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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 묘

 

임피역사를 방문하여 이것저것 돌아보는데 길 옆에 애국지사 두분의 묘가 인근에 있다고 안내판이 보인다. 본능적으로 찾아봐야겠다고 생각이 들어 무작정 화살표 방향으로 차를 몰았다. 
대략 500m라고 되어 있으니 마을 안쪽으로 가서 여쭤보면 될듯 싶어서 아무리 두리번 거려도 인적이 없다. 하는 수 없이 마을을 한바퀴 돌았는데도 딱히 아시는 분이 안계신다. 모두 이곳에 온지 얼마 안된 분들만 만났다.
하는 수 없이 인터넷을 뒤졌더니 술산교회 후록에 있다고만 되어 있다. 술산교회 옆에 차를 세우고 지형을 보니 교회 뒤쪽 산이 있는데 그곳에 한자리가 있을 법하다. 
이날따라 핸폰이 왜이리 더디게 터지는지 갈길은 멀고 해는 서산에 지려고 하는데 마음이 급해 무작정 산으로 올라갔다. 묘 한기가 딱 보인다. 아니면 말고 식으로 갔는데 다행히 송병선 선생 묘다. 핸드폰으로 지도를 확인했으면 좀 수월했겠지만 일이 안될때는 핸드폰도 안터진다.
아래쪽에 작은 묘가 있는데 비석에 글씨는 있는데 흐릿해서 잘 안보인다. 일단 확대해서 사진만 찍고 돌아와서 확인해보니 시비공임의 묘라 한다.
묘역은 바람이 엄청나게 불어온다. 원래 사격이 없이 뻥 뚫린 곳에 묘를 조성할 때는 낮은 곳에 묘를 써야 바람으로부터 안전하다. 호남지방은 낮은 구릉으로 되어 있어서 바람에 비교적 안전하지만 북서방, 북동방 등으로 좌향을 정할 때는 바람길을 특히 조심해야 한다.
이곳은 연제선생 부인이 일찍 돌아가셨을 때 직접 자리를 잡은 곳이라 한다. 연제선생이 을사조약의 울분을 참지 못하고 극약을 먹고 자결을 했을 때 금산 성곡에 장사를 지냈다가 1915년에 술산으로 이장해서 부인 곁으로 왔다고 한다.
낮은 구릉에 용도 미미하고 용호도 멀찍이 있어 크게 돋보이지는 않지만 이만한 곳도 찾기 쉽지는 않은 곳이다.
시비공임의 묘는 선생묘 백호 지각을 따라 내려가는 곳에 있고 그 끝에도 묘 한기가 더 있는데 자리가 아니다. 앞쪽이 너무 휑해서 바람이 부는데 나무로 비보를 하면 괜찮아 질 것이다.
인근에 문형모 의병장 묘가 있다고 되어 있는데 도저히 찾을 길도 없고 자료도 없어서 포기하고 내려왔다. 와서 백방으로 찾아보니 겨우 한군데서 묘역이 나온다. 나는 못찾고 그냥 왔지만 다음 가시는 분들은 수고로움을 덜으시라고 지도에 묘역을 표기하니 참고하시기 바란다.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화옥(華玉). 호는 연재(淵齋)·동방일사(東方一士). 대전시 회덕(懷德) 출생. 송시열(宋時烈)의 9세손이며, 송면수(宋勉洙)의 맏아들로, 참의 송달수(宋達洙)와 송근수(宋近洙)의 종질이며, 송병순(宋秉珣)의 형이다. 큰아버지인 송달수에게서 송병순과 함께 성리학과 예학을 배웠다.
송달수가 죽은 뒤 집안의 학문이 기울어질 것을 염려해 학문에 더욱 힘썼으며, 송근수와 외삼촌 이세연(李世淵)의 지도를 받았다.

1877년(고종 14) 태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그 뒤 경연관(經筵官)·서연관(書筵官)·시강원자의(侍講院諮議) 등에 차례로 선임되었으나 모두 거절하였다. 1880년 철인왕후(哲仁王后)가 죽자, 왕대비와 대왕대비는 소공시마복(小功緦麻服)을 입는 것이 마땅하다는 소를 올렸다. 1881년에는 당시 개선할 시무책 8개조를 건의한 신사봉사(辛巳封事)를 올렸다.
1883년과 1884년에 사헌부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다만 1884년 의제변개(衣制變改)가 단행되자 극력 반대하는 소를 두 차례 올렸다. 그러나 왕의 비답(批答)을 받지 못하자 세상 밖으로 나가지 않고 몸과 마음을 닦는 데 힘을 쏟았으며, 이듬해에는 무주 설천면 구천동 산 속 물가에 서벽정(棲碧亭)을 짓고 도학을 강론하는 일에만 몰두하였다.
조정에서 다시 가의(嘉義)로 승품하였으나 역시 응하지 않고 다만 사교(邪敎)를 금지할 것을 상소하였다. 1904년 명헌태후(明憲太后) 홍씨와 황태자비 순명비(純明妃)가 죽자 그 복상(服喪)에 대하여 상소하였다.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위협하여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두 차례의 「청토흉적소(請討凶賊疏)」를 올렸다. 그러나 이에 대한 비답이 없자 상경하여 고종을 알현하고 을사오적을 처형할 것, 현량(賢良)을 뽑아 쓸 것, 기강을 세울 것 등의 십조봉사(十條封事)를 올렸다. 을사오조약에 대한 반대운동을 계속 전개하려 하였으나 경무사 윤철규(尹喆圭)에게 속아 납치되어 대전으로 호송되었다.
그 해 음력 12월 30일 국권을 강탈당한 데 대한 통분으로, 황제와 국민과 유생들에게 유서를 남겨 놓고 세 차례에 걸쳐 다량의 독약을 마시고 자결하였다. 유서에서 을사오적 처형, 을사조약 파기 및 의(義)로써 궐기하여 국권을 회복할 것을 호소하였다. 송병선이 자결하자 시비로 있던 공임(恭任)이 따라서 자결하여 세간에서 의비(義婢)라고 칭송하였다. 죽은 뒤 의정(議政)에 추증되었다.

조광조(趙光祖)·이황(李滉)·이이(李珥)·김장생(金長生)·송시열 등 대선비의 문집에서 좋은 글귀를 뽑아서, 『근사록(近思錄)』과 같은 범례를 좇아 책을 지어 『근사속록(近思續錄)』이라 하였다.
그밖의 저서로도 『연재집(淵齋集)』과 『근사속록(近思續錄)』, 『패동연원록(浿東淵源錄)』, 『무계만집(武溪謾集)』, 『동감강목(東鑑綱目)』 등 53권이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1914년 왕명으로 영동에 문충사(文忠祠)를 지어 동생 송병순과 함께 배향했으며, 1965년에 충청남도 대전 보문산으로 이전하였다.
1966년 전국 유림들이 뜻을 모아 대전시 용운동에 용동서원(龍洞書院)을 짓고 이곳에 문충사를 이전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인용>


 

문화재지정 미지정
문화재명칭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 묘
소재지 전북 군산시 임피면 술산리 383-1
관리자(연락처) 은진송씨

 

연재선생과 의비 공임의 묘(義婢恭任之墓)
 
  연재 송병선 선생은 1905년 일제가 을사늑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고종을 알현하고 을사5적의 처단과 을사조약의 파기를 건의하였다. 을사조약 반대 투쟁을 계속하다가 경무사 윤철규에게 인치(引致)되어 강제로 향리(대전)에 호송되었고 국권을 빼앗김에 통분하여 세 차례 다량의 독약을 마시고 황제와 국민과 유생들에게 드리는 유서를 남겨 놓고 그해 12월 30일 순국하였다. 연재 선생이 순국하자 고종 황제는 3월에 문충(文忠)이란 시호를 내리니 도덕과 학문이 넓음을 문(文)이라 하고, 나라를 생각하고 집을 잊음을 충(忠)이라 하였다.
송병선의 사상과 항일의 정신은 한말과 일제 강점기라는 어두운 시절을 비춘 밝은 등불이 되었다.
<중략>
연재 선생이 1905년 12월 30일 순국한 후 1915년 2월 2일에 금산 성곡(星谷) 뒤에 장례 지냈다가 술산의 꽃달메산으로 이장하였다. 연재선생의 묘를 임피로 이장했던 배경에는 전지수 등 임피현 유생들의 영향이 매우 컸었고, 연재선생의 부인 완산이씨의 묘가 술산의 꽃달메산에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임피면 술산리 383-1에 위치한 꽃달메산 연재선생 봉분 좌측 5m 전방에는 비문이 잘 보이지 않는 작은 무덤 하나가 자리하고 있다.
그 묘는 연재선생 후손들이 선생의 묘 이장시에 같이 꽃달메산으로 이장했던 의비 공임의 묘(義婢恭任之墓)이다.
  공임은 연재선생의 시비(侍婢)로서 16세의 묘령의 나이에 충신대감을 지하에서 모시겠다 하고 1906년 음력 1월 16일 칼로 목을 베어 자결하였다. 그녀는 영동에서 연재 선생의 죽음 소식을 듣고 상전의 상식을 위하여 10여일 남짓 통곡으로 날을 보내다가 자결하였다.
최명희는 혼불 4권 귀ㆍ천에서 ‘연재 송병선은 아우 송병순과 나란히 그 인품과 학문을 널리 나라 안에 떨치었다. 그러다가 광무9년, 일본이 한국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을사조약을 체결하자, 나라의 자주권을 잃은 비분과 원통함을 억누르지 못하고 분연히 독약을 마시어 자결하였다. 그러자 사노 복남이는 상전이 미쳐 다 못 마신 약사발의 독약을 기울여 마셨다.’라고 충복 공임을 복남이로 바꾸어 묘사하고 있다.
생전에 그러하였듯이 혼백이 되어서라도 한결같이 상전을 모시고자 했던 공임은 술산의 꽃달메산에서 의비(義婢)로 영원히 남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역사적 사실을 지역사회에서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임피향토사연구회(최규홍)에서 인용>

 

▼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 묘 위치(의병장 문형모 묘 위치)

▼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 묘 전경

▼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 묘

▼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 묘비... 부인 전주이씨와 합장이다.

▼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 묘 후면... 

▼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 묘 상석

▼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 묘 청룡방

▼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 묘 백호방

▼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 묘 측경

▼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 묘 입수도두... 입수룡이 미미하고 도두가 거의 없어 바람을 막아주지 못한다. 이곳에 나무를 식재해야 좋다.

▼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 묘 입수도두

▼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 묘 후경

 

▼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 묘 백호방 지각에는 의비공임의 묘가 있다.

▼ 의비 공임(義婢恭任) 묘비

▼ 의비 공임의 묘(義婢恭任之墓) 후경

▼ 의비 공임의 묘(義婢恭任之墓)에서 바라본 연제선생 묘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 묘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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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방인야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