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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산(甑山) 강일순(姜一淳) 묘

 

일이 있어 김제를 방문했다. 전라남도, 북도 지역은 왠만한 곳은 이제 돌아본듯 한데 아직도 낯선 곳이 몇군데 있다. 그중에 한 곳이 김제지역이다. 김제는 평야지대이다보니 풍수문화답사에서도 자주 찾지 못하는 곳이고 오며가며 들렀다 갈만한 곳이지만 발걸음이 바쁘다보니 이곳은 지나치기 십상이다. 

지난 해 남도답사를 할 때 김제지역을 답사하고자 계획에 넣었었지만 돌아오는 길에 급한 일이 생겨 그때도 또 지나쳤다. 이번에 마침 김제에 볼일이 있어서 김제를 맘 먹고 답사하기로 하고 서울에서 새벽에 출발하여 금산사로 향했다.

금산사에 너무 이른 시간에 도착해서 시간을 보내려고 찾은 곳이 이곳 강증산 묘이다. 처음에는 묘를 아무리 찾아도 안보여서 없는 줄 알았는데 차근차근 영대로 오르면서 보니 영대 건물 안에 강증산 내외분을 모신 묘가 있었다.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시각에 찾아 묘역 안쪽은 신성시 하는 곳이라 둘러보지 못하고 묘역 바깥으로만 두서바퀴 돌면서 기원도 드리고 기운도 느껴보았다.
이곳은 오리알터로 알려져 있어서 그 내력을 알아보았다. 이곳 모악산 아래 금평저수지가 자리 잡고 있는 곳을 이곳 사람들은 ‘오리알 터’라고 부른다. 하지만 오리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다. ‘올(來) 터’라는 뜻인데 ‘올터’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오리터’로 다시‘오리알터’가 됐다고 한다. ‘천하우주의 모든 기운이 이곳으로부터 나온다’는 의미라고 한다. 즉 이곳에 메시아가 온다는 의미인데 강증산이 나왔다고 믿는 곳이다. 
영대 앞에서 모악산 주변 산을 바라보니 산세가 멋있다. 앞쪽에는 금평저수지가 펼쳐진 곳이고 청룡쪽에 제비산(帝妃山)이 있다. ‘황제의 아내 산’이란 뜻이란다. 

이 일대는 신흥종교 천국이라 할 정도로 많은 종교시설이 눈에 띈다. 차를 타고 지나치기만 해도 많은 종교시설들이 눈에 들어온다. 금산사를 비롯 금산교회, 원불교, 증산법종교, 인근의 수류천주교회 등 많은 종교시설과 강증산이 의술을 펼쳤던 동곡약방도 인근에 있다.

 

증산(甑山) 강일순(姜一淳)
 
본관은 진주. 자는 사옥(士玉), 호는 증산(甑山).
〈대순전경 大巡典經〉에 의하면 그의 어머니 권씨는 하늘이 남북으로 갈라지며 큰 불덩어리가 내려와서 몸을 덮으니 온천하가 광명하여지는 꿈을 꾸고 나서 잉태했으며, 13개월 만에 그를 낳았다. 또 출산 때는 그의 아버지가 하늘에서 두 선녀가 내려와 산모를 간호하는 것을 보았는데, 이상한 향기가 온 집안에 그득하고 밝은 기운이 집을 둘러 하늘로 뻗쳐오르는 현상이 7일이나 계속되었다.
태어난 아기의 용모에는 위의(威儀)가 서려 있고 양미간에는 불표(佛表)가, 왼손바닥에는 별 무(戊)자가, 아래 입술에는 붉은 점이 있었다. 그는 몰락한 양반의 집안에서 태어났기에 대단히 가난하여 일찍이 학업을 중단했다.
21세에 절름발이인 부인과 결혼하여 한동안 처남의 집에 서당을 차리고 훈장생활을 했다. 이당시 그의 학문은 높은 경지에 올라 한학은 물론 유·불·선의 여러 경전과 음향·풍수·복서·의술 등에 막힘이 없었다.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농민군을 따라다녔으나 싸움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오히려 참여한 사람들에게 이 싸움은 실패할 것이니 집으로 돌아가라고 충고했다. 동학혁명이 끝난 후의 사회적 참상과 혼란을 목격한 그는 국가와 민족, 세계와 인류를 구원할 새로운 천지의 대도를 얻고자 결심했다. 이후 그는 1897년부터 3년간 세상의 실상을 알기 위해 전국을 돌아다녔는데, 이 기간에 충청남도 비인(庇人) 사람인 김경흔(金京訢)으로부터 증산교의 중요주문이 된 태을주(太乙呪)를 얻었으며, 연산(連山)에서는 김일부(金一夫)를 만나 주역(周易)에 관한 지식을 얻었다.
특히 김일부는 〈정역〉을 저술하여 조선 후기 신종교에 거의 예외없이 나타나는 후천개벽의 이론적 틀을 세운 사람인데, 그와의 만남은 강일순의 사상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증산은 이처럼 여러 종교의 교리에 몰두하는 한편 이보(耳報)와 영안(靈眼) 등 초능력을 배우기도 하고, 선후천(先後天)의 천기변화를 가늠하며 국제정세와 동서의 문화형태에 깊은 관심을 갖기도 했다. 이러한 구도기간중 그는 전혀 직업을 갖지 않고 방랑하며 이따금 기이한 능력을 보여 광인이나 기인 취급을 받기도 했다.

그는 모든 일을 자유자재로 할 권능을 얻지 않고는 뜻을 이룰 수 없음을 깨닫고 31세(1901) 때 전주 모악산 동편 대원사(大院寺)에 들어가 수개월 간 송주(頌呪)하며 기도와 이적을 행했다.
그러던 중 6월 선정(禪定)에 들어가 9일 만인 7월 5일 홀연 오룡광풍(五龍狂風)하는 가운데 탐음진치(貪淫瞋癡)의 사종마(四種魔)를 물리치고 광명혜식(光明慧識)이 열리며 천지의 현법(現法)을 깨달았다. 이후 그는 1909년 화천(化天)할 때까지 7년간 모악산을 중심으로 포교하며 여러 차례 천지공사를 수행했다.
천지공사라는 것은 구천상제(九天上帝)인 강일순이 이 세상에 내려와 인간계와 신명계의 모든 원한들을 해원시키고 우주의 운행질서인 천지도수(天地度數)를 고쳐 후천선경의 토대를 마련하는 작업이었다.
강일순이 화천할 때까지 그를 따르던 종도(宗徒)는 최초의 종도인 김형렬(金亨烈)을 비롯하여 모두 64명이었다. 강일순은 1909년 자신의 화천을 미리 예언한 다음 미래에 다가올 괴병을 극복할 수 있는 비법인 의통(醫統)을 전한 후 8월에 화천했다. 이후 그는 교단의 창시자로서 뿐만 아니라 절대자 또는 상제로서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저서로 후천세계를 예언한 〈현무경 玄武經〉이 있다.<다음백과>


증산교(甑山敎)

 
1902년 강일순(姜一淳)이 창시한 종교.
일반적으로는 그로부터 갈라진 교파들을 통틀어 일컫는다. 창시자의 호를 따라 증산교라고 부르지만, 일제강점기에는 신도들이 외는 주문인 태을주(太乙呪)가 “훔치훔치…….”로 시작하는 것을 본떠 훔치교(吽哆敎)라고도 하였다.
이 종교는 동학과 더불어 우리 나라 신종교 가운데 하나의 큰 산맥을 이루고 있으며, 전통적인 종교유산을 거의 모두 간직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학자들에 따라서는 한국사상의 원류인 단군사상이 신라의 화랑도(花郎道), 고려의 팔관회(八關會), 조선의 선비도, 조선 후기의 동학을 거쳐 증산교의 사상으로 연결되는 것으로 분석하기도 한다.

창시자 강일순은 몰락한 양반집안에서 태어나, 비교적 윤택한 집안의 여자와 결혼한 후 처남집에서 훈장노릇을 했다고 한다. 갑오농민전쟁 때는 동학군을 따라다녔지만 전쟁의 실패를 예언하고 직접 전쟁에 참가하지는 않았다. 전쟁이 끝난 다음 3년 동안 전국을 순회하며 사회의 실상과 민중의 생활을 살핀 후 민심을 수습함에 있어 갑오농민전쟁과 같은 인간의 인위적인 힘이나 지역을 기반으로 형성된 기성종교로서는 역부족임을 깨닫고, 1901년 전주 모악산에 들어가 도를 닦기 시작하여 그해 7월 5일 성도했다.
1902년부터는 그를 따르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훈화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고통 속에 있는 민중을 구원하기 위해 하늘·땅·인간의 삼계대권을 가지고 이땅에 금산사 미륵불로 강림했다고 했다. 또 세상의 혼란을 괴질로 비유하고 자신이 세상의 모든 병을 대속했으나 오직 괴병만은 남겨두었다고 했는데, 예언과 병든 세상을 고치는 의통을 세상구원의 수단으로 삼았다.
당시 그를 추종하던 사람들은 천지개벽을 통한 지상선경이 하루 빨리 도래되기를 바라고 있었으나 1909년 그가 죽자 그의 허망한 죽음을 보고 대부분 장례식조차 참석하지 않고 해산해버렸다고 한다. 그런데 2년 뒤 강일순의 아내였던 고부인이 갑자기 졸도한 후에 강일순과 비슷한 언행을 하게 되었다. 이에 뿔뿔이 흩어졌던 제자들은 강일순의 영이 고부인에게 강림했다 하여 다시 모이게 되었다. 그리하여 최초의 교단인 선도교가 형성되었다.
이 교단의 교세가 확장되자 강일순의 추종자였고 고부인의 이종사촌 동생인 차경석이 고부인과 신자들의 접촉을 차단하고 교권을 장악하여 교명을 보천교로 바꾸었다. 그러자 강일순의 추종자들은 그의 법통성을 부정하고 각자가 교통을 받았다 하여 새로이 교단을 만들어 분리해 나갔다. 고부인의 태을교, 김형렬(金亨烈)의 미륵불교, 안내성의 증산대도교 등의 교단이 그것이다.

일제강점기에 한때 100여 개에 이르던 교단이 일제의 종교탄압에 의해 해산되기도 하고, 지하화되었다가 해방 이후 새로이 흥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통성을 주장하는 많은 증산교단이 발흥하여 난맥을 이루었으며, 일부에서는 교단통합운동을 펴기도 했으나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증산교로서 최대 종단인 대순진리회는 1972년부터 종단 3대기본사업을 포덕·교화·수도로 정하고, 주요사업으로 구호자선·사회복지·교육사업 등을 확대해 왔다. 그러나 대순진리회를 이끌던 교주 박한경이 1996년 1월 사망한 뒤, 교단이 깊은 분열의 양상을 보이면서 신도들도 박한경이 세웠던 서울 광진구 중곡동의 도장과 여주본부도장 등으로 나뉘어졌고, 그 아래 많은 유파로 분리되어 통합된 규모를 확인하기 어렵게 되었다. <다음백과에서 발췌>

 

문화재지정 국가등록문화재 제185호
문화재명칭 영대(靈臺)-증산(甑山) 강일순(姜一淳) 묘
소재지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모악로 260
관리자(연락처) 증산법종교(甑山法宗敎) 본부

 

▼ 증산(甑山) 강일순(姜一淳) 묘가 있는 증산법종교 본부 안내도

▼ 증산법종교 본부

 

증산법종교(甑山法宗敎)

 

1937년 강순임(姜舜任)이 창시한 증산교(甑山敎) 계열의 신종교.
한때는 증산향원(甑山享院)·선불교(仙佛敎)·증산선불교(甑山仙佛敎)라고도 하였다. 강순임은 증산교의 창시자 강일순(姜一淳:호는 甑山)의 무남독녀로 13세에 출가, 한때 증산교의 한 교파인 태극도(太極道)를 세운 조철제(趙哲濟)에게 의탁하기도 하였다.
1937년 그녀는 신도 김병철(金炳澈)과 함께 조철제를 떠나 전주에서 독자적인 포교활동을 하다가 경상북도 의성으로 이주, 금성산(金城山)과 장대골[長大谷]을 중심으로 포교하였다.
8·15광복 후 전라북도 김제군 금산면 청도리로 교단본부를 옮기고 교명을 증산향원이라고 하였다. 1948년 강순임은 강일순의 묘를 자신의 교당으로 이장하여 영대(靈臺)를 건축하고 교단의 정통성을 주장하였다.
1953년 이 교단은 증산선불교라는 교명으로 문교부에 종교단체등록을 하였으며, 1961년에는 문교부의 국산종교통합계획에 의하여 동도교법종교회(東道敎法宗敎會)로 교명을 바꾸었다.
그 뒤 다시 현재의 증산법종교로 교명을 바꾸었다. 한때는 신도 수가 10만여 명에 이르렀으나, 현재는 24개 교당에 약 1,000명 정도에 불과하다.
신앙의 대상은 삼계대도사(三界大導師) 증산미륵 부처님, 숭배대상은 삼환(三桓:桓人·桓雄·桓儉)·수운대신사(水雲大神師)이고, 교의(敎義)는 천지공사(天地公事), 의세이념(醫世理念)은 상생(相生)·해원(解寃)·보은(報恩)이다.
수훈각명(垂訓刻銘)은, ① 마음을 속이지 말라, ② 척 짓지 말라, ③ 언덕(言德)을 잘 가지자, ④ 남 잘되게 하자, ⑤ 반반(半飯)의 은(恩)도 필보(必報)하자, ⑥ 신구의(身口意)로 지은 죄를 회개하자, ⑦ 천지에 대한 성경신(誠敬信)을 다하자 등이다. 경전으로는 ≪대순전경 大巡典經≫, ≪중화경 中和經≫, ≪화은당실기 華恩堂實記≫ 등이 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증산법종교 안내문... 글자가 탈락되어 잘 보이지 않는다.

▼ 증산법종교 본부... 왼쪽에 광구천하(匡救天下)와 교리인 해원(解冤) 상생(相生) 보은(報恩)을 세겨 놓은 비석이 있다.

▼ 증산법종교 본부 중심건물인 경춘대...

▼ 증산법종교 경춘대를 통과하면 앞에 바로 강증산(甑山) 묘인 영대(靈臺)가 나타난다.

▼ 삼청전... 이곳에는 미륵불상을 봉안하였다.

▼ 삼청전... 미륵불상<증산법종교 팜플렛>

▼ 증산법종교 영대와 삼청전은 국가등록문화재로 등록 되어있다.

▼ 강증산(甑山) 묘 영대(靈臺) 전경

▼ 증산상제성묘원(甑山上帝聖墓院)

▼ 영대(靈臺) 내부...

▼ 영대(靈臺)... 일반 묘 상석에 해당하는 제단

▼ 영대(靈臺) 전경

▼ 영대(靈臺) 측면... 묘 모습이 창틀 사이로 보인다.

▼ 영대(靈臺) 뒷모습... 역시나 창틀 사이로 강증산과 부인의 묘가 보인다.

▼ 영대(靈臺)에서 금평저수지 너머 모악산 능선들을 바라본다. 아침 이른 시각이라 안개가 자욱하다. 산들이 험하게 다가오지 않고 포근해 보인다.

▼ 증산법종교 본부 건물... 화은당... 화은당 강순임 창교주의 영정을 모셨다.

▼ 증산법종교 본부 건물...태평전과 구룡사

▼ 화은당과 만고종각... 그 사이로 보이는 근사한 산이 제비산이다.

▼ 증산법종교 본부 건물... 만고종각

▼ 증산법종교 본부 건물... 강당

▼ 증산법종교 본부 건물... 도화원

▼ 증산법종교 본부 영대(靈臺)와 삼청전 원경

▼ 경춘대 앞에서 바라본 금평저수지

 

동곡약방(銅谷藥房)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청도리에 있는 일제강점기 증산교의 성지.
동곡(銅谷)이란 지명은 예전에 도예지가 있던 까닭에 그릇골이라 불리다가 구릿골이라 하였고, 이를 한자로 옮기면서 구리 ‘동(銅)’자와 골 ‘곡(谷)’자를 써서 붙여진 이름이다.
동곡약방(銅谷藥房)은 1903년 당시 김제시 금산면 청도리 하운동 김형렬의 집에 머물던 강증산(姜甑山)이 1908년 동곡마을에 살던 김준상 아내의 발에 난 종기를 치료한 후, 김준상의 방 한 칸을 빌려 사람들을 치료하기 시작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1909년 6월 24일 강증산이 세상을 떠난 후 여러 차례 집주인이 바뀌면서 제대로 관리되지 않다가, 2003년 대순진리회에서 동곡약방과 인근 부지를 매입하여 종교 성지로 복원하였다.<네이버지식백과>

 

▼ 동곡약방 안내판... 반사스틸 위에 글을 써서 읽기 힘들다.

▼ 동곡약방 원경... 왼쪽 기와집은 동네 어른들에게 여쭤보니 화은당 강순임의 아들 집이었는데 지금은 폐가처럼 관리를 안하고 있다고 한다.

▼ 동곡약방... 문이 굳게 닫혀 있어서 담너머로 사진만 찍었다.

▼ 동곡약방... 예전에 사진을 보니 초가집이었는데 기와집으로 탈바꿈했다. 초가집이 훨씬 역사적 사실적으로 좋을 것 같은데 아마도 대순진리회 측에서 관리 어려움 때문에 기와집으로 했을 것으로 내 나름 추측해 본다.

 

▼ 영대(靈臺)에서 바라본 증산법종교 본부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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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방인야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