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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관·조선광문회 터(新文館·朝鮮光文會址)

 

서울시 표석 중에 일전에 얘기했듯이 처음부터 지금까지 전혀 바뀌지 않은 표석들도 많이 있지만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빙빙 돌다 표석 내용도 바뀌고 위치도 바뀌고 해서 거의 포기하다시피 내팽개쳐둔 표석들도 가끔은 있는데 이곳 신문관·조선광문회 터(新文館·朝鮮光文會址) 표석도 그중 하나다.

처음에는 청계천 변 을지한빛거리 화단에 조선광문회터라는 넓은 표석으로 되어 있다가 얼마 뒤에 내용이 바뀌더니, 주위 시설들이 심하게 바뀌어 사진을 다시 찍어야 할듯해서 다시 찍고 와서 올릴려고 하니까 이번에는 신문관을 포함하여 위치를 skt타워 앞으로 옮겼다. 

너무 자주 바뀌는 바람에 새삼 의문이 든다. 이것을 지금 포스팅하면 또 언제 바뀔지 모를일이다는 의구심... 그렇지만 가나다 순으로 올리고 있다보니 건너 뛰기도 뭐해서 그냥 올린다. 이 표석을 찾으러 코로나가 한참인 때 따르릉 자전거를 타고 중구 일대를 하루 온종일 쏘다녔다. 표석은 비교적 쉽게 접근할 수 있어서 찾기는 쉽다. 표석도 역마살이 있는게 있는지 계속 돌아다니는 표석이 있다. 이제는 제자리 찾았으니 한 군데 잘 정착하길 바랄 뿐이다.

신문관은 육당 최남선이  '소년'을 발행한 곳이고 조선광문회를 통해 역사와 고서의 출판에도 힘을 기울여 폭넓은 출판활동을 통해 우리 문화의 발굴·전승·창달을 위해 노력했던 출판사였다. 조선광문회는 애국적인 견지에서 독립정신을 불러일으키고 새로운 지식을 전하고자 노력한 단체라고 알려져 있다.

 


 

신문관(新文館)

 

신문관의 활동 중 가장 두드러진 것은 〈소년〉을 비롯한 각종 계몽잡지와 교양서적의 발간, 조선광문회를 중심으로 한 각종 고서의 발행이다.
〈붉은 저고리〉(1913. 1)·〈새별〉(1913. 4)·〈아이들 보이〉(1913. 9) 등에 이어 1914년 10월에는 본격적인 종합잡지 〈청춘〉을 창간했다. 잡지 외에 교양서적의 발행은 〈소인국표류기〉 등의 문학서에서부터 〈신지식초백종 新知識初百種〉 등 상식에 관한 책, 그리고 〈대한지지 大韓地誌〉·〈태서 교육사 泰西敎育史〉 등의 학술서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신문관의 또다른 중요 활동은 한국 최초의 문고라고 할 수 있는 '십전총서'와 뒤이어 본격 문고판이라 할 수 있는 '육전소설'의 발행이다. 십전총서는 소설류·교훈류 등 종류별로 나뉘고, 육전소설은 〈심청전〉·〈홍길동전〉·〈흥부전〉 등 한국고전 중심이었다.
이외에도 조선광문회에서 편찬한 〈해동역사 海東歷史〉·〈연려실기술 燃藜室記述〉·〈동국세시기 東國歲時記〉 등의 역사와 고서의 출판에도 힘을 기울였다. 이처럼 신문관은 일제의 무단통치기간에도 폭넓은 출판활동을 통해 잊혀져가는 우리 문화의 발굴·전승·창달을 위해 노력했던 문화운동의 선구자였다.<다음백과에서 인용>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는 일제에 의한 국권피탈 직후 정치적으로 다난했던 시기에 한국고전의 간행과 보급, 민족문화 및 민족사상의 기원에 관한 연구 등을 수행하기 위해 최남선(崔南善)이 중심이 되어 1910년에 설립한 연구단체이다. 조선광문회는 애국적인 견지에서 독립정신을 불러일으키고 새로운 지식을 전하고자 노력한 단체 가운데 하나였다.
이에 따라 조선광문회의 활동도 민족적인 기개(氣槪)와 자존심을 앙양하기 위한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조선광문회는 한국의 고전을 발굴하고 그 가치를 재인식시키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한국고전의 간행과 보급에 힘썼다. 또 일제의 진서(珍書) 유출과 국보급 문화재 반출에 위기의식을 갖고, 귀중 문서의 수집과 편찬에 노력하는 한편,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해 각별한 노력을 기울였다.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이 주도적으로 창설하고, 박은식(朴殷植)과 현채(玄采) 등이 관계한 조선광문회는 《동국통감(東國通鑑)》《해동역사(海東繹史)》《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경세유표(經世遺表)》《상서보전(尙書補傳)》 등 17종의 《조선총서(朝鮮叢書)》를 간행하였다. 최남선은 조선광문회를 통해 《삼국사기》《동국통감》 등의 우리 고전 간행과 《붉은 저고리》《아이들보이》《청춘(靑春)》 등의 잡지를 발행하기도 하였다. 또, 1919년에는 ‘3·1독립선언서(三一獨立宣言書)’를 기초하기도 하였다.
파란 2층 목조의 조선광문회 건물은 1969년 도로확장으로 철거되었다. 서울특별시 중구 삼각동 청계천 한빛광장 내에 조선광문회 터 표지석이 있다.<서울 중구 문화관광에서 인용>

 

▼ 신문관·조선광문회 터(新文館·朝鮮光文會址) 표석... 몇 번을 돌다가 이제 대로변에 안착을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표석의 형태가 요즘 새로 세우는 프라스틱이 아니라서 너무 반갑다.

▼ 신문관·조선광문회 터(新文館·朝鮮光文會址) 표석... 하나금융그룹 건물이 보인다. 예전의 외환은행 본점 건물이다.

▼ 신문관·조선광문회 터(新文館·朝鮮光文會址) 표석... 서쪽으로는 교원그룹 빌딩이 보인다.

▼ 신문관·조선광문회 터(新文館·朝鮮光文會址) 표석...남동쪽 방향

▼ 신문관·조선광문회 터(新文館·朝鮮光文會址) 표석... SKT타워 앞에 있는데... 표석이 차량에 가려서 안보인다.

▼ 구 조선광문회 터(新文館·朝鮮光文會址) 표석

▼ 처음 조선광문회 터(新文館·朝鮮光文會址) 표석은 을지 한빛거리 화단에 있었다.

▼ 중구 표석 위치

▼ 신문관·조선광문회 터(新文館·朝鮮光文會址) 표석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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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방인야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