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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위병영 터(侍衛兵營址)

 

시위병영 터(侍衛兵營址)도 순청터와 함께 자주 변화하지 않는 곳 중의 한 곳이다. 변화하지 않는 곳은 한 번 답사를 해 놓고 그때 그 사진을 그대로 활용하다보니 조금은 오래된 느낌이 난다. 사진이라도 바꿔야 최신 냄새가 나는데 내가 그 생각을 못한 것 같다. 표석 때문에 여러번 같은 곳을 답사를 하는데  변동이 없는 표석은 그냥 지나치고 새로 바뀐 것 위주로 답사를 하다보니 사진이 오래된 사진들이다.

시위병영은 고종 때  왕을 호위하기 위해 만들어진 군사조직인데 너무나 늦게 만들고 그마저도 일본에 의해 강제해산을 당해 의병봉기의 계기가 되었다. 시위병영터 표석은 서소문로의 번화가에 위치하면서도 이 일대는 항상 쓸쓸한 기운이 도는 곳이다. 차를 타고 다니면서 시위병영터 표석을 볼 때 마다 왜이리 쓸쓸한 곳에서 홀로 있을까 생각해보곤 한다. 인근에 소의문터가 지척인데 서로 볼 수 없다. 소의문터 표석이 살짝 골목 안으로 숨어버렸기 때문...ㅎ 그냥 서로 나란히 볼 수 있게 길 옆으로 내놓으시지...ㅎ

이 일대는 번화가인데 길 옆으로는 상가들이 없어서 사람들도 거의 왕래를 안하고 또 지나다니는 길도 아니다 보니 항상 혼자 쓸쓸한 표석으로 여겨져서 한번 해본 소리다.

 

 


 

시위병영 터(侍衛兵營址)


시위병영(侍衛兵營) 터는 조선 말기 군부대신의 감독 아래 국왕과 궁내를 호위하던 시위대(侍衛隊)가 주둔하던 곳으로, 지금의 서울특별시 중구 서소문로 100 일대에 해당한다. 시위대는 1895년(고종 32) 5월 25일 칙령 제120호의 반포에 따라 편성된 군대이다. 1907년 일제에 의해 강제로 해산되어 전국적인 의병봉기의 계기가 되었다.
시위병영(侍衛兵營) 터는 시위대(侍衛隊)가 주둔하던 곳이다. 시위대는 1895년(고종 32) 5월에 조직된 군대로, 왕과 궁궐의 호위를 담당하던 부대이다. 그러나 창설된 지 불과 3개월 만에 을미사변(乙未事變)에 동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해산되어 훈련대에 편입되었다. 아관파천(俄館播遷) 이후 경운궁(慶運宮)으로 환궁한 고종(高宗)이 러시아의 영향을 받아 중앙군을 러시아식으로 개편하면서, 1897년(고종 34) 9월 30일 시위대를 다시 조직했다.
시위대의 당시 조직은 1개 대대 5개 중대였으나, 그해 10월에 1개 대대를 추가로 편성했다. 이어 1898년(고종 35) 10월 2개 대대를 합쳐 연대로 개편했으며, 2개 연대에 포병대대를 편제하고 군악대까지 두었다. 1900년에는 시위독립기병대대를 창설해, 2개 연대와 독립기병대대로 조직하는 등 편제를 강화해 나갔다. 그러나 1905년 4월 일제에 의해 축소됐고, 1907년 8월 강제로 해산됐다.
시위대 해산식은 1907년 8월 훈련원(訓練院)에서 있었다. 당시 제1대대장 박승환(朴昇煥)은 해산식 강행에 분개하여 “군인이 능히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신하가 능히 충성을 다하지 못하면 만 번 죽어도 아깝지 않다”라는 유서를 남기고 대한제국 만세를 외친 후 대대장실에서 권총으로 자결했다. 이 소식을 들은 장병들이 무기고를 부수고 무장한 후 봉기했고 제2연대도 이에 호응했으나, 불과 2시간 만에 패배하고 말았다.
시위병영 터는 박승환이 대대장으로 있던 제1연대 제1대대가 주둔하고 있던 곳이다. 시위대는 일제에 저항해서 싸운 유일한 중앙군이었으며, 시위대의 무장봉기는 이후 의병전쟁으로 발전해 항일운동의 한 축이 되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2002년에 설치된 시위병영 터 표지석이 서울특별시 중구 서소문동 국민은행 앞에 있다.<서울 중구 문화관광에서 인용>

 

 

▼시위병영 터(侍衛兵營址) 표석... 좀 쓸쓸하게 보인다.

▼시위병영 터(侍衛兵營址) 표석... 이 일대는 상가가 없어서인지 사람의 왕래가 없다.

▼시위병영 터(侍衛兵營址) 표석은 중앙일보 건물 앞에 있다.

▼ 중구 순화동 일대 표석 위치

▼시위병영 터(侍衛兵營址) 표석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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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방인야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