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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혜청 터(宣惠廳址)
선혜청 터(宣惠廳址)는 남대문을 들어서면 바로 앞에 있다. 즉 한양으로 들어오는 초입에 선혜청이 있었던 것이다. 지금으로 치면 나라의 곳간이 바로 선혜청이었다. 이 선혜청 창고로 인해 창동(倉洞)이라는 동명이 생겨났고 북쪽은 북창동, 남쪽은 남창동으로 부르게 되었다.
예전 사진을 보면 이 창고 앞에서 시장을 열었다는데(창내장) 아마도 지금의 남대문시장의 원조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지금도 이 일대는 남대문시장, 수입상가 등으로 평소에도 무척 붐비는 곳이다. 사진 한 장 제대로 찍기 힘든 곳이다.
이곳 선혜청 터 표석도 처음에는 옆으로 길죽한 대리석을 화단 위에 놓여 있었는데 지금은 간단명료하게 글자 몇자만 적어서 세워놓았다. 참 실용적인 표석이다.
이곳은 언제 찾아도 부근에 상인들이 많아서 정신 없는 곳인데 사진 또한 넓게 찍지 못하고 좁혀서 겨우겨우 찍는 곳이다. 숭례문을 배경으로 뒤에서 찍어야 하는데 그 안쪽으로 진입이 어려워 한번도 찍어본 적이 없다. 다음 번에 방문하면 아예 건물 안쪽으로 들어가서 한번 시도해 봐야겠다.
나라의 곳간이 있던 곳이어서 그런지 이곳은 물건이 거래되는 시장이 자주 열렸던 모양이다. 지리적으로 보면 동대문시장은 물이 모이는 곳이므로 시장 형성이 자연스러운 곳이지만, 이곳 남대문시장은 물이 출발하는 곳으로 시장과는 거리가 있다. 그런데 이곳 숭례문을 통해 사람들이 드나드는 곳이다보니 자연스레 시장이 형성되었다고 보여진다. 이런 뜻에서 남대문시장은 인문지리 시장이라고 생각된다.
이곳이 임오군란의 시발지 였다. 당시 구식 군인들의 봉급이 1년 가까이 밀려 있었는데 선혜청에서 밀린 봉급을 주면서 쌀에 겨와 모래를 섞어 주었던 것이다. 이에 격분한 구식 군인들이 군란을 일으킨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민의를 거스르거나 민의를 읽지 못하면 항상 뒤끝이 좋지 못하다고 보여진다.
선혜청(宣惠廳)
1608년(광해군 즉위년) 대동법(大同法)이 선혜지법(宣惠之法)이란 이름으로 경기도에 처음으로 시행되면서 이를 관리하기 위해 설치한 관서.
뒤에 대동법이 강원도·충청도·전라도·함경도·경상도·황해도의 순으로 실시되면서, 이들을 관리하기 위해 설치한 각 도(道)의 대동청(大同廳)도 그 산하에 흡수되었다.
또한, 물가조절과 진휼모곡(賑恤耗穀 : 곤궁한 백성을 구제하기 위한 환곡제도로 춘궁기에 곡식을 빌려주고 추수기에 일정한 부가세를 붙여 거둬들임.)을 겸했던 상평청(常平廳), 진구(賑救 : 재해를 입은 자들을 구제함.)를 전담했던 진휼청(賑恤廳), 균역법(均役法)에서의 군관포(軍官布)와 결작미(結作米) 및 어·염·선세(魚鹽船稅) 등을 관리했던 균역청(均役廳)이 순차로 속하게 되었다. 따라서 호조를 능가하는 최대의 재정기관이 되었다.
선혜청은 조선 말까지 존속하다가 1894년의 갑오개혁 때 대동법의 폐지와 함께 혁파되었다. 당초 설청(設廳)될 때에는 국초부터 설치되어 온 상평청을 병합했는데도 경기도의 선혜지법과 종래의 상평청의 업무를 관장하는 기관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선혜법에 이어서 이를 보완한 대동법이 1624년(인조 2)에 강원도·충청도·전라도에 실시될 때만 하더라도 이의 관리는 따로 설치된 삼도대동청(三道大同廳)이 맡았다. 그리고 이듬 해에 충청도·전라도의 대동법이 폐지되고 강원도의 대동법만이 계속 시행되었을 때에도 대동청이 호조 산하로 이속되어 대동법은 호조가 주관하였다. 그러나 이때에도 상평(常平)의 업무와 경기도의 대동법은 선혜청에서 관장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652년(효종 3)김육(金堉)에 의해 크게 수정, 정비된 대동법이 충청도에 다시 실시되면서 그 관리기관인 호서대동청(湖西大同廳)이 선혜청 산하에 들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호조 산하의 대동청, 즉 강원대동청도 선혜청으로 이속된 것이다. 이로부터 대동법과 상평(常平)의 업무를 관장, 집행하는 새로운 재정기관으로서의 선혜청의 위치가 확립되었다.
따라서 그 뒤로는 전라도·경상도·황해도의 각 대동청도 설청과 동시에 그 산하에 들게 되었고, 나아가 종래 비변사에서 관장하는 진휼청과 균역법의 시행으로 설치된 균역청마저도 수용되어갔다.
한편, 소속관원은 설치 당초에는 영의정이 예겸(例兼)하는 도제조(都提調) 1인과 호조판서가 예겸하는 제조 1인, 그리고 선혜법과 상평의 업무를 각기 담당한 낭청(郎廳) 2인을 두는 데 그쳤다.
그러나 1652년에 재정기관으로서의 위치가 확고해지면서 도제조가 3인(영의정·좌의정·우의정이 예겸), 제조가 3인(1인은 호조판서가 예겸하고 나머지 2인은 2품 이상의 관원 중에서 겸임)으로 각기 늘어났다. 그리고 낭청 휘하에 계사(計士)·서리(書吏)·사령(使令)·고직(庫直)을 각기 증설, 배치하였다.
또한 여러 청을 수용하면서 각 청의 남은 경비를 모아 선혜청 직원에게 삭료(朔料 : 月給)를 지급하고, 소요경비를 보조하는 공잉색(公剩色)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선혜청의 업무 전체를 지휘, 감독하는 당상(堂上)도 두었다.
이처럼 선혜청은 조선 후기에 세입(歲入)의 대부분을 관장, 관리하면서 호조의 기능과 업무를 훨씬 능가했기 때문에, 의정부를 유명무실하게 했던 비변사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 존재와 기능에 적지않은 비판이 일었다. 그러나 그 기능이 너무 비대했으므로 폐지하지 못하고, 1894년 갑오개혁 때까지 존속하게 되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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