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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앙정(俛仰亭) 송순(宋純) 묘

 

담양에는 우리나라 가사문학의 인물들이 태어나고 활동하던 무대가 그곳에 모여있다. 그래서 한국가사문학관을 열어 가사문학의 본고장임을 천명하고 있다. 무엇보다 가장 두드러진 것은 행정구역상 면 이름을 아예 가사문학면으로 지어 부르고 있다. 이는 영월군이 김삿갓면, 한반도면 등으로 개명한 것과 같은 방식으로 보인다.

이곳을 지난 2003년경 맘 먹고 담양 가사문학 누각들을 하나하나 찾아서 다닌 적이 있었는데 그로부터 약 18년이 지나서 다시 찾았다. 이유는 면앙정 송순선생 묘를 찾기 위해서 였다. 조금 늦은 시간에 이곳에 도착하다보니 시간이 촉박하여 면앙정도 못가고 바로 묘소로 향했다. 전날 내린 눈으로 산길이 걱정 되었는데 눈은 거의 다 녹았고 오히려 진흙이 되어 자동차가 흙으로 범벅이 되었다. 답사를 할 때는 으례히 이 정도의 흙범벅은 감수하는데 답사 기간 내내 이 상태로 다녀야 해서 남들에게는 별로 보여주고 싶은 맘이 없게 된다.

 

송순의 면앙정...문화재청에서 옮겨옴

송순선생 묘는 사전에 충분히 도상 분석을 한 상태로 찾았기 때문에 찾는데 어려움은 없었다. 아늑한 곳에 맨 위에는 부친 송태, 중앙에 송순, 맨 밑에 묘표가 없는 묘가 한 기 있다. 이 묘는 인터넷에서 자료를 종합해 보니 아들 송해관으로 나온다. 그러나 정확한 자료는 제가 확인해 보지 못했다.

송순 묘역에는 망주석, 묘표만 있고 부친 묘에는 신도비 형태의 묘비가 세워져 있다. 이들 묘역에는 그 흔한 문인석이 안 보인다. 부친 묘비는 홍섬이 찬(撰)하고 퇴계 이황이 글씨를 쓴 비석이라 해서 유명하다. 요즘에는 핸드폰 카메라가 좋아서 예전 DSRL 카메라는 거의 가지고 다니지 않는데 이런 때 카메라 성능이 좋았다면 글씨 한 자 한 자 다 해독이 가능했을텐데 아쉽다. 그래도 대강은 보이니 그것만으로 만족해야지...

송순 묘표에는 앞쪽에는 용 2마리를 표현했고, 뒤쪽에는 달을 그려넣고 그 안에 토끼가 절구질을 하는 일명 옥토끼를 새겨 넣었다. 조금은 특이한 형태의 묘표다. 몇 군데 묘표에서 유사한 형태를 보긴 했는데 지금 기억이 안난다.

담양군에서 이곳 묘역에 있는 석물들에 대해 별로 중요하다고 생각을 안 했는지 문화재로 지정이 안 되어 있다.

묘역은 양명하고 멀리 무등산을 조산으로 좌향을 정했는데 사격이 잘 두르고 있어서 편안해 보인다. 그런데 앞쪽 명당이 너무 넓어 흠이 된다. 묘역 앞으로는 물이 흘러내지 않도록 저수지를 두었는데 비보성격이 강하다.

 

면앙정(俛仰亭) 송순(宋純)

 

본관은 신평(新平). 자는 수초(遂初) 또는 성지(誠之), 호는 기촌(企村) 또는 면앙정(俛仰亭). 담양 출신. 증 이조판서송태(宋泰)의 아들이다.
1519년(중종 14)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승문원권지부정자를 시작으로 1520년(중종 15) 사가독서(賜暇讀書)를 마친 뒤, 1524년(중종 19)세자시강원설서(世子侍講院說書)가 되고 1527년(중종 22)사간원정언이 되었다. 1533년(중종 28)김안로(金安老)가 권세를 잡자, 귀향하여 면앙정을 짓고 시를 읊으며 지냈다.
송순은 1537년(중종 32)김안로가 사사된 뒤 5일 만에 홍문관부응교에 제수되고, 다시 사헌부집의에 올랐다. 이어 홍문관부제학, 충청도어사 등을 지냈고, 1539년(중종 34)승정원우부승지에 올라 4월 명나라의 요동도사(遼東都司)가 오자 선위사가 되어 서행(西行)하였다.
그 뒤 경상도관찰사·사간원대사간 등의 요직을 거쳐 50세 되던 해인 1542년(중종 37)윤원형과 황헌(黃憲) 등에 의하여 전라도관찰사로 좌천되었다. 1547년(명종 2)에는 동지중추부사가 되어 『중종실록』을 찬수하였다. 그해 5월에 주문사로 북경에 다녀와 개성부유수가 되었다.
1550년(명종 5) 대사헌·이조참판이 되었으나, 진복창(陳福昌)과 이기(李芑) 등에 의하여 사론(邪論: 도리에 어긋난 논설)을 편다는 죄목으로 충청도 서천으로 귀양 갔다. 이듬해에 풀려나 1552년(명종 7)선산 도호부사가 되고, 이 해에 면앙정을 증축하였다.
이 때 기대승이 「면앙정기」를 쓰고 임제(林悌)가 부(賦)를 쓰고, 김인후(金麟厚)·임억령(林億齡)·박순(朴淳)·고경명(高敬命) 등이 시를 지었다. 이후 전주부윤과 나주목사를 거쳐 1562년(명종 17) 70세의 나이로 기로소(耆老所 : 조선시대에, 70세가 넘는 정이품 이상의 문과들을 예우하기 위하여 설치한 기구)에 들고, 1568년(선조 1)한성부좌윤이 되어, 『명종실록』을 찬수하였다.
이듬해 한성판윤으로 특별 승진하고 이어 의정부우참찬이 된 뒤, 벼슬을 사양하여 관직생활 50년 만에 은퇴하였다. 송순은 성격이 너그럽고 후하였으며, 특히 음률에 밝아 가야금을 잘 탔고, 풍류를 아는 호기로운 재상으로 일컬어졌다.
일찍이 박상(朴祥)과 송세림(宋世琳)을 사사하였고, 교우로는 신광한(申光漢)·성수침(成守琛)·나세찬(羅世纘)·이황(李滉)·박우(朴祐)·정만종(鄭萬鍾)·송세형(宋世珩)·홍섬(洪暹)·임억령 등이 있다. 문하 인사로는 김인후·임형수(林亨秀)·노진·박순·기대승·고경명·정철(鄭澈)·임제 등이 있다.
면앙정은 그가 41세 되던 해인 1533년(중종 28) 담양의 제월봉 아래에 세운 정자로서 호남 제일의 가단(歌壇)을 형성하였다. 여기에는 임제·김인후·고경명·임억령·박순·이황·소세양(蘇世讓)·윤두수(尹斗壽)·양산보·노진 등 많은 인사들이 출입하며 시 짓기를 즐겼다.
면앙정가단은 그 후에 나타난 호남의 성산가단(星山歌壇), 영남의 경정산가단(敬亭山歌壇)·노가재가단(老稼齋歌壇) 등의 선구이며, 영남의 가단이 전문 가객 중심이라면 면앙정가단은 사대부 출신의 문인 가객이 중심이었다.
특히 송순은 벼슬에서 물러나 강호생활을 하면서 자연예찬을 주제로 한 작품을 지음으로써 강호가도의 선구자적 역할을 하였으며, 「면앙정삼언가」·「면앙정제영(俛仰亭題詠)」 등 수많은 한시(총 505수, 부1편)와 국문시가인 「면앙정가」 9수, 「자상특사황국옥당가(自上特賜黃菊玉堂歌)」·「오륜가」 등 단가(시조) 20여 수를 지어 조선 시가문학에 크게 기여하였다.
문집으로는 『면앙집(俛仰集)』이 있다. 담양 구산사(龜山祠)에 신주가 모셔졌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인용>

 

문화재지정

미지정

문화재명칭

면앙정(俛仰亭) 송순(宋純) 묘

소재지

전남 담양군 봉산면 기곡리 산 200-16(네비 기곡리 643찍고 끝까지 가서 묘역 앞에 주차)

관리자(연락처)

신평송씨(新平宋氏)

 

▼ 면앙정(俛仰亭) 송순(宋純) 묘역

▼ 면앙정(俛仰亭) 송순(宋純) 묘역... 중앙이 송순 선생 묘다.

▼ 송순(宋純) 묘역 입구에 신평송씨5세사단사적비가 세워져 있다.

▼ 송순(宋純) 묘역 전경...

▼ 송순(宋純) 묘역

 

▼ 송순(宋純) 묘 망주석... 문인석은 없다. 

▼ 송순(宋純) 묘역... 묘역 경사가 심하고 제절 폭이 좁다보니 상석 놓을 자리가 부족하다. 향로석은 단 아래에 놓였다.

▼ 송순(宋純) 묘표

▼ 송순(宋純) 묘표

▼ 송순(宋純) 묘표.... 전면

▼ 송순(宋純) 묘표... 후면

▼ 송순(宋純) 묘역...멀리 무등산이 보인다. 묘역을 빙둘러 나성(羅城)이 감싸고 있다. 명당이 너무 넓어 기운이 흩어진다. 앞쪽에 나무를 식제한 것은 잘한 일이다. 그곳에 후손 묘가 조성되어 있다.

▼ 송순(宋純) 부친 송태(宋泰) 묘

▼ 송태(宋泰) 묘표

▼ 송태(宋泰) 묘 망주석

▼ 송태(宋泰) 묘비... 

▼ 송태(宋泰) 묘비... 홍섬이 찬하고 퇴계 이황이 글씨를 썼다.

▼ 송태(宋泰) 묘 후경...

 

▼ 송순(宋純) 묘 제일 아래쪽에는 송순의 아들 송해관의 묘라고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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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방인야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