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동래부사(東萊府使) 충렬공(忠烈公) 송상현(宋象賢) 묘(墓)

 

다음 블로그에 있는 글로 <수정>을 해야 하는데 예전 에디터로 작성되어서 폼이 완전 깨지네요. 그래서 이곳에 새로 작성해서 올리니 이해 바랍니다.

·······················································································

청주에 결혼식이 있어 가려는 데 대중교통은 무척 까다롭게 보이고 차를 가지고 가면 쉬울 것 같아서 자차로 이동하기로 했는데... 그 먼 곳까지 가려니 아깝다는 생각에 자투리 시간을 활용하고자 인근의 묘역을 답사하기로 하였다. 살펴보니 인근에 동래부사 송상현 사당이 있고 그 인근에 묘소가 있었다. 
결혼식 시간에 쫒겨 식이 끝난 다음에 찾았는데... 먼저 충렬사에 들렀더니 휑하니 인기척도 없어서 그냥 무심코 기념관에 들렀더니 해설사 두분이 계셨다. 아마도 자원봉사 하시는 분들 같은데 너무 사람이 없어서 안타까울 정도였다. 해설사님의 설명을 잘 듣고 사당에 들러 분향하고 신도비와 묘소로 향했다.

충렬사 입구에는 정려각이 있고 새로 세운 송상현신도비가 있다. 특이하게 송상현의 첩인 한소사 금섬, 이소사 양녀의 열녀문이 있어서 궁금하던 차였는데 해설사님이 잘 설명해 주신다. 충렬사를 방문하시는 분들은 기념관에 들러 해설사님의 설명을 들으면 많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된다.

묘소는 엄청 높은 계단을 올라가야 만날 수 있다. 모역 앞쪽으로 계단을 만들어서 설기(洩氣)가 염려될 정도다. 묘역에는 두 첩실인 한금섬 묘와 이양녀의 단이 함께 있다. 부인 성주이씨의 묘는 공의 묘 남쪽 1km(수의동 산 2-28)에 있다. 이곳에 연고가 없는데 아마도 부산에서 묘를 이장할 때 좋은 자리를 찾다가 이곳으로 정해진 듯 하다.

 

충렬공(忠烈公) 송상현(宋象賢)
 
송상현(宋象賢, 1551년 2월 12일(음력 1월 8일)~ 1592년 5월 25일(음력 4월 15일))은 조선 중기의 문신, 작가이며 임진왜란 때의 장수이다. 임진왜란 초기 동래성 전투에서 고니시 유키나가의 군과 교전하다가 패전 살해되었다. 왜적은 그를 포로로 사로잡아 항복을 강요하였으나 항복하지 않자 처참하게 살해하였다.
자는 덕구(德求), 호는 천곡(泉谷)·한천(寒泉)이며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본관은 여산(礪山)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적이 동래성에 육박하자 항전했으나 함락되게 되자 조복(朝服)을 갈아입은 후 북쪽을 향해 임금에게 절을 한후 적병에게 살해되었다. 그의 의연함에 감동한 적장 중의 한 사람은 그가 죽은 뒤 시(詩)를 지어 제사지내 주었다. 사후 증 자헌대부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가 다시 증 숭정대부 의정부좌찬성에 추증되고, 동래 안락서원(安樂書院)에 제향되었다.
1595년 선조 28년에 묘소를 청주로 이장하고 충신문을 세웠으며, 1610년 광해군 2년에 사당 동래부사송상현충렬사(東萊府使宋象賢忠烈祠)을 창건하였다. 1742년 영조 때 동래성 전투에서 전사한 사람들을 추모하여, 송상현 장군이 순절한 정원루가 있던 곳에 송공단을 만들었으며, 매년 음력 4월 15일에 동래기영회에서 제사를 올리고 있다. 또한 동래 충렬사에서도 동래성 전투와 부산진성 전투 등 임진왜란에서 전사한 여러 사람들을 모시고 있다.
또 황해도 개성 숭절사(崇節祠), 청주 상당구 용정동 신항서원(莘巷書院)과 흥덕구 수의동 충렬사(忠烈祠), 전라북도 정읍시 고부면 정충사(旌忠祠), 함경북도 경성(鏡城) 화곡서원(禾谷書院) 등에 제향되어 있다.<위키백과>


 

문화재지정 충청북도 기념물 제66호
문화재명칭 청주 송상현 묘소 및 신도비
소재지 충북 청주시 흥덕구 수의동 산 1-32
관리자(연락처) 여산송씨 지신공파 천곡종중

 

 

▼ 충렬사(忠烈祠)에서 송상현(宋象賢) 묘소로 가는 길... 네비를 잘 따라가야 헷갈리지 않는다.

 

▼ 충렬사(忠烈祠) 홍살문

 

▼ 원래의 충렬묘(忠烈廟) 

 

▼ 충렬사(忠烈祠)에서 바라본 안산 

 

▼ 충렬사(忠烈祠)에 안내되어 있는 단제사, 사제사 제향인물... 임란 때 공을 세운 분들의 제향을 적어 놓은 것으로 보인다.

 

▼ 새로 지은 충렬사(忠烈祠) 원경...

 

▼ 충렬사(忠烈祠) ... 영정이 모셔져 있는데 커튼으로 가려져 있다.

 

▼ 충렬공(忠烈公) 송상현(宋象賢) 선생의 기념관(천곡기념관)

 

▼ 충렬공(忠烈公) 송상현(宋象賢) 선생이 동래성 전투에서 왜군과 말이 통하지 않아 판에 글을 써서 대화를 했다고 한다.  이때 왜장이 남문 밖에 목패(木牌)를 세우고는 “싸우고 싶으면 싸우고, 싸우고 싶지 않으면 길을 빌려라(戰則戰矣 不戰則假道)” 하자 이때 부사인 송상현이 “싸워 죽기는 쉬우나 길을 빌리기는 어렵다(戰死易 假道難)”고 목패에 글을 써서 항전할 뜻을 천명하였다.

 

▼ 임진왜란 경과도...

 

▼ 충렬공(忠烈公) 송상현(宋象賢) 선생이 남긴 글... 전사이 가도난(戰死易 假道難): “싸워 죽기는 쉬우나 길을 빌리기는 어렵다”

고성월훈 열진고침(孤城月暈 列陣高枕), 군신의중 부자은경(君臣義重 父子恩輕): "‘외로운 성에 달무리 지고, 여러 진들은 단잠에 빠져있네. 군신의 의가 중하니, 부모의 은혜는 오히려 가볍다." 천곡기념관에 나와있는 해설이 제일 맘에 들어 이것으로 쓴다. 다른데에 나와있는 해설에는 고침을 높은 베게로 표현했는데 말이 안맞다.  <독자분께서 지적해 주셨는데 설명문 중에 孤城月暈의 표기가 고성월훈이 되어야 한다고 해서 수정함.>

 

 

▼ 충렬공(忠烈公) 송상현(宋象賢) 선생 어록, 군신의중 부자은경(君臣義重 父子恩輕)

 

▼ 충렬사(忠烈祠) 입구에 세워진 열녀문, 정려문...

 

▼ 충렬사(忠烈祠) 입구에 세워진 송상현 선생의 신 신도비

 

▼ 충렬공(忠烈公) 송상현(宋象賢) 묘역 안내도... 주차장에 세워져 있다.

 

▼ 청주 송상현 묘소 및 신도비(충청북도 기념물 제66호)

 

▼ 충렬공(忠烈公) 송상현(宋象賢) 신도비

 

▼ 충렬공(忠烈公) 송상현(宋象賢) 묘소 오르는 길...

 

▼ 동래부사(東萊府使) 충렬공(忠烈公) 송상현(宋象賢) 묘역(墓域) 

 

▼ 충렬공(忠烈公) 송상현(宋象賢) 묘... 앞쪽의 두 묘는 첩실인 한소사 금섬, 이소사 양녀의 묘와 단이다.

 

▼ 충렬공(忠烈公) 송상현(宋象賢) 묘 전경

 

▼ 충렬공(忠烈公) 송상현(宋象賢) 묘... 상당히 높은 곳에 위치하여 바람이 무서운데 국세가 잘 갖춰져 있어서 바람이 별로 없다.

 

▼ 충렬공(忠烈公) 송상현(宋象賢) 묘... 상석에 표기를 하였는데 별도 묘비가 있다. 묘비는 후에 세운 듯 보인다.

 

▼ 충렬공(忠烈公)천곡(泉谷)송선생(宋先生)지묘(之墓)

 

▼ 충렬공(忠烈公) 송상현(宋象賢) 묘비... 전면에만 글자가 새겨져 있고 다른 면에는 아무 내용이 없다.

 

▼ 충렬공(忠烈公) 송상현(宋象賢) 묘 청룡 석물

 

▼ 충렬공(忠烈公) 송상현(宋象賢) 묘 백호 석물

 

▼ 충렬공(忠烈公) 송상현(宋象賢) 묘 입수룡

 

▼ 충렬공(忠烈公) 송상현(宋象賢) 묘 후경... 사격이 좋아 보인다.

 

 

충렬공(忠烈公) 송상현(宋象賢)의 주변인물

한금섬(韓金蟾)
 

한금섬(韓金蟾)은 통천군수 한언성의 서녀로 일찍이 기생이 되었다. 송상현이 함경도 경성판관으로 있을 때 그의 첩이 되어 동래로 따라왔으며, 미모와 재주가 뛰어났다고 한다. 동래성 전투 때에 송상현이 조복을 가져가는 것을 보고, 여종 금춘(今春)과 함께 관아의 담을 넘어 송상현 곁에 달려갔다가 왜적에게 사로 잡혔다. 그 뒤 사흘 뒤까지도 꾸짖는 소리가 그치지 아니하자 왜적에게 살해되었다. 지금은 충북 청주시 흥덕구 수의동 동래부사송상현 충렬사 동문 밖에 별도 사당이 만들어져 있으며, 송상현의 묘 옆에 묻혀있다.


이양녀(李良女) 
송상현의 또 다른 첩인 이양녀는 금섬보다 젊은데, 동래성 전투에서 왜적들이 사로잡아 범하려 하자 그들을 달래어 거절하였다. 왜인들이 절부로 칭찬하고, 일본에 끌려갔는데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양녀를 후시미 성에 살게 하고, 일본인 부녀들의 스승으로 삼아 풍기를 지도하게 했다. 일본인 부녀 중에는 뒷날에도 막부를 세운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처도 있었는데, 임진왜란 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조선과 화해하는데 그 처가 큰 조력을 하였다 한다. 마침내 살아서 고국으로 돌아왔고, 송상현 부사의 정부인과 청주에서 만나 손잡고 통곡했다 한다.<위키백과>
 

 

▼ 충렬공(忠烈公) 송상현(宋象賢) 묘 아래쪽에 있는 한소사 금섬 묘... 처음에는 한소사와 이소사가 같은 봉문에 있었다고 하는데 최근에 후손들이 둘이 같이 있는 것은 보기에 좋지 않다고 하여 분리했다 한다.

 

 

▼ 첩실인 이소사 양녀 단...

 

728x90
반응형
Posted by 이방인야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