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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의정 상진 집터(尙震家址)

 

영의정 상진(尙震)은 황희 등과 더불어 조선4대 명재상이라고 불리는 분이다. 그만큼 재상으로서 실적도 많았고 인품도 훌륭했다는 얘기다. 목천 상씨 문중에서 갑자기 한 분이 나오셔서 영의정까지 지내시고 그것도 인품이 아주 훌륭해서 조야에 칭송이 자자한 분을 배출했다. 이 글을 읽는 분들 중에는 오히려 영의정 상진(尙震) 보다 상문(尙文)고등학교를 더 많이 알고 있으리라 생각된다. 한동안 사학 명문이었던 학교가 내부 문제로 시끌했던 학교였다. 그런데 그 조상이 바로 영의정 상진(尙震)이라는 것을 알고 나도 깜짝 놀랬었다. 현재 강남 서초동에 있는 상문고등학교 정문 바로 옆에는 영의정 상진(尙震)선생의 신도비와 묘가 있다. 매일 그 분의 묘소를 지나면서 학생들은 호연지기를 키울 일이고, 학교 관계자들은 청렴결백을 배울 일이다.

상진(尙震) 집터는 남대문 시장 부근으로 과거 새로나백화점 앞에 표석이 있다. 그곳이 원래 상동교회가 있던 곳이라 하는데 지금 그 건물에는 상동교회라고 간판이 붙어 있다. 아마도 교회에서 그 건물을 사들인 모양이다.

이 표석을 처음 봤을 때 사실 상진(尙震)선생에 대해 잘 몰랐었는데 이것 저것 찾다보니 청백리, 훌륭한 인품을 지닌 명재상이란 것을 알았다. 그 후로 남대문시장을 갈 때는 꼭 이 길로 접어들어서 표석을 확인하곤 했는데 어느 날 표석 내용이 바뀐 걸 알고 다시 올리려고 맘 먹었는데 여의치 않아 이제서야 올리게 되었다. 이 일대는 교통이 복잡해서 사진이 잘 나온게 드물다. 그러다 보니 세로로 찍은 사진이 대부분이다.

 

성안공 상진 묘 바로가기

 



 

영의정 상진(尙震)

본관은 목천(木川). 자는 기부(起夫), 호는 송현(松峴)·향일당(嚮日堂)·범허재(泛虛齋). 증 이조판서 상영부(尙英孚)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우후(虞侯) 상효충(尙孝忠)이고, 아버지는 찰방(察訪) 상보(尙甫)이다. 어머니는 연안김씨(延安金氏)로 박사(博士) 김휘(金徽)의 딸이다.

상진의 아버지 상보(尙甫)는 늦은 나이에 상진을 낳아, 그가 다섯 살 때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여덟살 때는 아버지마져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어린 상진은 매부인 하산군(夏山君) 성몽정(成夢井)의 집에서 자랐다. 15세가 되어도 공부에 뜻을 두지 않고 놀기만하던 상진은 동년배들 따돌림에 자극 받아 공부에 매진, 1519년(중종 14)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검열이 되었다. 그뒤 봉교·예조좌랑·지평을 거쳐 장령·교리 등을 지내면서 지방관리의 탐학을 비판하고 농업진흥책을 주장했다.

1533년 대사간에 임명되었으며, 부제학·좌부승지·형조참판·관찰사·한성부판윤 등을 거쳐 1543년 공조판서가 되었다. 이듬해 성절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서 병조판서·우찬성·형조판서를 지냈다. 
인품이 후덕하고 부지런하여 중종때 청환(淸宦)을 두루 거친 그는, 40세에 대사간에 오르는 등, 벼슬길이 매우 순탄, 쉽게 병조판서가 됐는데, 중종이 승하하고 인종이 등극하자 득세한 윤임(尹任) 세력이, 윤원형 형제가 상진을 키웠다는 오해를 품고, 경상도관찰사로 좌천 시켜 버렸다.
1545년 인종이 죽고 명종이 즉위하여 소윤 일파가 득세하면서 그들의 천거로 병조판서에 복직했으며, 1549년 우의정이 되었다. 1551년 좌의정에 올랐고, 1558년 영의정이 되어 그 뒤 5년 동안 국정을 총괄하였다.
재임하는 동안 황해도 평산(平山) 일대에서 임꺽정(林巨正)의 난이 일어나자, 이를 평정시켰다. 좌의정 이준경(李浚慶)과 더불어 사림을 등용하는 데 힘썼다. 뒤에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로 전임되어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고 궤장(几杖)이 하사되었다.
청렴하고 관후 인자한 명상(名相)으로서 조야(朝野)의 신망이 두터웠다. 시호는 성안(成安)이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다음백과, 인터넷기사 등에서 발췌>



상진 집터(尙震家址)

상진은 문과 급제하여 조선13대 임금 명종4년(57세) 이조판서 명종13년(66세) 영의정이 된다. 상정승이 한양에서 살던 솔고개는 상정승 골이라 불리우는데 지금은 서울의 상동(尙洞 )이 여기에서 유래한다. 영의정에서 물러난 뒤 상진은 남대문 바로 옆 솔 고개에 저택을 짓고 살았다.
상정승댁은 1886년 말 의사이자 목사인 스크랜트 선교사가 매입하여 성동병원교회를 설립하는 장소가 된다. 스크랜튼은 미국 출신으로 1886년에 고종 황제로부터 시병원(施病院)이란 휘호를 얻어 상정승 골에서 의료사업을 시작한다.
상동교회는 1897년 9월 전덕기와 40여명의 청년들이 상동청년회를 만들어 독립운동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조약무효 상소운동을 벌였다. 대표인물이 전덕기 목사, 백범 김구, 최재학, 이준, 이동녕 등으로 상동교회는 민족의 선각자들을 양성하는 산실이 되어 임시정부를 이끈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요람이 된 것이다.
<e충남시사신문, 휴먼에이드포스트 등에서 발췌>

 


 

▲ 상진 집터(尙震家址) 표석

 

▲ 상진 집터(尙震家址) 표석

 

 

▲ 상진 집터(尙震家址) 표석... 길 건너 숭례문 방향

 

▲ 상진 집터(尙震家址) 표석...길 건너 북창동 방향

 

 

▲ 상진 집터(尙震家址) 표석... 남대문로지하쇼핑센터 8번 출구 앞에 위치한다.

 

▲ 상진 집터(尙震家址) 표석...뒤에 건물이 상동교회 건물이다.

 

▲ 상진 집터(尙震家址) 표석... 한국은행 방면... 현재 한국은행은 공사중이다.

 

▲ 상진 집터(尙震家址) 표석... 서울중앙우체국 방면

 

▲ 상진 집터(尙震家址) 표석... 숭례문 방면

 

▲ 상진 집터(尙震家址) 표석과 중구 남대문로 부근 표석 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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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방인야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