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일이 너무 커서 사진이 깨져서 나오므로 부득이 2편으로 나눠서 글을 게재합니다.
충장사 및 김덕령 묘-두번째(2/2) 바로가기
충장사(忠壯祠) 및 김덕령(金德齡) 묘
담양 소쇄원 답사를 마치고 조금 늦었다 싶었지만 아직 5시가 채 안된 시각이라 서둘러 충장사를 찾았다. 그런데 입구 철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안쪽에 사람이 있는 것 같아서 몇 번 큰 소리로 불러보았지만 인기척이 없다. 할 수 없이 안으로 잠긴 문을 손을 넣어 열고 들어섰더니 관리인이 나오신다. 말씀인즉 물이 얼어서 관람이 제한 된다고 하신다. 그렇지만 서울에서 어렵게 간 곳이라 말씀드리고 서둘러 묘역을 돌아보고 내려왔다. 아마도 코로라로 인해 관람객도 제한되고 사람도 없어서 일찍 문을 닫은 것이라 생각된다.
김덕령 장군은 호남지방에서는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광주 충장로는 김덕령 장군의 시호 충장공에서 유래된 것이다. 그런데 김덕령 장군의 임진왜란 의병활동에서는 크게 전승을 거둔 곳은 별로 없다. 내용을 살펴보니 일본군들이 지레 겁먹고 미리 전투를 피했다고 나온다. 그러다 성격이 급한 김장군이 병영에서 술이 취해 몇번 실수를 한 일이 있었고 부하들에게도 원성을 산 일이 있었던 모양인데 이런 것이 누적 되어 이몽학 반란 때 무고로 인해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당시 세력가들에게서도 도움을 얻지 못하여 끝내 억울하게 옥사한 인물이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은 인물들이 무속인들의 신앙 대상이 되는 경우는 임경업, 최영장군, 남이장군 등에서 많이 보는데 호남지방에서는 김덕령장군이 이에 속하여 많은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구전으로 전해내려오는 김덕령설화를 보면 김덕령이 태어나기 전 김덕령의 부모가 조상의 묘를 중국지사가 잡아놓은 곳에 몰래 암장했는데 장법을 제대로 지키지 않아 인물은 나왔지만 비참한 죽음을 당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김덕령은 힘이 장사여서 손으로 호랑이를 잡거나 거친 말을 길들이고, 백 근의 철퇴를 양 허리에 차고 다녔으며, 왜장은 김덕령의 화상만 보고도 두려워서 군대를 철수했다 한다. 아마도 임진왜란 때 특별한 전투가 없었던 것을 설화로 승화시킨 것이 아닌가 본다.
젊은 기개가 충만한 장군이 시대를 잘 만나 무과에 급제하지도 않고 전장의 장군으로 나갈 수 있었지만, 또한 선조라는 무능한 군주를 잘 못 만나 친국을 6번이나 당하면서도 끝내 결백을 밝히지 못하고 억울한 옥사를 한 것도 시대를 잘 못 만난 탓이라 본다.
겨울철 늦은 오후에 찾은 충장사는 그림자가 짙게 드리우고 을씨년스런 바람이 차갑게 불고 있었는데 누군가는 이곳이 명당이라고 피력했지만 여러 측면에서 많이 부족함을 느꼈다.
충장사(忠壯祠) 충장사(忠壯祠)는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김덕령(金德齡) 장군을 모신 사당이다. 충장사는 김덕령의 시호에서 따온 이름이다. 김덕령이 죽은 뒤 60여 년 만인 1661년에 억울함이 풀려 관직에 복직되었다. 1677년(숙종 3년)에 광주목사가 된 이민서(李敏敍)는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박광옥(朴光玉)의 사우 벽진서원을 중수하고, 1678년(숙종 4년) 지방 사림들의 뜻을 모아 김덕령(金德齡)을 벽진서원에 제향하였다. 1680년(숙종 6년) 윤8월 24일 이민서가 의병을 일으킨 일에 대해 청액상소를 올리자, 박광옥(朴光玉)ㆍ김덕령을 배향한 사원에 “의열(義烈)”이라는 사액을 받게 하였고, 김덕령은 특별히 정2품 병조판서에 증직하였다. 영조(英祖) 대에는 의열사에 형 김덕홍과 아우 김덕보도 아울러 배향하였다. 1785년(정조 9년)에 증 병조판서 김덕령에게 충장(忠壯)의 시호가 내려졌고, 김덕홍(金德弘)과 그 아우 김덕보(金德普)에게 포장(褒奬)하여 증직하였다. 1788년(정조 12년) 지방관으로 하여금 그 마을에 ‘증 병조판서 충장공 김덕령 증 정경부인 흥양이씨 충효지리(贈兵曹判書忠壯公金德齡贈貞敬夫人興陽李氏忠孝之里)’라는 비석을 세우게 하였다. 1789년(정조 13년) 자급(資級)을 의정부 좌찬성 종1품에 추증하고, 김덕령의 제사를 영구히 지내고 절대로 신주를 옮기지 말라는 부조특명(不祧特命)을 내렸다. 장군이 태어난 마을 이름도 생계(牲繫)에서 오두(烏頭)로 바꾸도록 명하였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로 한때 의열사가 철거되었다. 이후 1975년 2월 무등산의 명당으로 알려진 광주 금곡동 배재마을(이치마을)의 남서쪽 산기슭에서 현재 위치(광주광역시 북구 금곡동 1023; 광주광역시 북구 송강로 13)에 충장사로 복원하여 건립하였다. 경내에는 김덕령의 영정과 교지가 봉안되어 있는 사우 충장사, 동재와 서재, 은륜비각과 해설비, 유물관, 충용문, 익호문 등이 세워져 있다. 유물관에는 중요민속자료 제111호로 지정된 '김덕령 장군' 의복과 장군의 묘에서 출토된 관곽, 친필 등이 전시되어 있다. 사당 뒤쪽 언덕에는 김덕령의 묘와 묘비가 있으며 가족묘도 조성되어 있다. 1789년(정조 13년), 나라에서는 김덕령이 태어난 마을에 충효리(忠孝里)라는 이름을 하사해 그의 마을이 아직도 충효동으로 불리고 있다. 이렇게 충, 효, 열(烈)을 지켜온 집안이니 충장사에 봉안되는 것이 무리는 아니다. 한편 본래의 의열사는 1986년에 원래 위치인 광주광역시 광산구 서창동 벽진리에 복원되었다. 사당 뒤쪽 언덕에는 충장사 묘지가 조성되었다. 김덕령의 묘는 충장사에서 500 미터 떨어져 있는 배재마을 뒷산에 있었으나, 사당 건립할 무렵인 1974년 11월 충장사 묘지로 이장됐다. 김덕령의 묘와 묘비와 함께 가족 묘 13기가 함께 조성되어 있다.<위키백과에서 인용> 충장공(忠壯公) 김덕령(金德齡)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경수(景樹). 광주(光州) 출신. 아버지는 김붕변(金鵬變)이며, 어머니는 남평반씨(南平潘氏)로 직장(直長) 반계종(潘繼宗)의 딸이다. 20세에 형 김덕홍(金德弘)과 함께 성혼(成渾)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형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고경명(高敬命)의 막하에서 전라도 경내로 침입하는 왜적을 물리치기 위해 전주에 이르렀다. 그 때 돌아가서 어머니를 봉양하라는 형의 권고에 따라 귀향하였다. 1593년 어머니 상중에 담양부사 이경린(李景麟), 장성현감 이귀(李貴) 등의 권유로 담양에서 의병을 일으켜 세력을 크게 떨치자, 선조로부터 형조좌랑의 직함과 함께 충용장(忠勇將)의 군호를 받았다. 1594년 세자의 분조(分朝)로 세워진 무군사(撫軍司)에 지략과 용맹이 알려져 세자로부터 익호장군(翼虎將軍)의 칭호를 받고, 선조로부터 다시 초승장군(超乘將軍)의 군호를 받았다. 그 뒤 최담년(崔聃年)을 별장으로 삼아 남원에 머물다가 다시 진주로 옮겼는데, 이 때 조정에서는 작전상의 통솔과 군량 조달 문제로 각처의 의병을 통합, 충용군에 속하도록 하였다. 이로써 의병장이 되어 곽재우(郭再祐)와 함께 권율(權慄)의 막하에서 영남 서부 지역의 방어 임무를 맡았다. 왜적의 전라도 침입을 막기 위해 진해·고성 사이에 주둔하며 적과 대치했으나, 이 때 강화 회담이 진행 중이어서 별다른 전투 상황도 없고 군량도 부족해, 예하 3,000여 명 가운데 호남 출신 500여 명만 남기고 모두 귀농시켰다. 그 해 10월 거제도의 왜적을 수륙 양면으로 공격할 때 선봉장으로 활약해 적을 크게 무찌르고 이어서 1595년 고성에 상륙하려는 왜적을 기습, 격퇴하였다. 그 뒤 진주에 둔전을 설치하는 등 장기전에 대비해 출전의 차비를 갖추었지만, 강화의 추진으로 출전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울화가 생겨 과음을 하고 군법을 엄하게해 막료·군졸간에 불평의 소리가 높았고, 조정에서도 실망한 나머지 그에 대한 논의가 빈번히 제기되었다. 1596년에는 도체찰사 윤근수(尹根壽)의 노복을 장살한 죄로 투옥되었으나 영남 유생들의 상소와 정탁(鄭琢)의 변호로 곧 석방되었다. 그 해 7월 홍산(鴻山)에서 이몽학(李夢鶴)이 반란을 일으키자 도원수 권율의 명을 받아 진주에서 운봉(雲峯)까지 진군했다가, 이미 난이 평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광주로 돌아가려 했으나 허락받지 못해 진주로 돌아왔다. 이 때 이몽학과 내통했다는 충청도체찰사 종사관 신경행(辛景行)과 모속관(募粟官) 한현(韓絢)의 무고로 최담년·곽재우·고언백(高彦伯)·홍계남(洪季男)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 이에 정탁·김응남(金應南) 등이 무고를 힘써 변명했으나 20일 동안에 여섯 차례의 혹독한 고문으로 옥사하였다. 체구가 작지만 날래고 민첩하며 신용(神勇)이 있어, 용력에 대한 전설적인 이야기가 많다. 1661년(현종 2)에 신원(伸寃)되어 관작이 복구되고, 1668년 병조참의에 추증되었다. 1681년(숙종 7)에 다시 병조판서로 추증되고 1710년에 봉사손(奉祀孫)인 김수신(金守信)도 녹용되었다. 1788년(정조 12) 의정부좌참찬에 추증되고 부조특명(不祧特命: 국가에 공훈이 있는 인물의 神主를 영구히 사당에 제사지내게 하던 특전)이 내려졌다. 죽기 전에 지었다는 「춘산곡(春山曲)」 시조 한 수가 전한다. 1678년(숙종 4) 광주의 벽진서원(碧津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이듬해 의열사(義烈祠)로 사액되었다. 시호는 충장(忠壯)이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인용> |
문화재지정 | 미지정 |
문화재명칭 | 충장사(忠壯祠) 및 김덕령(金德齡) 묘 |
소재지 | 광주광역시 북구 금곡동 1023 |
관리자(연락처) | 광주광역시 |
▼ 충장사(忠壯祠) 입구...
눈 내린 겨울 오후 관람시간 내에 조금 늦게 방문했더니
문이 굳게 잠겨 있다. 수도관이 얼어서 문을 닫았다고 말씀하신다.
양해 말씀 드리고 들어가서 사진만 찍고 얼른 내려왔다.
아마도 관람객도 없고 해서 그런듯...
▼ 충장사(忠壯祠) 홍살문...
▼ 충장사(忠壯祠) 입구 전경
▼ 충장사(忠壯祠) 안쪽에서 바라본 홍살문...
▼ 충장사(忠壯祠) 안내판
▼ 충장공(忠壯公) 김덕령(金德齡) 신도비
▼ 충장사(忠壯祠) 유물관... 코로나로 인해 휴관이다.
▼ 충장사(忠壯祠) 외삼문인 충용문
▼ 충장사(忠壯祠) 내삼문인 익호문
▼ 충장사(忠壯祠) 전경
◆ 김덕령은륜비(金德齡恩綸碑)
광주시 북구 송강로 13(금곡동) 충장사 내, 김덕령 은륜비각이 있고 그 안에 비석이 있다. 원래는 충효동 배재마을 899번지에 백비로 있었으나 나중에 목사 조철영이 이 사실을 알고 글을 새겨 충장사로 옮겼다.
은륜비(恩綸碑)는 <광주읍지>에 따르면 주(州)의 동쪽 20리의 거리에 있는 빗돌로 명나라 영력(永曆) 연호(年號)로부터 네 번의 임인(壬寅)년이 지난 1842( 헌종8년)년도에 세운 충장공(忠壯公) 김덕령(金德齡)의 비석이다. 그 옆에는 원래 세웠던 것으로 추정되는 작은 은륜비가 있다. <유명조선국김충장공덕령은륜비(有明朝鮮國金忠壯公德齡恩綸碑)>라고 했다.
◐ 비문(碑文) : 광주(光州) 목사(牧使) 조철영(趙澈永) 지음
지난 정묘(正廟) 무신(戊申)년에 김장군의 마을에 그의 유업(遺業)을 기리는 표리비(表里碑)를 세우라는 임금의 교시(敎示)에 의해 갑자기 빗돌을 마련하여 이를 다듬으면서 약간의 흠집이 생기었다. 이 소식을 들은 정조께서 이 돌을 버리고 보다 견고한 돌을 사용하라는 명령에 의해 다시 새로운 돌을 구하였다. 이 때문에 그 돌이 현재까지 그 비의 명사(銘詞)를 지은 사람의 집에 그대로 방치되어 그 용도를 찾지 못한 많은 아쉬움이 없지 않았다. 오호(鳴呼) 통재(痛哉)라! 장군의 뛰어난 정충(精忠), 억울한 죽음에 있어서는 이미 열성조(列聖朝)의 많은 설원(雪寃)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정조(正祖)때에 이르러 더욱 이에 대한 많은 관심을 가지었다. 높은 관직을 추증(追贈)하고 시호(諡號)를 정함과 동시에 표리(表里)의 윤음(綸音)을 비롯한 사우(祠宇)의 제문(祭文) 및 유사(遺事)의 서문(序文)을 내리는 등의 이러한 사실을 생각할 때 백대(百代)의 오랜 광영(光榮)을 누릴 수 있는 대성인(大聖人)의 위대한 포상(褒賞)임이 분명하다. 비록 만분지일(萬分之一)의 조그마한 은전(恩典)이라 할지 라도 이 세상의 뛰어난 인물이 아니라면 어찌 이를 누릴 수 있겠는가? 이 때문에 김장군의 이러한 업적을 기리기 위해 임금께서 내리신 전후(前後)의 어제(御製)를 해당 연월(年月)의 순서에 따라 이 돌에 새기어 이를 기념하는 오늘의 이 비(碑)를 세우게 된 것이다. 옛날의 그 돌이 마치 오늘의 이 날을 위해 존재하는 듯한 깊은 감회가 있기 때문에 표리비가 있는 그 근처(近處)에 이 비를 세워 그 이름을 은륜(恩綸)이라 하였다. <광주 서구문화원>
▼ 충장사(忠壯祠)에 세워진 은륜비
▼ 충장사(忠壯祠) 은륜비 :
유명조선국숭정대부의정부좌찬성시충장행통정대부승정원승지충용장군김공덕령은륜비
(有明朝鮮國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諡忠壯行通政大夫承政院承旨忠勇將軍金公德齡恩綸碑)
▼ 충장사(忠壯祠) 은륜비 한글 해석비
▼ 충장공(忠壯公) 김덕령(金德齡) 가족 묘 원경
충장사 및 김덕령 묘-두번째(2/2)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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