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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탁호텔 터
이화여자고등학교 정동 정문은 4계절 다 아름답지만 특히 가을날 노랗게 은행나무가 물들고 하나 둘 떨어질 때 쯤이면 정동길 운치가 최고조에 이른다. 특히 이화여고 예전 정문으로 생각되는 전통한식 기와정문은 나를 이곳으로 유도하곤 한다. 그래서 나는 이곳을 가을 답사 1번지로 정해 놓고 학우님들과 10월말이면 꼭 들르는 곳이다.
그런데 올해는 한 해 건너 뛰었다. 코로나로 인해 갈 엄두가 안났고 오히려 그 덕에 다른 곳을 답사했다. 역설적으로 코로나로 인해 시간이 많다보니 원행해서 선현묘지, 문화재 등 가보고 싶었던 곳을 자주 다녔다. 혼자 다닌 경우가 많고 후배랑 둘이서 다닌 적도 꽤 된다.
기념표석 시리즈를 올리려고 사진을 봤더니 이곳 손탁호텔 터 사진이 너무 오래되어 최근에 답사를 하면서 다시 찾았더니 코로나로 인해 학교 출입이 안된다고 전혀 못들어가게 한다. 멀리서 사진이라도 찍겠다고 했는데도 문전박대 한다. 이런 경우가 가끔은 있어서 그냥 지나쳐 왔지만 그러다보니 예전에 찍었던 사진을 올릴 수 밖에 없었음을 양해 바란다.
그나마 표석 내용이 바뀌지 않아 천만 다행으로 사진을 사용할 수 있었는데 관공서나 학교, 사설기관 안쪽에 있는 표석들은 관람에 편의를 제공해야 한다고 본다. 안될 경우에는 일전에도 말했듯이 길가 사람의 왕래가 많은 곳으로 내와서 표석에 명기하면 될 것이다. '이곳에서 몇m 서쪽에 위치한다.' 이런 식으로 작성하면 될 것이다.
지금 서울시 기념표석 중 여러 개가 학교, 관공서 안쪽에 있는데 특히 중앙고등학교에 있는 표석은 평소에도 주말만 출입이 허용되고, 지금은 코로나로 인해 아예 들어가지도 못한다. 군부대에도 한군데 있는데 이곳은 아예 일반인들의 답사가 제한된다. 이런 곳에 있는 표석은 정문쪽으로 모두 내놓고 현장에는 작은 푯말만 세우는 방안은 어떨까? 답사객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이해한다면 이런 편의를 고려해야 할 것이다. 현장에 도착해서 못들어가게 한다면 정말 황당해진다.
손탁호텔
손탁빈관(Sontag賓館)’이라고도 한다. 손탁(Sontag, A. 孫澤, 1854∼1925)은 1885년 10월 초대 주한 러시아공사 웨베르(Waeber, K. 韋貝)를 따라 내한하여 25년간(1885∼1909) 한국에서 생활하였다.
손탁은 프랑스의 알자스 로렌 출신이지만, 보불전쟁(普佛戰爭: 프랑스와 프로이센 사이의 전쟁. 1860∼1871년) 결과 이곳이 독일령이 되어 독일국적으로 내한, 러시아공사관의 보호를 받으며 활약하였다.
개항 초기 한국은 대외교섭상 외국어에 능통한 인물이 절실하게 필요하였다. 손탁은 영·독·프·러 등 각국어에 능통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어도 재빨리 습득하였다. 이에 손탁은 웨베르 공사의 추천으로 궁내부(宮內府)에서 외국인 접대업무를 담당하면서 대군주(고종) 및 명성황후와 친밀하게 되었다.
주차(駐箚: 외교 대표로서 외국에 주재하는 것)조선총리 원세개(袁世凱)의 대한속방책(對韓屬邦策) 강화를 위한 내정간섭이 심화되자, 손탁은 조선의 독립을 위하여 제3세력을 끌어들이는 인아책(引俄策)을 강구했다.
손탁은 궁내부와 러시아공사관의 연결책을 담당, ‘한러밀약’을 추진하는 등 친러거청(親露拒淸)정책을 수립, 반청(反淸)운동을 통해 조선독립운동을 전개했다.
그녀의 독립운동 공로가 인정되어 조선정부는 1895년 서울 정동 29번지 소재 1,184평 대지의 한옥 한 채(현 이화여자고등학교)를 하사하였다. 1895년 10월 8일,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한국 최초의 배일정치단체인 정동구락부(貞洞俱樂部)가 친미파 이완용(李完用)에 의해 발족되었다.
명성황후시해에 대한 복수토역(復讐討逆: 복수를 위해 역적을 토벌함.), 친일내각 타도, 경복궁에 갇혀있던 고종 구출 등을 정치적 투쟁목표로 표방하고 정동소재 손탁 사저에 모여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손탁 사저는 친러반일운동의 책원지(策源地: 책략이 세워지는 곳)가 되었다. 이처럼 손탁은 국왕구출작전의 막후 인물로 활약하였다.
알렌(Allen, H. N., 安連)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아 제1차 국왕구출거사(春生門事件, 1895. 11. 28.)를 일으켰지만, 한 배신자의 밀고로 실패하였다. 웨베르 공사의 군사적 지원을 받아 거사한 제2차 국왕구출사건(俄館播遷, 1896. 2. 11.)은 성공, 고종을 러시아공사관에 이어(移御: 임금의 거처를 옮김)함으로써 정동구락부의 정치적 투쟁목표가 달성되었다.
이처럼 손탁은 국왕구출작전을 성사시키면서 시종 정동구락부와 왕실과의 연락업무를 담당했을 뿐만 아니라 정동 손탁 사저를 정동구락부의 항일운동의 본거지로 제공함에 따라 고종황제는 한국독립을 위한 손탁의 노고를 치하하는 뜻으로 1898년 3월 16일 구 한옥을 헐고 양관(방 다섯 개)을 지어서 하사하였다.
이 때 손탁은 실내장식을 서구풍으로 꾸며서 손탁빈관을 경영하였는데, 서구식 호텔영업의 초창기에 해당되었다. 그러나 객실 5개의 양관은 호텔영업으로는 너무 협소하였다. 그리고 한국정부는 대외관계가 점차 다변화되고 외국 귀빈들의 방한이 빈번해짐에 따라 이들을 접대하고 숙박시킬 영빈관이 절대 필요하였다.
더욱이 그 당시 서울에는 외국인 전용 호텔이 몇 개 없었다. 이에 정부는 1902년 10월, 구 양관을 헐고 2층 양관을 신축, 손탁으로 하여금 영빈관을 경영하게 하였다. 이것이 바로 ‘손탁호텔’이었다.
거액의 내탕금(內帑金: 임금의 개인적인 돈)으로 신축했기에 사실상 한국정부 직영 ‘영빈관호텔’이다. 호텔 2층은 국빈용 객실로 이용하였고, 아래층은 일반 외국인 객실 또는 주방, 식당, 커피숍으로 이용했다. 손탁호텔은 서양요리와 호텔식 커피숍을 선뵈었다.
1909년 손탁이 귀국한 뒤, 1917년이화학당은 미국 감리교회에서 모금한 성금으로(23,060달러) 손탁호텔을 구입, 기숙사로 사용하다가 1922년손탁호텔 건물을 철거하고 프라이홀을 건축하였지만, 1975년 소실되어 현재 공터로 남아 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인용>
▼ 손탁호텔 터 표석
▼ 손탁호텔 터 표석
▼ 손탁호텔 터 표석... 이화여고 정동정문 뒤쪽에 위치한다.
▼ 손탁호텔 터 표석... 학교 교정 안쪽에 있어서 들어가려면 경비원의 제지를 받는다.
▼ 손탁호텔 터 표석... 옆쪽에 심슨기념관이 있다.
▼ 중구 정동 일대의 기념 표석 위치
▼ 손탁호텔 터 표석 표석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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