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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구여관 터(普救女館址)

 

서울시 표석을 처음 답사하기 시작할 때는 길 가다가 보이는 표석을 무작정 사진 찍고 하나씩 공부하면서 옛 터에 대한 상식을 키웠는데 언제가부터 제대로 답사해야 겠다는 생각으로 서울시 역사문화유적 표석 리스트를 구해서 전수답사를 시작했다. 맘 먹고 한바퀴 도는데 처음에는 3년 정도 걸린 것 같다.

 

그러다가 두번째부터는 변동 된 것, 위치가 바뀐 것 위주로 돌았는데 이때도 리스트가 없어서 무작정 헤매다 시간이 많이 소요 되었다. 2015년경 서울시에서 대대적으로 표석 정비작업을 했는데 이때 상당수의 표석들이 없어지거나 위치가 바뀌거나, 새로 신설 되는 등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 전에 답사 다녀온 자료로 서울시 표석을 블로그에 올리고 있었는데 새로 바뀌는 바람에 블로그 포스팅도 중단했었다. 그러다 새로 바뀐 서울시 기념 표석 리스트를 서울시로부터 받아 빠진 부분을 보완하고 바뀐 부분을 수정해서 새롭게 티스토리 블로그를 새로 만들어 이곳에 올리기 시작했다.

 

이곳 보구여관 터(普救女館址)는 근자에 세워진 표석이다. 그러다보니 표석이 플라스틱으로 참 볼품 없이 세워져 있다. 저는 개인적으로 예전 돌로 된 표석을 선호한다. 뭔가 품위도 느껴지고 크기도 적당해서 지나가다가 다시 한번 되돌아서서 내용을 한 번 더 읽어보게 된다. 지금의 표석 디자인은 빨리 바꿔야 한다고 본다.

 

이곳은 한국 최초의 여성병원이다. 근대의 우리나라 사람들이 남녀에 대한 엄격한 룰 때문에 여성들이 병원을 제대로 못가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해서 선교사들이 만든 여성병원이다. 세계의 큰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고 우물 안에 같힌 위정자들이 지배하던 시절이다. 일반 백성들의 가장 기본적인 의식주, 병원 등도 외세나 남의 손에 의해 맡겨진 현장이라고 볼 수 있다. 다행이 선교사들이 나서서 이런 병원을 개설하고 그들의 희생으로 정착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졌다고 보니 새삼 희생 봉사의 삶을 살아온 사람들에게 존경을 표한다.

 


 


보구여관 터(普救女館)

 

1887년 서울에 설립되었던 한국 최초의 여성 전문 병원. 보구여관(保救女館)이라고 표현하는 곳도 많으나 서울시 표석은 보구여관(普救女館)으로 표기되어 있다. 아마도 초창기 한자는 보구여관(普救女館)이 맞는 듯 하다.

당시 한국 감리교의 의료선교에 대한 관리자였던 스크랜튼(Scranton, W. B.) 목사가, 한국에는 여성이 남자병원에 갈 수 없는 풍속이 있는 까닭으로, 한국 여성들만을 위한 병원설립기금의 청원을 미국 감리교 여성해외선교부에 제출하였다.

이것이 승인되어 같은 해 10월에 미국 감리교 여의사인 하워드(Howard, M.)가 내한, 서울 정동(貞洞)에 있는 이화학당 구내에서 여성환자를 치료하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보구여관으로 우리 나라 최초의 부인병원이었다. 한옥을 개조하여 병원으로 꾸몄기 때문에 입원실은 온돌방이었다.

이 때 서울에는 알렌(Allen, N.)이 경영하는 왕립병원이 있었고 또 스크랜튼 목사가 시작한 감리교 정동병원이 있었으나 여자들은 대부분 이 보구여관에 와서 치료를 받았다. 처음 10개월 동안 하워드 여의사는 1,137명을 치료하였고, 다음해에는 1,423명의 환자를 돌보았다. 이런 일들이 그녀에게 과로를 가져와서 건강을 해쳐 2년 만에 귀국하게 되었다.

명성황후는 이런 의료사업을 치하하고 격려하는 뜻으로 이 병원에 ‘보구여관’이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하워드의 후임이 오기까지 이 보구여관은 스크랜튼 의사가 약 1년 동안 돌보았다.

1890년 10월에 하워드의 후임으로 셔우드(Sherwood, R.)가 내한하여 처음 10개월 동안에 무려 2,350명의 여자 환자를 치료하였고 그 밖에 82명에 대한 왕진을 실시하였으며 35명을 입원 치료하게 하는 등 정열적인 활동을 하였다.

그녀는 보구여관에 온 지 2년 만에 ‘여성을 위한 의료사업은 여성의 손으로’라는 구호 밑에 최초의 여성의학교육을 실시하였다. 먼저 이화학당 학생 4명과 일본 여인 1명으로 의학훈련반(Medical Training Class)을 조직하고 이들에게 기초적인 의학훈련을 시켰다.

이런 훈련의 열매로서 이 중의 한 사람인 김 에스더(흔히 박 에스더라고도 부름)는 1896년 10월에 미국 유학의 길에 올라 볼티모어 여자의과대학(The Woman’s Medical College of Baltimore)에 입학하여 정식으로 의학수업을 받고 1900년에 이 학교에서 의학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하여 우리 나라 최초의 여의사가 되었다.

그녀는 귀국 후 정동에 있는 보구여관과 평양의 감리교 의료기관에서 일하면서 한국 여성을 위한 의료사업과 여성의 지위향상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한편, 보구여관은 1892년에 동대문 쪽에 동대문분원을 설치하여 그 이름을 ‘볼드윈 시약소(Baldwin Dispensary)’라고 불렀다. 이 이름은 미국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에 사는 볼드윈 여사(Baldwin, L. B.)를 기념하기 위한 것으로, 그녀가 최초로 한국여성운동과 한국여성의료사업을 위하여 희사한 돈으로 지금의 동대문교회 근처의 토지와 가옥을 구입하여 이곳에 약국을 개설하고 동대문교회를 시작하였다. 이것이 오늘날의 이화여자대학교의과대학부속병원의 기초가 된 것이다.

감리교 의료선교의 동대문 진출은 당시 미국공사관을 비롯한 외국공관들이 있어서 외국인지대로 알려졌던 정동이 한국인들의 출입에 불편하므로 정동에 있으면 한국인들에게 접근하기 어렵다는 판단을 스크랜튼이 내린 때문이었다. 또 한편, 1902년에 내한하여 보구여관에서 간호원으로 근무하던 에드먼드(Edmunds, M. J.)는 정동에 위치한 보구여관에 1903년 간호원양성소(The Nurses’ Training School)를 설립하여 한국인 간호원 양성에 힘썼다.

이 양성소는 뒤에 동대문병원으로 이전하였고, 1906년에 설립된 세브란스병원 간호원양성소와 통합하였다. 그때까지 보구여관 안에 있는 간호원양성소에서 60명의 간호원을 배출하여 우리 나라 근대 초기의 의료인 양성에 크게 공헌하였다.

그러는 동안 정동에 있는 이화학당이 커지고 보구여관도 현대식으로 개조하여야 했으므로 1909년에 지금의 동대문 이화여자대학교의과대학부속병원 자리에 현대식 최대 규모의 부인병원 건물을 착공하여 1912년에 준공, 그 웅장한 모습은 일약 서울 장안의 명물이 되었다.

이 병원의 이름을 처음에는 ‘해리스 기념병원(The Lillian Harris Memorial Hospital)’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1897년 10월에 내한하여 5년간 서울과 평양에서 한국여성의 병치료를 담당하다가 평양에서 발진티푸스에 걸린 여자를 치료하던 중 결국 그 병에 걸려 1902년 5월에 사망한 해리스양을 기념한 것이었다.

이후 정동에 있던 보구여관이 동대문으로 이전되어 이 병원에 통합되면서 1930년부터는 ‘동대문부인병원’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945년이화여자대학교에 행림원(杏林院) 의학부가 창설됨에 따라 이 동대문부인병원은 김활란(金活蘭) 총장의 노력에 의하여 이화여자대학교부속병원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인용>

 


▲ 보구여관 터(普救女館址) 표석

 

▲ 보구여관 터(普救女館址) 표석

 

▲ 보구여관 터(普救女館址) 표석

 

▲ 보구여관 터(普救女館址) 표석... 정동교회 방향

 

▲ 보구여관 터(普救女館址) 표석... 이화여고 담장에 붙어있다.

 

▲ 보구여관 터(普救女館址) 표석... 사람들은 눈길도 안주는데 비둘기들이 한가로이 노닌다.

 

▲ 보구여관 터(普救女館址) 표석... 정동교회 방향

 

▲ 보구여관 터(普救女館址) 표석... 이화여고 방향

 

▲ 서울중구 표석 위치..

 

▲ 보구여관 터(普救女館址) 표석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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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방인야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