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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작 홍사용 묘역(露雀 洪思容 墓域)

 

노작홍사용문학관을 방문한지는 대략 10년 정도 지난 것 같다. 블로그에 보니 2012년도에 글을 올린게 보인다. 그런데 그때 어떤 연유로 홍사용 묘를 답사했는지 기억이 없다. 아마도 다른 곳 답사하면서 우연히 발견하고 들어가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래서인지 묘역만 보고 문학관은 들어가지 않고 지나쳐서 문학관에 대한 기록이 안보인다.

10여년이 지난 뒤 찾은 노작 홍사용 문학관은 맘 먹고 어린 손자 손을 잡고 찾았는데 이번에는 코로나라는 장벽에 막혀 또 문학관을 관람하지 못했다. 이런 것을 보면 얼마전에 운주사 답사기를 쓰면서도 언급했지만 희안하게 그때 못한 것은 10년, 20년이 지나도 매한가지... 유행가 가사 '있을 때 잘해'처럼 시간이 주어졌을 때 최대한 답사를 진행해야 한다. 다음에 오겠다 하고 대충 둘러보고 나오면 다음에도 또 못보게 되는 경우를 여러 번 경험했다.

손주 손을 잡고 홍사용문학관 외부에 있는 작품들과 홍사용 묘역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시간이 많으니 이것 저것 찬찬히 둘러보았는데 늦가을 정취와 어우러져 공원을 산책하는 맛이 괜찮았다. 손주는 나뭇잎을 가지고 연신 즐겁게 놀았는데 혹시나 미끄러지지나 않을까 그 모습도 즐기지는 못했다.ㅎ

홍사용은 일제 강점기 때 많은 문인들이 변절을 했지만 단 한줄의 친일 집필 활동도 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인지 화성시에서 상당히 큰 대지에 문학관을 지어 시인을 기리고 있다. 홍사용의 시는 장시(長詩)가 많고 상당히 난해하여 읽어도 의미가 잘 전달이 안된다. 이상 시인의 오감도와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노작공원에는 그의 대표 시들을 새겨 놓고 홍사용의 사진도 게시되어 있는데 양복 입은 선생의 모습이 무척 잘 생겼다고 느껴진다. 자료 사진을 보니 아들 결혼식 때 춘원 이광수가 주례를 섰던데 그 때 사진을 봐도 상당히 미남이다. 광복 직후에 폐환으로 47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해서 무척 안타깝게 여겨진다.

노작 홍사용 문학관은 동탄 신도시 초입 노작사거리에 있어서 찾기도 쉽고 주차장도 잘 마련되어 있어서 관람하기도 편하다. 나처럼 묘역 위주로 보는 사람도 이런 곳은 환영할 만한 곳이다. 요즘에는 주차장이 제일 중요하다. 주차장이 없으면 주변에 차를 세워놓고 잠깐 다녀온다고 묘역을 오르는데 시간이 만만치 않다보니 본의아니게 주차위반이 되어 딱지를 끊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특히 도심에 있는 묘역이나 문화재 관람 시에 그런 경우가 많다.

노작 홍사용 묘역(露雀 洪思容 墓域)은 반석산 근린공원 북쪽 끝단에 있다. 홍사용문학관 뒷산에 있는데 문학관으로 들어서면 안내판이 잘 되어 있어서 찾는데는 문제가 없다. 묘역은 홍사용과 부인 부인 원주원씨의 합장묘이다. 자료를 찾아보니 이곳에 장사를 지내고 한동안은 봉분만 있을 뿐 아무런 석물도 없었는데 1984년 5월 대표작 《나는 왕이로소이다》의 시비 건립을 계기로 묘역을 정비하면서 묘비, 향로석, 상석 등을 갖추었다 한다.

노작 홍사용 묘역(露雀 洪思容 墓域)은 2002년 12월 3일 화성시의 향토문화재 제14호로 지정되었다가, 2019년 10월 23일 향토문화재(기념물) 제4호로 변경 재분류 되었다. 

노작(露雀) 홍사용(洪思容)

 

본관은 남양(南陽). 호는 노작(露雀), 경기 용인군 기흥면 농서리 용수골에서 아버지 홍철유와 어머니 능성 구씨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경기 용인 및 화성 일대에 많은 농토를 가진 지주였으므로 노작은 어린 시절을 남부럽지 않게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다. 태어난지 100일만에 무관학교 1기생에 합격한 부친을 따라 서울로 상경하였다.
그가 9세 때 부친의 군대가 해산하고 백부 승유의 양자로 들어가면서 본적지인 경기도 화성군 동탄면 석우리(돌모루)로 이사하였다. 그 뒤 부친이 그를 위해 만든 사숙에서 한학을 수학하고 17세에 다시 홀로 상경, 휘문의숙에 입학했다.
휘문의숙 재학시절 동기인 정백, 1년 후배인 박종화 등을 만나 문학수업을 본격적으로 하게 된 그는 3·1운동에 참여했다가 체포되고, 3개월 간의 옥고를 치르고 풀려나 그 해 6월에 고향에 돌아온다. 고향에서 정백과 함께 현량개에 은신하면서 수필과 시를 쓰며 월탄에게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이후 홍사용은 재종형 홍사중을 설득해 ‘문화사’를 설립하고 문예지 《백조》와 사상지 《흑조》를 기획, 《백조》만 간행했으나 3호로 단명하고 말았다.
또한 그는 우리나라 신극운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1923년 근대극 운동의 선구적 극단인 토월회에 가담해 문예부장직을 맡았고 직접 서양극 번역과 번안 그리고 연출도 했다. 1927년에는 박진, 이소연과 ‘산유화회’를 결성하고 1930년에는 홍해성, 최승일과 신흥극단을 조직하기도 했다.
30세 무렵부터 5년간 홍사용은 미투리에 두루마기 차림으로 화류목 단장을 짚고 전국 곳곳을 방랑했다. 1932년 〔불교誌〕에 희곡《벙어리굿》을 발표, 1935년을 전후하여 세검정 근처에 자리 잡고 한의공부를 하여 한동안 한의사로 생계를 유지했다.
1939년 희곡 《김옥균전》을 쓰다가 일제의 검열로 붓을 꺾어버렸다. 그는 이 일로 주거 제한조치를 받기도 했다.
이후 강경·전주 등지에서 교편을 잡았으나 모두 오래 가지 못했으며, 1944년에는 이화전문에 잠시 출강했다. 해방 후 근국청년단에 가입, 청년운동을 전개하려 하였으나 지병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47년 1월 5일 (음력 1946년 12월 14일) 폐환으로 별세했다.<홍사용기념관 홈페이지에서 인용>

노작홍사용문학관

 

근대 낭만주의 문학과 신극운동을 이끈 노작 홍사용 선생의 문학사적 업적을 두루 발굴하고 계승하기 위해 건립된 노작홍사용문학관은 2010년 3월 개관 이래 시민 모두가 쉽게 찾을 수 있는 쉼터이자 문화충전소로 자리매김 해왔다.
작지만 내실 있는 공간 구성과 콘텐츠로써 시민의 사랑을 받아온 노작홍사용문학관은 관내에 위지한 문학전문도서관으로써, 지역민들과 문학 애호가, 작가 지망생들이 문학적 감수성과 교양을 쌓고 창작 역량을 높이는데 기여하고 있다.
2011년 추진한 산유화극장 리모델링 사업을 통해 소규모 연극 공연과 각종 강좌가 가능한 다기능 문화공간으로 거듭난 노작홍사용문학관은 산유화극장, 강의실 등 시설 대관을 통해 지역사회에 문화예술 활동을 적극 장려하였고 문예프로그램과 시민 동아리, 노노카페 등을 운영하며 시민들의 다양한 문화적 욕구에 부응하고 있다.
<노작홍사용문학관에서 인용>

 

문화재지정

향토문화재(기념물) 제4호

문화재명칭

노작 홍사용 묘역(露雀 洪思容 墓域)

소재지

경기도 화성시 석우동 64

관리자(연락처)

화성시청

 

▼ 노작 홍사용 문학관... 코로나로 인해 휴관 중이다.

▼ 노작 홍사용 문학관과 노작공원, 홍사용 묘지까지 한 곳에 모여있다.

▼ 노작 홍사용 문학관

▼ 노작 홍사용 문학관

 

나는 王이로소이다 
홍사용 詩

 
나는 왕(王)이로소이다. 나는 왕(王)이로소이다. 어머니의 가장 어여쁜 아들, 나는 왕(王)이로소이다. 가장 가난한 농군의 아들로서…… 
그러나 시왕전(十王殿)에서도 쫓기어 난 눈물의 왕이로소이다.
 
“맨 처음으로 내가 너에게 준 것이 무엇이냐?” 이렇게 어머니께서 물으시면은 
“맨 처음으로 어머니께 받은 것은 사랑이었지요마는 그것은 눈물이더이다” 하겠나이다. 
다른 것도 많지요마는…… 
“맨 처음으로 네가 나에게 한 말이 무엇이냐?” 이렇게 어머니께서 물으시면은 
“맨 처음으로 어머니께 드린 말씀은 ‘젖 주세요’ 하는 그 소리었지요마는, 
그것은 ‘으아’하는 울음이었나이다” 하겠나이다. 다른 말씀도 많지요마는……
  
이것은 노상 왕(王)에게 들리어 주신 어머니의 말씀인데요. 
왕(王)이 처음으로 이 세상(世上)에 올 때에는 어머니의 흘리신 피를 몸에다 휘감고 왔더랍니다. 
그날에 동내(洞內)의 늙은이와 젊은이들은 모두 “무엇이냐?”고 쓸데없는 물음질로 한창 바쁘게 오고 갈 때에도 
어머니께서는 기꺼움보다도 아무 대답도 없이 속 아픈 눈물만 흘리셨답니다. 
발가숭이 어린 왕(王) 나도 어머니의 눈물을 따라서 발버둥질치며 “으아―” 소리쳐 울더랍니다.
 
그날 밤도 이렇게 달 있는 밤인데요, 
으스름달이 무리 서고 뒷동산에 부엉이 울음 울던 밤인데요, 
어머니께서는 구슬픈 옛이야기를 하시다가요 일없이 한숨을 길게 쉬시며 웃으시는 듯한 얼굴을 얼른 숙이시더이다. 
왕(王)은 노상 버릇인 눈물이 나와서 그만 끝까지 섧게 울어 버렸소이다. 울음의 뜻은 도무지 모르면서도요. 
어머니께서 조으실 때에는 왕(王)만 혼자 울었소이다. 
어머니의 지우시는 눈물이 젖 먹는 왕(王)의 뺨에 떨어질 때에면, 왕(王)도 따라서 시름없이 울었소이다.
 
열한 살 먹던 해 정월(正月) 열나흗날 밤, 맨잿더미로 그림자를 보러 갔을 때인데요, 명(命)이나 긴가 짧은가 보려고 
왕(王)의 동무 장난꾼 아이들이 심술스럽게 놀리더이다. 모가지 없는 그림자라고요
왕(王)은 소리쳐 울었소이다. 어머니께서 들으시도록 죽을까 겁이 나서요.
 
나무꾼의 산타령을 따라가다가 건넛산 비탈로 지나가는 상두군의 구슬픈 노래를 처음 들었소이다. 
그 길로 옹달우물로 가자면 지름길로 들어서면은 찔레나무 가시덤불에서 처량히 우는 한 마리 파랑새를 보았소이다. 
그래 철없는 어린 왕(王) 나는 동무라 하고 쫓아가다가 돌부리에 걸리어 넘어져서 무릎을 비비며 울었소이다.
 
할머니 산소 앞에 꽃 심으러 가던 한식(寒食)날 아침에 
어머니께서는 왕(王)에게 하얀 옷을 입히시더이다. 그러고 귀밑머리를 단단히 땋아 주시며 
“오늘부터는 아무쪼록 울지 말아라.” 
아아, 그 때부터 눈물의 왕(王)은! 
어머니 몰래 남모르게 속 깊은 소리없이 혼자 우는 그것이 버릇이 되었소이다. 
누우런 떡갈나무 우거진 산길로 허물어진 봉화(烽火)둑 앞으로 쫓긴 이의 노래를 부르며 어슬렁거릴 때에, 바위 밑에 돌부처는 모른 체 하며 감중련(坎中連)하고 앉았더이다. 
아야, 뒷동산 장군(將軍)바위에서 날마다 자고가는 뜬구름은 얼마나 많이 왕(王)의 눈물을 싣고 갔는지요.
 
나는 왕(王)이로소이다. 어머니의 외아들 나는 이렇게 왕(王)이로소이다. 
그러나 그러나 눈물의 왕(王)! 이 세상(世上) 어는 곳에든지 설움 있는 땅은 모두 왕(王)의 나라로소이다.
 
『白湖』3호, 1923년 9월
<나는 왕이로소이다. 전문을 홍사용문학관 노작공원 시비를  보고 직접 기록하다>

 

▼ 노작 홍사용 문학관 앞에 있는 노작공원에는 홍사용의 시비를 여러개 세워 놓았다. 

▼ 노작공원에 있는 홍사용 사진과 노작 홍사용문학관에 전시된 홍사용아들 결혼식 장면... 미남으로 생겼다.

1939년 2월. 장손 홍규선씨의 결혼기념 사진입니다. 맨 뒷줄 왼쪽에서 세 번째가 노작선생님이며 그 옆이 주례 춘원 이광수입니다. 앞줄 오른쪽 세 번째는 원씨 부인입니다.

▼ 노작공원에 있는 작가연보와 작품연보

▼ 노작 홍사용 묘역으로 올라가는 길에서 바라본 노작 홍사용문학관

▼ 노작 홍사용 묘역으로 올라가는 길에 가을이 물씬 물들었다.

▼ 노작 홍사용 묘역 입구

▼ 노작 홍사용 묘역 입구

▼ 노작 홍사용 묘역 원경

▼ 노작 홍사용 묘역 전경

▼ 노작 홍사용 묘역 안내문... 문화재 지정번호가 최근에 바뀌었다. 향토문화재(기념물) 제4호로 바뀜...

▼ 노작 홍사용 묘역 전경

▼ 노작 홍사용 묘역에 나뭇잎이 많이 떨어져 있다.

▼ 노작 홍사용 묘역에 세워진 홍사용 시비

▼ 노작 홍사용 묘역 근경

▼ 노작 홍사용 묘역 묘비

▼ 노작 홍사용 가계도...

▼ 노작 홍사용 묘역 입수룡

▼ 노작 홍사용 묘역 후경... 손주가 함께 사진에 들어왔다. 나뭇잎을 가지고 노는데도 눈길을 다른데 돌릴 수가 없었다.

▼ 노작 홍사용 묘역 측경... 상당히 쓸쓸하게 보인다. 그래도 문학관과 함께 지근거리에 있으니 탐방객들이 자주 방문해서 조금은 낫다. 이육사 묘는 문학관에서 1시간 반이상을 산으로 올라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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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방인야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