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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방학을 맞아 풍수답사를 진행했다. 원래는 풍수문화답사라 하여 묘지풍수만 가는 것이 아니라 주변의 문화재, 문화시설 등을 답사를 하는데 이번 학기에는 풍수학인들만으로 답사팀을 구성하여 앞으로 4주 동안 음택풍수 위주의 답사를 진행한다.

첫번째 답사로 가평, 춘천지역 묘역을 찾았다. 월사 이정구선생과 3대 대제학의 묘, 청풍부원군 김우명 묘, 휘문학교 창립자 민영휘 묘, 고려개국공신 장절공 신숭겸 묘 위주로 진행했다. 사진 위주로 답사기 올린다.

 


월사 이정구선생

가평군 상면 태봉리 산 115-1

■ 월사 이정구 묘(경기도기념물 79호)

이정귀(李廷龜, 1564년∼1635년)는 조선의 문신이다. 자는 성징, 호는 월사, 본관은 연안. 조선전기 학자이자 바둑의 대가 연성부원군 이석형의 5대 손으로 태어났다.
모친이 해산할 때 범이 문밖에 와 엎드려 있다가 선생이 태어난 뒤에야 돌아갔다. 사람들이 모두 신기해하면서 군자(君子)가 태어나 문명(文明)을 밝힐 상징이라고 여겼다. 선조 23년(1590년)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에 들어갔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선조가 몽진을 떠나기 전날 광해군의 세자책봉을 위해 숙직을 하던 장인 예조판서 권극지가 급서하여 몽진길에서 떨어지게 되었다. 급히 장인의 장례를 치르고 가묘를 쓴 뒤 처자와 자신의 부친, 장모, 처제를 데리고 왕을 쫓아 따라갔다.
임진왜란 때 행재소(行在所)에 가서 설서(說書)가 되었다. 이듬해 명나라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의 요청으로 《경서(經書)》를 강의하여 학자로서 존경을 받았다. 그후 병조참지(兵曹參知)가 되어 부제학(副提學)을 겸하였다. 1598년 명나라 병부주사 정응태(丁應泰)가 조선에서 왜병을 끌어들여 중국을 치려 한다고 자기 나라에 무고한 사건이 일어나자 조선국 변무주문(朝鮮國辨誣奏文)을 지어 진주부사(陳奏副使)로 명나라에 가서 정응태를 파직시켰다.
《조천기행록(朝天紀行錄)》을 간행했고, 1608년(광해군 즉위) 병조와 예조판서를 역임하였으나 1613년 계축옥사(癸丑獄事) 때 모함을 받아 사직하였다. 1615년 형조판서가 되고 1623년(인조 1) 예조판서가 되었다.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에 왕을 공주(公州)에 호종하고 1627년 정묘호란 때 병조판서로 왕을 호종, 강화에 피난하여 화의에 반대하였다. 1628년 우의정이 되고 이어 좌의정에 올랐다. 한문학의 대가로서 글씨에도 뛰어났고 신흠(申欽)·장유(張維)·이식(李植)과 함께 조선 중기의 4대 문장가로 일컬어진다. 저서에 《월사집(月沙集)》이 있고, 편저에 《서연강의(書筵講義)》 《대학강의(大學講義)》 등이 있다.
가평군 상면 태봉리에 조성된 월사 이정구선생의 묘소는 월사 선생의 묘소가 제일 앞에 있으며 위로 인조 때 예조판서, 대제학을 지낸 장손 이일상(李一相)의 묘가 있으며, 그 위로 예조판서와 대제학을 지낸 장자 이명한(李明漢)의 묘가 있다. 후손의 묘가 위에 있는 것은 순서대로 묘를 쓰면 역적이 나올 묘 자리라 하여 반대(易葬)로 묘를 썼다고 전해오고 있다. (두산백과, 위키백과에서 인용)

 

▼월사 이정구선생 묘역... 전날 눈이 내려 하얀 눈밭에 있는 묘역이 아름답다.

▼월사 이정구선생 묘역 안내문

▼삼세신도비... 중앙이 월사선생 신도비이고 좌우에 아들, 손자 신도비이다. 원래 비각으로 덮혀 있었는데 벗겨내니 한결 시원해 보인다.

▼월사 이정구선생 묘역... 언제봐도 근사한 현무 삼태봉이 보기 좋다. 현무정까지 용맥을 따라 걸었다.

▼월사 이정구선생 묘역 후경... 아침 일찍 갔는데 역광으로 비춘다.

 


청풍부원군 김우명 묘

춘천시 서면 안보리 산 25-1

■ 청풍부원군 김우명 묘(강원도기념물 제20호)

김우명(金佑明, 1619년 음력 2월 9일 ~ 1675년 음력 6월 18일)은 조선의 문신이며, 현종의 왕비인 명성왕후의 아버지이다. 명성왕후가 세자빈으로 간택 된 뒤 왕비에 오르면서 국구로서 청풍부원군(淸風府院君)에 봉작되었다.
김우명은 1619년 경기도 가평군 잠곡에서 태어났다. 조광조와 함께 기묘사화 때 살해된 김식의 후손으로, 군자감판관을 지내고 증 의정부좌찬성에 추증된 김비(金棐)의 증손이자, 할아버지는 참봉 증 영의정 김흥우(金興宇)이고, 아버지는 영의정을 지낸 김육(金堉)이고, 어머니는 파평윤씨(坡平尹氏)로 증 이조 참의(吏曹參議)에 추증된 윤급(尹汲)의 딸이다. 그는 뒤에 5촌 아저씨인 김지(金址)의 양자로 입양되었다.
1642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후 강릉참봉, 세마(洗馬) 등을 역임했다. 부친상과 현종 즉위 이후 1661년 영돈녕부사가 되고 이후 오위도총부도총관과 호위대장을 역임하였다. 1674년 민신(閔愼)의 대부복상문제(代父服喪問題)를 둘러싸고 남인과 서인이 대립하자, 서인 내 한당(漢黨)파의 지도자로서 남인이었던 허적, 윤휴, 허목 등과 동조하여 산당인 송시열 등을 공격하는데 가담하였다. 그러나 1675년(숙종 1년) 숙종 초에는 복창군·복평군형제의 행패를 탄핵하였으며, 외손자인 숙종에게 위협이 되는 왕의 당숙인 복창군과 복선군, 복평군(福平君) 삼형제를 제거하려 했다가 혐의점이 없어 실패하고 윤휴 등의 역공격을 당하고 몰락했다. 그 뒤 남인 및 서인 산림의 비판이 더욱 심해지자 두문불출하였다. 이후 술병과 홧병으로 사망하였다. 그는 본래 서인 당원이었으나 민신의 대부복상 문제와 부친 김육(金堉) 묘소의 수도(隧道) 문제 등으로 송시열 등과 갈등하기도 했다.
사후 증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자는 이정(以定),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대동법을 시행, 추진한 김육(金堉)의 차남이며, 숙종대의 서인 중진 김석주의 숙부이다. 또한 효의왕후의 친정아버지 김시묵은 그의 5대손이다.
강원도 춘천시 서면 안보리 산25-1에 매장되었고, 묘비문은 이민서(李敏敍)가 썼다. 행장은 조카 김석주(金錫胄)가 지었다. 김우명의 묘는 강원도 기념물 제20호로 지정되었다. 사후 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1681년(숙종 6년) 12월 4일 충익의 시호가 추서되었다. 숙종이 내린 시호 증시 교지는 후일 청풍부원군김우명상여(중요민속자료 120호)와 김우명영정과 함께 그의 12세손 김성구가 국립춘천박물관에 기증하였다. 일제 강점기의 소설가 김유정의 선조가 된다.(위키백과에서 발췌)

 

▼청풍부원군 김우명 신도비 전,후면

▼청풍부원군 김우명 묘 안내문

▼청풍부원군 김우명 묘

▼청풍부원군 김우명 묘비, 장명등

▼청풍부원군 김우명 묘... 허한 우측 계곡을 피해 조안을 잡았다.

 


하정(荷汀) 민영휘(閔泳徽) 묘

춘천시 동면 장학리 산 14

■ 하정(荷汀) 민영휘(閔泳徽) 묘

본관은 여흥. 초명은 영준(泳駿). 자는 군팔(君八), 호는 하정(荷汀). 아버지는 증(贈)영의정 두호이다. 
1877년(고종 14) 정시문과에 급제해 주서·정언을 지내고, 민씨척족세력을 배경으로 동지경연사·지돈녕부사 등을 지냈다. 1884년 갑신정변을 진압하는 데 앞장섰고, 1886년 참의내무부사·도승지, 이듬해 주일변리대신으로 일본에 파견되었다.
귀국한 뒤 민씨척족세력의 우두머리로 경리사·이조판서·선혜아문당상·친군경리사 등을 역임했다. 1894년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나자 청의 위안스카이[袁世凱]에게 도움을 요청해 토벌하려 했다. 이후 갑오개혁이 실시되자 탐관오리로 논죄되어 전라남도 영광 임자도로 귀양가게 되었으나 탈출해 벽동의 청군부대에 은신하고 있다가 중국으로 도망갔다. 
1896년 대사령으로 귀국한 뒤 중추원의장·헌병대사령관 등을 지냈다. 1910년 한일합병 후 일본정부로부터 자작작위를 받았다. 한편 상업은행의 전신인 천일은행을 세웠고, 1906년 5월에는 휘문학교를 설립했다.(다음백과에서 인용)

 

 

▼하정(荷汀) 민영휘(閔泳徽) 묘 입구... 입구에 있는 신도비는 자식들이 세웠다. 친일파로 지낸 과거로 인해 자유롭지 못하다.

▼하정(荷汀) 민영휘(閔泳徽) 신도비와 묘비... 신도비는 자식들이 읍혈(泣血)로 썼다고 되어 있으며, 묘비명은 스스로 지은 묘비다.

▼하정(荷汀) 민영휘(閔泳徽) 묘

▼하정(荷汀) 민영휘(閔泳徽) 묘 석물.. 문인석은 어딘지 낯설다.

▼하정(荷汀) 민영휘(閔泳徽) 묘 후경... 앞쪽 안산이 근사하고 좌우 용호가 잘 관쇄 되어 있어서 매우 좋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향법은 어긋나 있다. 좌선수로 봤으면 당판에 못미쳐 수구로 나가서 잘못이고, 우선수로 봤다면 묘향묘류 향법이 어긋나 잘못이다. 

 


장절공 신숭겸 장군 묘

춘천시 서면 방동리 821

■ 장절공 신숭겸 장군 묘(강원도 기념물 제21호)

본관은 평산(平山). 초명은 신능산(申能山). 평산(平山) 신씨(申氏)의 시조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전라도 곡성현(谷城縣) 출신으로 태조(太祖)가 평산에서 사성(賜姓)하였다고 하고, 『고려사』열전(列傳)에는 광해주(光海州: 지금의 강원도 춘천) 사람이라 하였다. 그런데 『신증동국여지승람』춘천도호부(春川都護府) 인물조(人物條)에 그의 이름이 실려 있으며, 또한 그의 묘가 춘천에 있는 것 등으로 보아, 본래 곡성 출신으로 뒤에 춘천에 옮겨와서 살게 된 것으로 보인다.
몸집이 장대하고 무용(武勇)이 뛰어나 궁예(弓裔) 말년에 홍유(洪儒)·배현경(裵玄慶)·복지겸(卜智謙)과 함께 혁명을 일으켜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王建)을 추대해 개국일등공신(開國一等功臣)에 봉해졌다.
태조 즉위 후 7, 8년 동안 소강상태였던 후백제와의 긴장관계는 견훤(甄萱)이 신라를 공격함으로써 악화되었다. 927년 견훤이 고울부(高鬱府: 지금의 경상북도 영천)를 습격하고, 신라를 공격해 경애왕(景哀王)을 죽이고 갖은 만행과 약탈을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태조는 크게 분개해 사신을 신라에 보내어 조제(弔祭)하는 동시에 친히 정기(精騎) 5천을 거느리고 대구의 공산(公山) 동수(桐藪)에서 견훤을 맞아 싸우게 되었다. 그러나 후백제군에게 포위되어 태조가 위급하게 되었을 때, 대장(大將)이 되어 원보(元甫)김락(金樂)과 더불어 힘써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간신히 위기를 벗어난 태조는 신숭겸의 죽음을 매우 슬퍼해 시호를 장절(壯節)이라 하였다. 또한 아우 신능길(申能吉)과 아들 신보(申甫)를 모두 원윤(元尹)으로 삼고, 지묘사(智妙寺)를 창건해 그들의 복을 빌게 하였다. 994년(성종 13) 4월에 태사(太師)로 추증되어 태사 개국장절공(太師開國壯節公)으로 태묘(太廟)의 태조 사당에 배향(配享)되었다. 신숭겸의 행적을 기록한 『평산신씨장절공유사(平山申氏壯節公遺事』에는 1120년 예종이 신숭겸과 김락을 추도하며 지었다는 「도이장가(悼二將歌)」라는 향가가 전한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인용)

 

 

▼춘천시 서면은 우리나라 면단위 중에서 박사가 가장 많이 배출되었다 해서 박사마을이라 한다. 이번에 찾아보니 188명까지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장절공 신숭겸 장군 묘 안내문

▼장절공 신숭겸 장군 묘 원경... 조선8대명당이라 하신 분들은 들어오는 용이 기복굴곡하며 힘차게 들어오고 빼어난 사격과 국세를 말하고, 혹자는 전순이 길게 늘어져 있고 멈춤이 없다해서 과룡처로 말하기도 한다. 세월이 오래된 묘역은 이미 검증이 된 것으로 봐서 현재의 잣대로만 분석하기는 문제가 있어 보인다.

▼장절공 신숭겸 장군 묘비... 기존 묘비는 광해군 때 세웠는데 마모되어 묘 계단 아래에 묻고 현재의 묘비를 1965년에 세웠다.

▼장절공 신숭겸 장군 묘... 세곳 중에 어디가 진짜 무덤일까? 갈때마다 질문을 하곤 한다. 입수룡이 너무 가파라서 들어갈 엄두를 못내고 수구처 입구에서 들어오는 용을 보는 것으로 대신했다.

▼장절공 신숭겸 장군 묘 후경... 멀리 봉의산, 대룡산이 보이고 수구가 꽉 막혀 있어 재물이 넉넉하며, 앞쪽 귀봉이 인물을 예견하는 등 1100여년이 지난 지금도 후손들이 끊임없이 배출되고 있다.

▼답사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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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방인야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