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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학당 터(西部學堂址)

 

서부학당 터(西部學堂址)는 처음에는 광화문 사조식품 건물 앞쪽에 있었다. 안쪽에 있다보니 표석 답사할 때도 힘들었는데 일부러 표석 사진을 찍으러 갔었던 기억이 난다. 

서울시 역사문화유적 표석을 세번 답사했다고 일전에 말했는데 편의상 처음 답사를 1차 답사로 하겠다. 그 때 한바퀴를 완전하게 돌고 답사기를 쓰기 시작했는데 약 320여개의 표석을 매일 하나씩 올려도 1년이 걸리는데 1주일에 하나씩 쓰다보니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보았다. 그러다보니 그 사이에 표석의 대대적인 정비작업이 시작되고 내가 다녀온 표석들이 내용도 바뀌고 위치도 바뀌어서 또 다시 다녀올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도 그냥 눈 짐작으로만 다니다 보니 누락된 것도 많았고 서울시에서 계속 표석을 정비하는 바람에 어제의 자료가 오늘에는 틀린 자료가 되기 십상이었다.

서울시에 부탁해서 이번에는 자료를 받아서 변동 된 곳, 신설된 곳 등을 찾아서 다시한번 답사를 진행했다. 2020년 봄부터 여름까지 진행했다. 지금 이 답사기를 쓰고 있는 겨울에 다시 살펴보니 또 신설 된 곳, 변동된 곳이 여러 곳이 눈에 띈다. 서울시에서도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정비를 한다고 저에게 알려 왔으므로 특별히 거기에 대해서는 뭐라 하지 않겠다. 그런데 처음에 할 때 제대로 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전문가를 잘 선정해서 오류가 없도록 했어야 하는데 우선 설치하고 나서 수정하려는 생각은 과거 우리나라 근대화의 단면을 보는듯 해서 씁쓸하다.

 

서부학당 터는 광화문 동화면세점 앞에 있는 한국금융사박물관 앞 벽에 같혀 있다. 아주 옹삭하게 벽이 굴곡진 안쪽에다 그냥 집어 넣었다는 표현이 좋을듯하다. 예의 그 플라스틱 표석으로 만들다보니 눈에 잘 띄지도 않는다. 이곳에 있다고 하고 찾아갔으니 알지 그냥 지나갔으면 그곳에 버려진 어떤 물건인줄 알았을 것이다.

이곳은 근자에 비각(고종즉위40년칭경기념비각) 앞에 있던 도로원표를 이곳으로 옮겨온 곳이다. 그래서 도로원표 때문에 몇 번 왔었는데 이 표석을 발견하지 못했었다. 앞으로 설치되는 표석은 좀 다른 재질로, 모양도 좌대식의 옛날 돌로 된 표석으로 했으면 하고 바래본다. 그냥 정보전달, 지식전달, 사실 기록이란 측면만 생각한다면 북촌에 설치한 송진우선생 집터처럼 벽에 붙이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를 일이다. 나중에 틀리면 뜯어버리고 다시 쓰면 될 것이니....

또한 위치도 정확한 위치만 고집할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많이 볼 수 있는 곳에 설치하고 부연설명으로 '이곳에서 북쪽으로 00m 위치에 있었다' 식으로 하면 좋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또 다른 방식으로는 원래 옛터에는 간단하게 부착식으로 붙여놓고 사람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곳에 표석을 세우는 것도 추진해볼 일이다.(김창숙선생 집터, 전영택 집터 등)

서부학당 터 표석은 도로원표 쪽으로 내와서 설치했으면 하고 바래본다.

 

 



 

사부학당(四部學堂)

사학(四學)은 조선시대의 교육 기관으로 중등 정도의 교육기관이다.
사학은 서울의 중앙(中學)·동쪽(東學)·서쪽(西學)·남쪽(南學)에 설치한 성균관의 부속학교로, 고려의 오부학당·동서학당에 해당한다. 성균관에 비하여 규모가 작고 교육정도가 낮은 점, 문묘를 두지 않은 점을 제외하고는 교육방침·교육내용 및 방법 등에서 성균관과 비슷하였다. 중학교, 고등학교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직원은 교수(從六品) 2명, 훈도(正九品) 2명을 두어 교도케 했다. 교수는 경학(經學)에 밝고 덕망이 높은 자로 전임케 하였으며, 양반직에 있는 관리 중에서 교수를 겸하게 하기도 하였는데, 정원은 100명이다. 양반·서민의 자제 중에서 우수한 자를 뽑아 진사나 생원과에 응시할 준비교육을 시켰고, 반 편성은 5반으로 나누어 각 반에 20명씩 배치한 뒤 10일간 거학(居學)하는 방법을 취하였다.

사학의 교육내용·학과목·교수법 및 훈육 등은 성균관과 비슷하였으며, 다만 평가에 있어서 매일 학생들이 읽은 글을 강(講) 받아 그 성적을 정하였다. 또 각 학교에서 우수한 유생 20명을 뽑아 남학(南學)에 모아놓고, 예조에서 강론과 제술(製述)로써 시험한다. 이 결과로 10명을 뽑아 생진 복시(生進覆試)의 응시자격을 주었다.

그러나 사학은 제도적으로는 체제를 갖추었으나 학생의 정원 미달, 재정의 빈곤, 운영의 불합리, 직원의 부족 등으로 인해 크게 발전을 못보다가, 고종 31년(1894년)의 갑오개혁(甲午更張)을 계기로 폐지되고 말았다.<위키백과에서 인용>

 

 


▲ 서부학당 터 표석

 

▲ 서부학당 터 표석

 

▲ 서부학당 터 표석... 금융사박물관 벽에 붙어있다.

 

▲ 서부학당 터 표석... 금융사박물관, 신한은행 벽에 붙어있다.

 

▲ 서부학당 터 표석... 벽 기둥사이에 드어간 곳에 있어서 눈여겨 보지 않으면 안보인다.

 

▲ 서부학당 터 표석... 전혀 안보인다. 왼쪽 도로원표 표석 부근으로 이동했으면 한다.

 

▲ 서부학당 터 표석... 도로원표와 비교해 보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

 

▲ 서부학당 터 표석 앞에 있는 도로원표 표석

 

▲ 서부학당 터 표석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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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방인야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