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무등산(無等山) 원효사(元曉寺)

 

김덕령장군 사당인 충장사를 답사하고 막바로 무등산원효사를 찾았다. 해가 넘어가는 무등산의 모습을 보기 위함인데 원효사는 무등산을 남동향으로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해넘이는 볼 수가 없다. 다만 햇빛이 무등산에 비치는 모습을 보기 위해 서두른 것인데 이날은 정말 생각지도 않은 장관을 연출했다. 며칠 전에 내린 눈이 무등산 정상을 뒤덮고 있었는데 그곳에 햇빛이 비치니 산정이 눈부시게 빛나서 어디에서도 보지 못했던 풍광을 연출하고 있었다. 
날은 어두워져서 원효사를 찾은 때는 종무소도 문을 닫은 뒤라서 촛불도 켤 수 없었는데 다행이 대웅전은 개방이 되어 잠시 기도를 올리고 나왔다. 원효사는 생각보다 작은 절이었다. 이곳 대웅전에서 바라본 무등산은 정말 환상적이었다. 산정에 눈이 쌓여있다보니 석양의 무등산은 부처님 광배처럼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곳 당우들도 6.25 공비토벌작전 때 아군에 의해 작전을 위해 전소되었다고 나온다. 임진왜란이나 정유재란 때 불 탄 절간들은 6.25때도 불에 탄 곳이 많다. 불이 나면 또 전각을 세우고 반복해서 불사를 하는데 몇 백년을 주기로 이렇게 불에 타는 일이 반복 되는 것은 무엇일까? 꼭 나라의 전란 탓으로만 볼 수 있는 것일까? 집이나 사찰의 입지에 대해 잠시 피력해 본다.
풍수지리의 입장에서 보면 자연의 현상, 영향 등은 그곳의 입지, 절간의 배치 등이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대부분의 사찰들이 산속 깊은 곳에 있다보니 화를 더 많이 입은 게 사실이다. 그렇지만 같은 산속이어도 화를 입지 않은 곳은 또 어떤 곳일까? 제가 깊은 연구를 하지 않아서 일반화 시킬 수는 없지만 입지가 많은 영향을 주는 것 만은 사실이다.
가장 중요한 요소가 바로 바람이다. 바람에 노출된 집이나 묘지나 사찰이나 모두가 기운이 흩어지는 곳이므로 제대로 된 기운을 받지 못한다. 또한 바람은 화마(불)하고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볼 수 있어서 안전한 입지라고 말할 수 없다. 바람은 산 능선에서도 많이 불지만 계곡에서 부는 바람이 더 무섭다. 
이런 것을 염두에 두고 사찰의 입지를 살펴보면 뒤로는 수려한 산이 솟고, 좌우 능선(청룡과 백호)이 포근히 감싸주고 앞으로 물길이 환포하여 흐르는 좋은 곳을 터전으로 삼은 곳은 신도들도 많고 화마도 비켜간 곳이라고 볼 수 있다. 주의할 것은 뒤로 수려한 산이라고 해서 너무 높으면 이는 바람보다도 더 무서운 능압이 되어 좋지 못하다.
앞에 산이 높으면 사찰이나 집, 묘 등도 모두 높아야 능압을 피할 수 있고 주산이 조안산과 대등하게 되어 음양배합이 맞는다고 볼 수 있다. 아주 단순한 것들을 실생활에 접목하면서 좋은 기운이 넘치는 곳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충장공(忠壯公) 김덕령(金德齡) 묘

 

 

무등산(無等山) 원효사(元曉寺)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송광사(松廣寺)의 말사이다. 창건연대는 알 수 없으나 신라의 지증왕이나 법흥왕 때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 뒤 삼국통일을 전후한 문무왕 때 원효(元曉)가 이곳에 머물면서 암자를 개축한 뒤부터 원효사·원효당·원효암 등의 이름으로 불렀다고 한다. 일설에는 고려 충숙왕 당시의 이름 있는 화엄종승(華嚴宗僧)이 창건한 뒤 원효를 사모하는 마음에서 원효암이라 했다고도 한다.
그 후의 역사는 입증할 길이 없으나 문정왕후(文定王后)의 섭정 때 사세(寺勢)가 다시 일어났으며, 선조 때의 승병장이었던 영규(靈圭)가 수도했던 곳이기도 하다. 정유재란 때 전소된 뒤 증심사(證心寺)를 중창했던 석경(釋經)이 직접 기와를 구워 중창하였다.
그 뒤 1636년(인조 14)에 신원(信元)이, 1685년(숙종 11)에는 신옥(信玉)과 정식(淨式)이, 1789년(정조 13)에는 회운(會雲)이, 1831년(순조 31)과 1847년(헌종 13)에는 내원(乃圓)이 각각 중수하였다.
6·25전쟁으로 소실된 것을 광주광역시 당국의 무등산 개발에 힘입어 1954년부터 중창에 착수하였다. 이 때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으로 된 대웅전, 선원(禪院)과 요사(寮舍) 등을 중건하였다.
이 공사 때 옛 절터에서 삼국시대의 금동불상 6점을 비롯하여 백제의 토기와 와당, 통일신라시대의 금동불상 6점, 고려시대의 철불두상(鐵佛頭像)·고려자기 및 기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만든 토기불두(土器佛頭) 140점이 출토되었다. 이들 출토 유물 중 32점은 일괄하여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8호로 지정되어 있다.
또한, 절 주변에는 무명의 고려시대 묘탑을 비롯하여 조선 중기의 회운당부도(會雲堂浮屠) 등이 산재되어 있다. 부도는 높이 2m이고 4각 지대석(地臺石) 위의 4우(隅)에 신장(神將)을 세운 중대석을 놓고 그 위에 연화대로 받쳐진 탑신을 얹고 있는데, 옥개는 역시 8각으로 각 마루에는 용·거북·비둘기 등의 동물들이 조각되어 있다. 이 부도는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7호로 지정명칭은 원효사 동부도(元曉寺東浮屠) 이다. 이외 원효사 선원에는 광주광역시 시도유형문화재15호 원효사소장만수사범종(元曉寺所藏萬壽寺梵鐘)이 있다.
이 절에서 무등산의 정상 쪽으로 골짜기를 넘은 곳에 의상대(義湘臺)라는 매우 수려한 바위 봉우리가 있으며, 그 아래에는 의상토굴이 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인용>


무등산국립공원
 
무등산은 광주와 담양군·화순군과 경계에 있는 산으로 무악(武岳)·무진악(武珍岳)·서석산(瑞石山)·입석산(立石山)이라고도 한다. 높이를 헤아리기 어렵고 견줄 상대가 없어 등급조차 매길 수 없다는 산이 무등산이다. 해발 1,186.8m로 산세가 유순하고 둥그스름한 모습이다. 산정상은 천왕봉, 지왕봉, 인왕봉 등 3개의 바위봉으로 이뤄져 있으며, 이를 "정상 3대"라고도 한다. 정상을 중심으로 여러 곳에 규봉, 입석대, 서석대 등의 이름난 기암괴석과 증심사, 원효사, 약사사 등의 사찰이 자리잡고 있다. 무등산의 가을철은 규봉암의 단풍과 장불재, 백마능선의 억새풀이 절경을 이루고 겨울에는 설화와 빙화가 일품이다. 1972년 도립공원으로 지정, 이후 40년만에 21번째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산 아래에는 각종 놀이시설 및 편의시설이 들어서 있다. 또한 옛 궁궐의 진상품이었던 무등산 수박의 뛰어난 향을 가진 춘설차 등도 무등산의 매력이다. 산기슭의 증심사를 기점으로 출발하여 두어 시간이면 정상에 오를 수 있고, 산의 동북쪽으로 관광도로가 개설되어 산허리의 원효계곡까지 자동차로 거의 30분 거리이며, 여기서 정상까지는 1시간 30분 정도 오르면 된다. 공원면적은 30.23㎢ 이다.(광주 27.03㎢ / 전남 3.20㎢) 

* 무등산에 있는 다양한 사찰 * 
무등산에는 증심사(證心寺)와 원효사, 천문사(天門寺)·미력사(彌力寺)·동국사(東國寺)·보덕사(普德寺)·백운암(白雲庵)·약사암(藥師庵) 등의 사찰이 있어 등반의 또다른 재미를 선사한다. 증심사는 통일신라시대 철감국사(哲鑑國師) 도윤(道允)이 창건한 절로서, 이 곳에는 철조비로자나불좌상(鐵造毘盧舍那佛坐像:보물 131), 5층석탑·오백나한전(五百羅漢殿) 등이 있으며, 증심사의 말사인 약사암에는 석조여래좌상(石造如來坐像:보물 600)이 있다. 원효사는 신라시대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창건한 절인데, 증심사와 함께 한국전쟁 당시 때 공비 토벌작전으로 소실되었다가 복구되었다.<대한민국구석구석에서 인용>

 

문화재지정 미지정
문화재명칭 무등산(無等山) 원효사(元曉寺)
소재지 광주직할시 북구 금곡동 846
관리자(연락처) 대한불교조계종21교구 무등산 원효사

 

▼ 무등산(無等山) 원효사(元曉寺) 안내석

▼ 무등산(無等山) 원효사(元曉寺) 일주문... 눈 내린 일주문 사진을 찾다가 다음카페, 블로그에서 옮겨왔다.

▼ 무등산(無等山) 원효사(元曉寺) 항공사진... 원효사 홈페이지 인용

▼ 무등산(無等山) 원효사(元曉寺) 가람배치도...현재 배치도와 구 배치도... 현재도 전각 명칭이 바뀌고 있다.

▼ 무등산(無等山) 원효사(元曉寺) 입구... 돌탑이 인상적이다.

▼ 무등산(無等山) 원효사(元曉寺)로 들어서면 범종각이 제일 먼저 반긴다.

▼ 원효사(元曉寺) 원효루... 예전에 회암루라 했는데 근자에 원효루로 바뀐 모양이다.

▼ 원효사(元曉寺) 원효루 양쪽에는 금강역사를 배치했다. 

▼ 원효사(元曉寺) 대웅전

▼ 원효사(元曉寺) 성산각

▼ 성산각과 명부전 사이에 작은 집이 있는데 요사체로 쓰는듯...

▼ 원효사(元曉寺) 원효전(구 개산조당)과 명부전

▼ 원효사(元曉寺) 원효전(구 개산조당)... 원효전에는 원효사의 창건주로 숭상되는 원효성사의 진영이 모셔져 있다. 원효성사의 진영은 세가지 형태로 모셔졌는데, 각각 보는 방향에 따라서 다르게 조성되어져 있다. 현재의 원효전 건물은 1990년 5월에 건축되었으며, 이 전각 내에는 1710년 추월산 만수사에서 조성되어졌다가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이곳 원효사에 소장되고 있는 시지정 유형문화재 15호인 만수사 범종이 있다.<홈페이지 인용> 지붕이 무너진듯...

▼ 원효사(元曉寺) 약사전

▼ 원효사(元曉寺) 대웅전 앞에서 바라본 풍경... 무등산 설경이 멋지다.

▼ 원효사(元曉寺)에서 바라본 무등산... 무등이란 등급이 없다는 표현이 맞는듯...

▼ 무등산(無等山) 원효사(元曉寺)에서 바라본 무등산...

▼ 원효사(元曉寺) 오층석탑

▼ 원효사(元曉寺) 감로정

 

원효사소장 만수사범종(元曉寺所藏萬壽寺梵鍾), 광주 유형문화재 제15호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총고 86㎝․구경 63㎝인데 용뉴부(龍鈕部)는 20㎝, 종신부는 66㎝인 범종이다.
종을 매다는 부분인 용뉴는 각각 여의주을 물고 있는 2마리의 용으로 장식하였는데, 용머리 위에도 불꽃에 휩싸인 1개의 여의주을 장식하였다. 용두의 표현이나 천판에 드리운 발의 조각기법은 약간 경직되어 있다. 또한 소리를 내는 음관으로써 용동시설 대신 천판상부에 원형의 음공(직경 2㎝)을 마련하였다.
종 위쪽 띠에는 범자(고대 인도어) 문양 띠를 둘렀으며, 띠 아래에는 사각형의 유곽과 4구의 보살상이 동일선상에 번갈아 배치되었다. 유곽과 4구의 보살상 사이에 왕실의 안녕을 비는 글이 새겼다. 유곽 안에는 연꽃무늬의 바탕에 연봉오리 모양의 9개의 유두가 도드라지게 새겨 있다.
보살입상과 유곽 아래에는 양각의 명문대가 있는데 그 내용을 보면, “
강희사십구년 경인사월일 추월산 만수사 대종수성야”라고 적혀있어,  조선 숙종36년(1710)에 조성되었으며, 원래는 담양 추월산 만수사의 대종으로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양각의 명문대 아래에는 “단기 4287년 갑오칠월일”이란 음각명과 함께 1954년 원효사 대웅전을 중수할 때 시주한 사람들의 명단이 음각되어 있다.
이 종은 몸체 높이와 입 지름의 비율이 거의 1:1로 전형적인 조선종의 비율을 지니고 있으나, 용뉴 부위의 표현이 경직되고 음통대신 음구멍을 넣는 등 양식의 퇴화가 엿 보인다. 
또 당좌 및 하대의 문양이 없어지는 등 조선후기 범종의 특징이 나타나는 점에서, 범종의 양식 변화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현재까지 전남지방에서 발견된 범종은 모두 20기가 있는데, 그 중 광주광역시에 소재하는 것은 유일하게 이 원효사 범종 뿐이다.
이 범종은 그동안 대웅전 내에 보관되어 오다가 항구적인 보존을 위해 새로운 종을 주조하여 대체하고, 현재는 개산조 전각으로 옮겨 보관중이다.<무등산원효사 홈페이지>

 

▼ 원효사(元曉寺) 원효전에 보관 중인 만수사범종(元曉寺所藏萬壽寺梵鍾)

▼ 원효사소장 만수사범종(元曉寺所藏萬壽寺梵鍾)<원효사 홈페이지>

 

원효사 출토유물(元曉寺出土遺物) 32점, 광주 유형문화재 제8호
 
신라 문무왕(재위 661∼681) 때 원효가 머물었다는 광주 무등산에 있는 원효사 대웅전을 신축하던 중 발견된 유물들이다. 수 백점이 발굴되었으나 그 중 금동·청동불상 12점, 소조불상 18점, 청동거울 2점이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근래에 8∼9세기의 해무리굽 청자 조각이 발견되어, 이 절의 창건연대를 높이는 단서가 되었으며, 조선시대 분청사기의 파편들이 다수 발견되어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금동·청동불상들은 대부분 부식상태가 심하여, 다른 불상이 가지고 있는 몸 뒤의 광채 즉, 광배와 받침인 좌대를 잃어 버렸다. 불상들은 10㎝ 내외의 서 있는 것으로, 통일신라에서 조선시대까지 만들었다. 보살상과 동자 2점을 제외한 모든 불상이 손바닥을 앞으로 하고 왼쪽은 손가락을 위로, 오른쪽은 아래로 향하고 있다.
원효사의 발굴유물 대부분이 진흙으로 빚어 만든 소조불상들로 100여점이 넘는다. 그 가운데 비교적 원래 모습에 가까운 18점을 문화재로 지정하였다. 고려시대에 만든 것으로, 머리모양 수법이 비슷하다. 발굴 당시의 조각들을 모아 복원한 결과 머리높이 10.5㎝, 상체 10㎝, 하체 6.5㎝로 전체 높이 27㎝ 가량의 불상들로 밝혀졌다. 이들 소조불의 발견으로 원래 원효사에 천불전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청동거울 중 2마리 용이 새겨진 거울은 조각이 섬세하고 정교하다. 중심에는 2겹으로 된 연꽃을 새겼고, 그 밖으로 2마리의 용을, 외곽에는 구름무늬를 새겼다. 가운데 있는 2마리 용은 서로 반대 방향에서 꿈틀 거리는 모습이며, 예리한 발톱을 가지고 있고 여의주로 보이는 2개의 구슬이 돋아나게 새겼다. 또 다른 백색의 거울은 무늬가 없으며 별 특징이 없다. 이 2점의 거울은 고려시대 공예 조각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무등산원효사 홈페이지>

 

▼ 원효사 출토유물(元曉寺出土遺物) <원효사 홈페이지, 다음블로그 여행&사진에서 인용>

 

 

▼ 기타 원효사(元曉寺)에 세워진 탑, 비석, 원효상 등

 

원효사 동부도(元曉寺東浮屠), 광주 유형문화재 제7호
 
부도는 승려의 무덤을 상징하여 그 유골이나 사리를 모시는 곳이다. 이 부도는 원효사 대웅전에서 왼쪽으로 약 150m 떨어진 숲속에 자리하고 있다. 
네모난 바닥돌 위에 3개의 받침돌로 이루어진 기단(基壇)을 마련한 후, 탑신(塔身)을 올려놓은 모습으로, 바닥과 기단의 일부를 제외한 각 부분이 8각을 이루고 있다.
탑신의 몸돌은 너비보다 높이가 길며 약한 배흘림을 하고 있다. 
지나치게 큰 지붕돌은 가득 새겨진 조각들로 인해 더욱 무거워 보인다. 윗면에는 
기왓골과 여덟 모서리선이 뚜렷하고, 밑면에는 2중의 서까래를 조각하여 겹처마를 
표현하고 있으며, 여덟 귀퉁이에는 꽃조각 대신 용, 다람쥐, 비둘기, 거북 등의 동물들을 조각하여 장식하였는데 이러한 모습은 고려 후기에 나타나는 특이한 양식이다.
통일신라의 8각 양식을 따르면서도, 받침부분 일부에서 4각을 보이고 있고, 지붕돌의 동물조각 등이 전형에서 벗어나 있어 고려 후기의 작품으로 추측된다.
기단은 아래받침돌 윗면에 연꽃조각을 두르고, 옆면의 네 모서리에 숫사자와 암사자를 교대로 배치하였다. 가운데받침돌은 4면에 연꽃을 새기고, 네 모서리마다 사자와 용을 각각 암수로 나누어 조각하였으며, 윗받침돌은 옆면에 연꽃을 돌려 새겼는데 너무 얕아서 형식에 치우친 감이 있다.<무등산원효사 홈페이지>

 

▼ 무등산(無等山) 원효사(元曉寺) 동부도<원효사 홈페이지>

 

시인 김현승(金顯承)
 
〈가을의 기도〉를 비롯한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한 시를 많이 썼다. 호는 다형(茶兄)·남풍(南風). 제주도와 광주에서 어린시절을 보내고 1926년 전남 광주의 숭실학교 초등과를 마쳤으며 평양 숭실중학교를 거쳐 1932년 숭실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했다. 1934년 장시 〈쓸쓸한 겨울 저녁이 올 때 당신들은〉·〈어린 새벽은 우리를 찾아온다 합니다〉를 양주동의 추천으로 〈동아일보〉에 발표하여 문단에 나왔다.
이어 1934년 〈동아일보〉에 암울한 일제시대 속에서도 민족의 희망을 노래한 〈새벽〉·〈새벽은 당신을 부르고 있읍니다〉 등을 발표했다. 1936년 숭실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하다가 1937년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투옥되기도 했다.
해방이 되자 〈내일〉(민성, 1949. 6)·〈창〉(경향신문, 1946. 5) 등을 발표했고 1950년대에는 기독교적인 구원의식을 바탕으로 하여 전쟁 뒤에 오는 허무·상실을 노래했다. 1955년 한국시인협회 제1회 시인상 수상자로 결정되었으나 수상을 거부했다. 1957년 첫 시집 〈김현승시초(詩抄)〉를 펴냈으며 한국문인협회 상임위원을 지냈다.
조선대학교·숭실대학교 교수를 지냈으며 1961년 한국문인협회 이사로 뽑혔다.
두번째 시집 〈옹호자의 노래〉(1963)는 자연과 인생에 대한 종교적인 사색을 노래했는데 잘 알려진 〈가을의 기도〉 등 가을 연작시와 신적(神的) 세계질서에 대한 열망과 자유를 노래한 〈지상의 시〉 등을 실었다. 한국문인협회 시분과 위원장과 부이사장을 지냈다. 1968년 고독을 시의 주제로 삼은 〈견고한 고독〉과 1970년 〈절대고독〉 등의 시집을 펴냈다.
〈견고한 고독〉은 간결한 시 형식을 취한 데 비해 〈절대고독〉은 비유·상징과 어려운 말을 자주 쓴 것이 특징이다. 〈절대고독〉은 신의 존재를 느낄 수 없을 만큼 개별화된 현대인의 삶의 고독감을 노래한 것이다.
1973년 서울특별시 문화상을 받았고 1974년 〈김현승 시전집〉을 펴냈다. 1975년 숭실대학교 채플 시간에 기도하다가 고혈압으로 죽었다. 유고시집으로 〈마지막 지상에서〉(1975), 산문집으로 〈고독과 시〉(1977)·〈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1984), 저서로 〈한국 현대시 해설〉(1972)·〈세계문예사조사〉(1974) 등이 있다.<다음백과에서 인용>

 

▼ 원효사(元曉寺) 오르는 길에 광주의 시인 김현승 시비가 세워져 있다. 길에서 들어간 곳에 있어서 잘 보이지 않는다. 오래전에 세워진 시비라 글씨도 잘 보이지 않고 찾는 이도 거의 없는듯...

▼ 김현승 시인의 '눈물'이라는 시가 새겨져 있다.

 

눈 물  
                  
더러는 
옥토(沃土)에 떨어지는 
작은 생명이고저…… 

흠도 티도, 
금가지 않은 
나의 전체(全體)는 오직 이뿐 ! 

더욱 값진 것으로 
드리라 하올 제
 
나의 가장 나아종 지닌 것도 
오직 이뿐

아름다운 나무의 꽃이 
시듦을 보시고 
열매를 맺게 하신 
당신은 
나의 웃음을 만드신 후에 
새로이 나의 눈물을 지어 주시다. 

 

 

▼ 무등산(無等山) 원효사(元曉寺)에서 바라본 무등산... 너무 멋진 풍경을 보고 그냥 갈 수 없어 인증샷...

 

728x90
반응형
Posted by 이방인야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