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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성지(梁誠之) 살던 곳

 

양성지(梁誠之) 살던 곳 표석이 있어서 처음에는 의아해 했었다. 교과서에서도 크게 다루지 않은 인물이 표석으로 있어서 어떤 인물인가 궁금했었다. 역사와 지리에 해박하여 평생을 서적편찬과 간행에 노력한 인물이라고 한다. 세종(世宗)부터 성종(成宗)까지 모두 6명의 왕을 섬겼으니 대단한 인물이라고 생각된다. 나중에 정조가 그의 정신적 스승으로 양성지를 꼽았으며, 그가 세조에게 건의한 규장각을 정조가 차용하여 썼다고 홍제전서에서 밝혔다.

김포에 있는 그의 묘를 방문했을때 그 옆에 대포서원이 있었고, 양성지의 사당인 수안사가 있다. 그곳에는 그의 아들들 묘도 함께 있다. 김포 양성지 묘를 다녀온지 상당히 오래 되었는데 블로그를 확인해 보았는데 포스팅이 되지 않았다. 조만간 자료를 찾아 올리도록 하겠다.

시대를 앞서간 사람들은 그 당시에는 매우 혹독한 시련을 겪게 마련인데 양성지는 그렇지는 않은 것 같았다. 양성지가 주장한 내용을 살펴보면, 우리의 역사를 바로 알고 중국의 것만 좋다고 하는 세태를 비판했으며, 중국과 다른 우리 풍속을 보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문묘에 우리의 선현을 많이 배향해야 한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임금의 탄생일을 황제의 예에 따라 국경일로 해야 하다면서 우리의 주체성을 강조했다. 참으로 많이 앞서간 주장들인데 그 당시에는 명나라와의 관계로 인해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들이었다. 기념표석을 답사하면서 잘 몰랐던 선현들에 대해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된 것만으로도 기쁘게 생각한다. 

 


 

▣ 양성지(梁誠之) 살던 곳

 

양성지(梁誠之, 1415~1482)는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학자로, 본관은 남원(南原)이며, 자는 순부(純夫), 호는 눌재(訥齋), 시호는 문양(文襄)이다. 역사와 지리에 해박하여 평생을 서적편찬과 간행에 노력한 인물이다. 세종(世宗)부터 성종(成宗)까지 모두 6명의 왕을 섬겼으며, 홍문관 대제학(大提學)과 이조판서 등을 지냈다. 양성지의 본관은 남원(南原)으로 자는 순부(純夫), 호는 눌재(訥齋), 시호는 문양(文襄)이다. 양성지는 6세에 학문을 시작하여 9세에 능숙하게 글을 지었다고 한다. 사마시에 급제한 후 다시 1441년(세종 23)에 과거에 급제하여, 훈구파의 중진으로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 《고려사(高麗史)》 개찬(改撰)에 참여하였으며, 1453년(단종 1)에는 《조선도도(朝鮮都圖)》《팔도각도(八道各圖)》를 작성하고, 이듬해에 《황극치평도(皇極治平圖)》를 편찬하였다. 또 1455년(세조 1)에는《팔도지리지(八道地理志)》를 편찬하였으며, 1463년(세조 9)에는 《동국지도(東國地圖)》를 찬진하였다. 양성지는 서적의 보존과 간행에도 노력해 10조(條)의 상소를 하였으며, 《세조실록(世祖實錄)》《예종실록(睿宗實錄)》 등의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1471년(성종 2)에 성종의 즉위를 도운 공로로, 좌리공신에 녹훈되고, 1481년(성종 12)에는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편찬에 참여하였다. 양성지는 나라의 발전을 위한 다양한 의견을 제시한 인물이기도 하였다. 예컨대 국가재정을 충실하게 하기 위해 의창(義倉)을 설립하거나, 백정(白丁)에게 양민이 되는 길을 열어주자고도 하였다. 또, 혼례를 간단히 하고 연찬(宴饌) 역시 간략하고 검소하게 열 것을 주장하는 등 풍속에 대한 개혁적인 입장을 펼친 인물이었다. 뿐만 아니라 과거를 현실에 맞게 개정할 것을 여러 차례 제안하고, 아악(雅樂)의 보호와 체계적 정리를 주장하기도 하였다. 양성지는 세조가 제갈량이라고 부를 정도로 총애한 인물이었으며, 조선 후기 개혁군주인 정조(正祖)의 정신적 스승이기도 하였다. 양성지가 살았던 곳은 지금의 서울특별시 중구 충무로 42에 해당한다. 그곳에는 ‘양성지 살던 곳’이라는 표지석이 있다.<서울중구역사문화자원에서 인용>

 

 

▼ 양성지(梁誠之) 살던 곳 표석

▼ 양성지(梁誠之) 살던 곳 표석 주위

▼ 양성지(梁誠之) 살던 곳 표석

▼ 서울중구 을지로 충무로 일대 표석 위치

▼ 양성지(梁誠之) 살던 곳 표석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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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방인야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