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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고찰 상왕산(象王山) 영탑사(靈塔寺)

 

당진 답사를 하면서 영탑사를 찾았다. 산정에 위치하는데 차량 진입이 가능해 편하게 다녀왔다. 마침 눈발이 간간히 뿌릴 때라서 분위기도 좋았다. 이곳에 문화재가 여러개 있어서 다 돌아보고 싶었는데 대웅전에서 기도를 하고 있어서 사진 촬영이 여의롭지 않아 문화재는 문화재청 사진을 이용하였다. 날씨가 쌀쌀해서 신도들도 거의 보이지 않고 눈도 내리고 해서 일찍 떠나왔다.

 

천년고찰 상왕산(象王山) 영탑사(靈塔寺)
 
영탑사는 충청남도 당진시 면천면 성하리의 연화봉에 위치한 대한 불교 조계종(大韓佛敎曹溪宗) 소속의 유서 깊은 사찰이다. 제7교구 수덕사(修德寺)에 속한 말사이다.
영탑사는 창건 연대가 정확하지 않으나 통일 신라 말기 도선 국사(道詵國師)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진다. 고려 후기 보조 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이 중수하였으며 그 후 1798년(정조 2)에 연암당(鍊岩堂) 지윤(智允)이 중건하였다. 1911년에 신도들이 중수하였으며, 1928년에 이민동이 노전(爐殿)을 중건하였다. 영탑사는 원래 대웅전이 없었는데 1985년 30평[99.17㎡] 규모의 대웅전 건립을 시작하여 1990년에 완공하였다. 1992년에는 화재로 노전이 소실되었으나 최근에 복원되었다. 2010년에 산신각을 승려 초운이 신축하였다. 
영탑사는 여러 모금 활동, 환경 보호 활동 등 자비와 생명사랑 활동을 다양하게 펼치고 있다. 2016년 현재 영탑사의 주지는 초운이다. 19년 전 영탑사 총무로 있다가 주지로 부임하였다. 현재 신도는 약 800명 정도로 면천면 일대에서 불도를 널리 퍼뜨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사내의 중앙을 통과하는 계류를 경계로 남서쪽에 대웅보전이 있고 북동쪽으로 요사, 산신각, 유리광전, 석탑이 배치되어 있다. 정면 3칸의 유리광전 안에는 약사여래상이 양각되어 있다. 
요사의 수미단 위에는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봉안하였다. 지금의 산신각은 자연석 기단에 초운 주지가 2010년에 신축하였다. 
영탑사는 보물 제409호 당진 영탑사 금동 비로자나불 삼존 좌상(唐津靈塔寺金銅毘盧遮那佛三尊坐像), 충청남도 유형 문화재 제111호 영탑사 약사여래상, 충청남도 문화재 자료 제216호 영탑사 칠층 석탑, 충청남도 문화재 자료 제219호 영탑사 범종(靈塔寺梵鐘)이 있다. 
영탑사가 있는 상왕산 연화봉 꼭대기에 약 4m쯤 되는 바위가 솟아 있다. 이 바위 중간에 넓은 빈 자리가 있고, 서쪽으로는 마치 의자의 등받이 모양 형태로 되어 있다. 바위 전체로 보면 커다란 의자 형상이다. 이 등받이 모양의 바위 정면 일부를 다듬어 예서체로 '依斗岩(의두암)'이라 새겨 놓았고 좌측 아래쪽에는 '人道正一(인도정일)'이라 새겨져 있다. 이는 1887년(고종 24) 운양(雲養) 김윤식(金允植)[1835~1922]이 새긴 것이다. "매일 하루도 빠지지 않고 북쪽 서울을 바라보고 임금님의 만수무강과 나라가 융성하기를 기원한다."라는 '每依北斗望京華(매의북두망경화)'라는 글자를 줄여서 바위에 조각한 것이라 한다.<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당진 영탑사 금동비로자나불삼존좌상(唐津靈塔寺金銅毘盧遮那佛三尊坐像)(보물 제409호)
 
당진 영탑사 금동비로자나불삼존좌상(唐津 靈塔寺 金銅毘盧遮那佛三尊坐像)은 신라말에 도선국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는 영탑사에 모신 불상으로, 8각형의 연꽃무늬의 대좌 위에 본존불인 비로자나불이 있고 양 옆으로 협시보살이 있는 삼존불(三尊佛) 구도이다.
본존불은 머리에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그 위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큼직하다. 사각형의 얼굴은 원만한 느낌을 주며 선으로 표현된 옷주름은 도식화되어 보인다. 상반신은 길고 큼직한 데 비하여 하반신이 무척 위축되어 있어 불안정한 느낌을 준다. 무릎 높이도 상반신에 비하여 낮아서 몸의 균형이 고르지 못하다. 가슴 역시 평면적이며 하반신 처리는 둔중하게 하였는데 이러한 수법은 고려 중기 이후 나타나는 특징이다. 손은 비로자나불이 취하는 일반적인 모양으로 왼손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싸고 있는 모습이다.
왼쪽 보살과 오른쪽 보살은 모두 같은 자세에 똑같은 수법을 하고 있다. 머리에 쓴 보관(寶冠)은 따로 만든 것이며, 그 안에 머리묶음이 높이 솟아 있고 머리카락은 길게 어깨까지 내려온다. 얼굴은 본존불과 기본적으로는 같으나 좀더 여성다우며, 가슴의 목걸이 장식은 유난히 크다. 잘록한 허리에 둘러진 천의(天衣)는 몇 가닥 띠로 허리를 잔뜩 졸라 맨 것처럼 보이게 하였다. 이 보살들의 대좌(臺座)는 본존불의 대좌에서 나온 두 개의 연꽃 줄기가 올라가서 만든 연꽃 봉오리이다.
이 금동불상은 구도와 형태 등에서 고려불상의 특유한 특징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평가된다.<문화재청>

 

문화재지정 보물 제409호
문화재명칭 당진 영탑사 금동비로자나불삼존좌상(唐津靈塔寺金銅毘盧遮那佛三尊坐像)
소재지 충청남도 당진시 면천면 성하로 139-33
관리자(연락처) 대한불교조계종(大韓佛敎曹溪宗) 제7교구 수덕사(修德寺) 말사

 

▼ 천년고찰 상왕산(象王山) 영탑사(靈塔寺) 전경

▼ 천년고찰 상왕산(象王山) 영탑사(靈塔寺) 

▼ 천년고찰 상왕산(象王山) 영탑사(靈塔寺) 가람 배치도

▼ 천년고찰 상왕산(象王山) 영탑사(靈塔寺) 산신각, 유리광전

▼ 영탑사(靈塔寺) 대웅전

▼ 영탑사(靈塔寺) 대웅전은 아늑하게 배치되어 있다.

▼ 영탑사(靈塔寺) 인법당...

▼ 영탑사(靈塔寺) 인법당에 모셔진 금동비로자나불삼존좌상(金銅毘盧遮那佛三尊坐像)(보물 제409호) 도금 전, 후

▼ 영탑사(靈塔寺) 적묵당...

▼ 영탑사(靈塔寺) 공양간

▼ 영탑사(靈塔寺) 요사체

 

영탑사 약사여래상(靈塔寺藥師如來像)(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11호)
 
영탑사 약사여래상은 자연석에 새겨진 마애불로 높이 1.8m의 상왕산(象王山) 영탑사 유리광전(琉璃光殿) 내에 모셔져 있다. <중략>
영탑사 약사여래상은 여래의 얼굴이 둥근 방형으로 몸통에 비해 상당히 큰 편이다. 두부에는 육계(肉髻)가 나지막이 솟아 있다. 반듯한 이마 아래로는 활 모양의 눈썹이 선명하며, 바타원의 두 눈은 반개(半開)하였다. 눈초리가 살짝 치켜 올라가 있고 양미간에 뻗은 코는 우뚝한 편이다. 우묵한 인중 아래로는 적당한 크기의 입술이 부드럽게 다물어져있다. 경계가 분명한 짧은 목에는 삼도(三道)가 새겨져 있다. 전체적으로 떡 벌어진 당당한 어깨에 좌폭이 상당히 넓어 균형 잡힌 안정감을 준다. 어깨와 무릎의 둥근 실루엣을 통해서는 부드러운 양감이 나타난다.
약사여래상은 3m 규모의 자연 암석 면에 새겨져 있는 마애불상이다. 약사여래불은 거구의 당당한 면모를 풍기고 있으며 광배(光背)를 대신하는 듯한 자연석의 웅대하고 기이한 모습에서 강인한 인상을 준다. 지금은 약사여래불을 보호하는 전각안에 모셔져 있다. 
고려 말에 이성계를 도운 무학 대사(無學大師)가 이 사찰을 둘러보고 기이한 바위가 빛을 발하고 있음을 심상치 않게 여겨 여기에 약사여래상을 새겨 국태민안(國泰民安)을 기원했다고 한다. 그 뒤로 영험이 잇따라 치병(治病)을 비는 민간 신앙이 성행했다고 한다. 
영탑사 약사여래상은 국난과 어려움이 많았던 우리 민족에게 가장 친근한 해결사 부처이시다. 아픈자에게 약을 주듯이 민초들의 어려움을 직접적으로 해결해 주는 그런 부처이다. 따라서 영탑사 약사여래불은 둔중하면서도 친근미가 느껴지는 고려 시대의 불상 양식의 특징을 잘 드러내는 작품이며, 예술성으로 보면 토속적이고 지방색이 강한 서민적인 부처상이라고 할 수 있다.<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 영탑사(靈塔寺) 유리광전...

▼ 영탑사(靈塔寺) 유리광전 문을 활짝 열어놓고 비닐로 막아놓았는데 보기 흉하다. 유리광전 안에 마애 약사여래상을 모시고 있다.

▼ 영탑사(靈塔寺) 약사여래상

 

영탑사 칠층석탑(靈塔寺七層石塔)(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16호)
 
충청남도 당진시 면천면 성하리의 영탑사는 유리광전 뒤에 있는 바위를 기단으로 오층 석탑을 세우고 절 이름을 ‘영탑사’라 했다고 전한다. 1930년에 고시중이 6~7층을 증축하여 지금의 모양이 되었다고 한다. 
영탑사 칠층석탑은 1798년(정조 22) 승려 지윤이 오층 석탑을 세웠는데, 1930년에 고시중이 6~7층을 증축하였다고 한다. 
영탑사 대웅전 앞에서 서쪽을 바라보면 산기슭에 유리광전이 있고, 유리광전 뒤 바위 위에 탑이 세워져 있다. 영탑사 칠층석탑은 각 층의 옥신석[석탑의 몸체를 이루는 돌]과 옥개석[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다른 탑들과 달리 기단이 따로 없고 바위를 기단으로 삼고 있다. 영탑사 칠층석탑 각 층의 옥신석 모서리에는 기둥 모양을 새겼다. 추녀마루는 약간 반곡[반대로 구부러짐]되어 있으며, 추녀는 직선으로 조성되었다. 낙수면은 추녀마루의 곡선을 따라 경사가 완만하다. 지붕 받침은 3단으로 새겨져 있는데, 5층까지는 같은 양식으로 조성되어 있으나 6~7층은 추녀의 반곡이 심하다.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 문화재 자료 제216호로 지정되었다. [의의와 평가] 영탑사 칠층석탑은 조선 시대 석탑이지만 다른 탑과는 형식이 다르며, 특히 후대에 추가로 쌓아 올린 6~7층의 모양이 특이해 조선 시대 지방에서 조성한 석탑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 영탑사(靈塔寺) 칠층석탑

▼ 영탑사(靈塔寺) 칠층석탑은 자연석 기단 위에 세워져 있다.

 

영탑사 범종(靈塔寺梵鍾)(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19호)
 
영탑사 범종은 1760년 2월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에 있던 가야사에서 만들어졌다. 흥선 대원군에 의해 사찰이 불탔을 때 가야사 승려들이 금동 삼존불 등과 함께 영탑사(靈塔寺)로 옮긴 조선 시대 동종(銅鐘)이다.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 문화재 자료 제219호로 지정되었다.
영탑사 범종은 조선 시대 동종의 전형적인 모습을 하고 있으며 용두(龍頭)까지의 높이가 60㎝이고 밑지름이 46㎝인 작은 종이다. 용추는 네 발을 힘차게 펼친 형태인데 굽혀진 몸통에 종을 매달아 놓았다. 견대[종의 어깨 부분 장식]는 톱니바퀴 모양의 원권 안에 범자문을 돌렸다. 유관은 기하학문의 곽을 돌린 후 그 안에 간략화된 연화문의 유두를 배치하였다. 한편, 유곽과 유관 사이에는 원형의 두광을 표현한 보살들을 배치하고 있으며 종신에는 주성기(鑄成記)를 주조하여 놓았다. 구연대(口緣帶)는 무늬 없이 단지 종신과 구분하는 하나의 선을 돌렸다. 
영탑사 범종은 조선 시대 동종의 전형적인 모습을 하고 있으며, 종의 상단부에는 음통(音筒) 대신 단지 조그만 구멍이 뚫려 있다. 종에는 "건륭 이십오년 경진 이월 가야사 법당 금종 백근금입중조성야(乾隆二十五年 庚辰二月伽倻寺法堂金鐘百斤金入重造成也)[1760년 2월 가야사 법당 금종을 백 근의 금을 녹여 만든다]"라는 기록이 있고 후원을 한 신도들의 이름도 있다. 
서울 봉원사(奉元寺)에도 연대와 ‘가야사’라는 명문(銘文)이 있는 비슷한 종이 대원군의 별저를 옮겨 지은 염불당에 있다는 기록이 있다. 가야사에서 같은해에 비슷한 형태의 크기의 종을 두 개씩 만들었다는 것이 흔하지 않은 일이고 이 두개의 종이 영탑사와 봉원사로 옮겨진 것은 깊은 인연이 얽혀 있는 듯 한다. 영탑사 범종은 비록 그 크기가 대형은 아니지만 18세기 후반 동종의 일반적인 양식이나 사장(私匠)에 대한 계보 및 활동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라는 점에서 학술적인 가치가 높다. 또 주종기를 통해 명확한 제작 연대와 후원 계층도 파악할 수 있다는 점도 의의가 있다.<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 영탑사(靈塔寺) 범종... 흥선대원군이 가야사를 불태울 때 이곳으로 옮겨온 종이다.

▼ 영탑사(靈塔寺) 산신각과 유리광전 방향....

▼ 영탑사(靈塔寺) 산신각

▼ 영탑사(靈塔寺) 입구 고목... 천년고찰을 웅변하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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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방인야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