용한다.

경국사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서울 慶國寺 木刻阿彌陀如來說法像):보물 제748호
 
서울 경국사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서울 慶國寺 木刻阿彌陀如來說法像)은 서울 성북구 정릉동 경국사 극락전에 모셔진 조선시대의 목각탱으로 중앙의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모두 13구의 불상과 보살이 있다.
중앙에는 아미타여래가 커다란 광배(光背)를 배경으로, 여러 층으로 된 대좌(臺座) 위에 있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이 붙여 있으며, 넓적한 얼굴은 형식화가 정착된 조선 후기 불상의 특징을 잘 반영하고 있다. 얼굴에 비해 몸은 왜소하고, 양 어깨에 걸치고 있는 옷은 두꺼워서 신체 윤곽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는 아래위의 너비가 같은 조선시대 특유의 형식이다. 불꽃무늬가 위로 솟아서 뻗쳐있고 그 안에 작은 부처들이 표현되어 있다. 본존 좌우에 아미타 8대보살이 있고, 그 밑 좌우에 사천왕 중 증장천과 지국천이 있다. 8대보살은 지장보살을 제외하고 모두 머리에 관(冠)을 쓰고 있으며, 두꺼운 옷을 입고 연꽃을 든 채 활짝 핀 연꽃 위에 서 있다. 본존과 같은 높이에 보살이 서 있고 바깥 좌우에는 나한상이 1구씩 서 있다. 전체적으로 조각수법이 간결하고 양감이 절제되어 평담한 미를 보여준다.
이 작품은 얼마 남아 있지 않은 조선 후기 목각탱화 가운데 하나로서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문화재청>


경국사 목관음보살좌상 (慶國寺 木觀音菩薩坐像):서울특별시 시도유형문화재 제248호
 
이 불상은 1703년(강희 42년) 청신(淸信)이 화주가 되어 전라남도 영암 월출산 도갑사에서 조성되어 도갑사 견성암에 봉안되었던 관세음보살좌상으로, 현재는 서울 경국사 법당 향우측 벽에 봉안되어 있다. 전체높이가 60cm에 달하는 중형의 보살상으로서, 복장(腹藏)에서 발견된 발원기에 의하면 색난(色難)을 수조각승(首彫刻僧), 순경(順瓊)을 부조각승으로 하여 행원(幸垣), 대원(碓遠), 일기(一機), 추☐(秋☐), 대유(大裕), ☐척(☐陟) 등이 함께 조성하였다고 한다. 전체적으로 보존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보살상은 전체적으로 신체에 비하여 두부(頭部)가 큰 편으로, 머리를 약간 숙이고 결가부좌한 모습이다. 머리에는 보관을 쓰고 있는데, 장식 등이 잘 남아있다. 정상부에는 높고 길죽한 보계가 표현되었으며 이마부분에는 빗으로 빗은 듯 머리카락이 가지런히 표현되었고, 보발은 귀의 중간부분을 감싸고 흘러내리다가 어깨 위에서 세 가닥으로 갈라져서 팔뚝 위로 흘러내렸다. 얼굴은 사각형에 가깝지만 턱 부분에 살이 올라 부드러워 보인다. 미간에는 백호가 선명하며, 활형[弓弧]의 가는 눈썹과 약간 위로 치켜뜬 긴 눈, 오똑한 콧날, 꾹 다문 얇은 입술 등은 조선후기 불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특징이다.
신체는 안정감있고 균형이 잘 잡혀있는 편으로, 어깨 폭이 넓지 않아 아담하면서도 단정해 보이며 결가부좌한 무릎 폭도 적당하여 안정감을 준다. 양 어깨에는 법의가 걸쳐져 있는데, 법의는 목 뒷부분이 약간 접혀있으며 왼쪽의 법의는 왼쪽 어깨를 완전히 가리고 어깨에서부터 무릎부분까지 내려오면서 무릎 위에 놓인 왼손을 손목부분까지 완전히 덮고 있으며, 오른쪽 법의는 어깨를 덮은 뒤 오른쪽 팔꿈치 아래로 하여 배 부근으로 내려가 왼쪽에서 내려온 법의 안쪽으로 여며진 모습이다. 이와 같은 착의법은 넓게 트인 가슴, 수평 또는 연꽃형의 군의 표현과 함께 조선후기 불상의 가장 전형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오른손은 어깨 높이로 들어올려 첫째와 셋째손가락을 마주잡고 있으며, 왼손은 왼쪽 무릎에 대어 길죽한 정병을 잡고 있다. 한편 좌세는 결가부좌를 하고 있는데, 오른쪽 발이 완전하게 드러나 있으며, 무릎 앞쪽으로는 옷자락이 물결치듯이 좌우로 유려하게 흘러내리고 있다.
보관은 장식과 관대 등이 잘 남아있다. 영락장식과 화염보주 등으로 화려하면서도 치밀하게 장식된 보관에는 아미타화불은 표현되지 않았다. 특히 귀 옆으로 율동감있게 뻗어 내린 관대자락은 강렬하면서도 동적인 느낌을 준다.
이 보살상은 조선후기 호남지역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조각장인 색난(色難)이 1703년에 조성한 보살좌상으로, 신체에 비하여 다소 큰 듯한 얼굴이라든가 안정감있는 좌세, 오똑한 코, 수평으로 가로지른 군의의 표현, 단정한 결가부좌의 자세 등이 조선후기 불상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보존상태도 양호하며 17세기 목조보살상의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문화재청>

 

▼ 경국사(慶國寺) 목각탱(보물)과 목관음보살상(유형문화재)(문화재청에서 옮겨옴)

▼ 경국사(慶國寺) 극락보전 위쪽으로는 천태성전과 산신각이 있다.

▼ 경국사(慶國寺) 천태성전과 산신각

▼ 경국사(慶國寺) 영산전

▼ 경국사(慶國寺) 명부전...

▼ 경국사(慶國寺) 환희당

▼ 경국사(慶國寺) 극락보전 앞쪽으로 무량수각 현판이 걸려있다.

▼ 경국사(慶國寺) 삼성보전...

▼ 최근에 지은 것으로 보이는 금강반야대...

▼ 승방으로 쓰는듯한 무우정사

▼ 경국사(慶國寺) 만월당... 그 옆으로 지금도 계속 불사가 이뤄지고 있다.

▼ 경국사(慶國寺)를 내려오면서 유리관 안에 모셔진 관음보살이 있는데... 설명문이 없어서 다른 사람의 글을 보니 요나라 관음보살로 나오는데 확인하지는 못했다.

▼ 경국사(慶國寺)에 있는 '불교대사림편찬발원문'

▼ 경국사(慶國寺) 입구에 있는 부도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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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방인야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