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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안 김씨(延安 金氏) 시조(始祖) 김섬한(金暹漢) 묘

 

연안김씨 시조 묘는 처음에는 몰랐다가 최근에 알았다. 한참 선현묘지 답사를 다닐 때 양평 김자지, 김여지 묘를 답사를 했었는데 이곳에 시조 묘가 있다는 것은 그때는 몰랐다. 
양평, 남양주답사를 계획하면서 이곳을 다녀오려고 여러번 답사코스에 포함시켰지만 번번히 놓치고 답사 기회가 안나서 인연이 없는 것으로 알고 그냥 지냈는데 근자에 양평 마지막 답사라고 하고 후배랑 답사를 진행했는데 인근에 다른 묘랑 묶어 답사하려고 벼르고 임했지만 시간이 늦어 끝내 못했다.
어떤 곳을 답사하려고 여러날 준비했지만 번번히 놓치는 경우가 있는데 이럴때는 인연이 없는 것으로 알고 서두르지 않고 지내다보면 우연히 찾게 되는 경우가 많다. 
엊그제 경기도 이천에 상담하러 다녀오다가 시간이 남아서 인근 묘역을 가볼까 하고 검색을 하는데 갑자기 연안김씨 시조 묘가 떠올랐다. 다른거 다 재끼고 이곳으로 차를 몰았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때고 진입로를 잘 몰라 무조건 지도로 제일 가까운 곳으로 진입했다. 
우여곡절 끝에 답사를 했는데 묘역은 높지 않은 곳에 묘비가 세워져 있고 아래쪽에는 실전된 선조들의 단이 모셔져 있다. 묘역은 근래에 설치한 석물들이 배치되어 있다. 특이하게도 입수에 바위 3개가 박혀 있는데 모양은 그리 좋지 않으나 땅에 깊게 박혀 있다. 
시조 묘의 특성상 멀리 조안이 중첩되어 있는데 중앙에 멋진 탐랑이 후손의 인물을 예견한다. 묘역 아래쪽에 경원재가 있는데 문이 잠겨 들어가지는 못했다. 이곳에 비를 읽어보니 시조부터 7세조까지 위패를 모시고 있다고 되어 있다.

 

안 김씨(延安 金氏)
 
연안 김씨(延安 金氏)는 황해도 연안군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김씨 분관록》, 《증보문헌비고》등의 문헌(文獻)에 의하면 신라 김알지의 후예인 두 형제가 왕에게 직간(直諫)하다가 오히려 미움을 받아 먼 곳으로 유배되어 형은 북빈경(北濱京. 지금의 강릉)에 살게 되었고, 동생은 시염성(鼓鹽城. 지금의 연안)에 살게 되었다고 한다.
시조 김섬한(金暹漢)은 연안(延安)으로 유배된 아우의 후손으로 고려 명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국자감 사문박사(四門博士)를 지냈다. 그의 상계는 아득히 멀고 기록이 없어 상고할 수 없다. 일설에 가야 왕손이라는 족보에 의하면 연안 김씨는 가야계 후손이라 한다. 후손 김도(金濤)는 고려 공민왕(임인년. 1362)때 문과에 급제하고 밀직제학(密直提學)을 지냈다.
조선 시대에 문과 급제자 163명, 정승 6명, 대제학 1명, 왕비 1명, 종묘배향공신 3명을 배출하였다. 김도의 아들 김자지(金自知)와 김여지(金汝知)는 판서를 지냈으며, 김전(金詮), 김근사(金謹思), 김안로가 영의정을 지냈다. 김감(金勘)은 대제학을, 김경사(金敬思)는 광주목사를 지냈다.<위키백과에서 인용>


시조(始祖) 박사공 김섬한(金暹漢)
 
공(公)은 고려명종(高麗明宗-1170∼1197)때에 재세(在世)하셨던 분으로, 신라시대(新羅時代) 왕족으로 왕에게 직간(直諫-맞대하여 왕의 잘못을 간함)을 하다가 오히려 왕의 노여움을 받아 연안(延安)으로 귀양을 가서 한 집안을 이루었던 선조(先祖)의 후손(後孫)이다.
공은 신라왕통(新羅王統)의 명문후예(名門後裔)로 태어나서 어려서부터 학문을 게을리 하지않아 고금서적(古今書籍)을 통독(通讀)함으로써 옛 성현(聖賢)의 가르치심에 전심전력하니 그 깊고 오묘(奧妙)한 이치(理致)를 모르는 것이 없게되었으므로 그 이름이 관서일대(關西一帶-平安道)에 진동하였다. 당시 이지방의 안찰사(按察使-觀察使) 모인(某人-성명미상)이 공의 높은 학문과 어진 행적(行績)을 흠모(欽慕)하여 부단(不斷)히 교유(交遊)하더니 그 재직기한(在職期限)이 끝나고 서울로 돌아 갈 때 공을 동반(同伴)하고 귀경했다.
공이 당시의 서울인 개성에 올라가신 당년에 사마시(司馬試)에 급제(及第)하여 상사(上舍-高麗때 大學중의 하나)에 드시고, 다음 해에는 문과(文科) 을과(乙科)에 급제하였다.
그후 국자감사문박사(國子監四門博士)가 되어 천하준재(天下俊才)를 관하(館下)에 모아 학문권장에 진력(盡力)하니 이로써 유학(儒學)이 날로 흥왕(興旺)하고 문풍(文風)이 크게 떨쳤다.
이상(以上)은 시조박사공에 대하여 전해진 문헌(文獻)의 기록이며, 그 외의 공의 사적이나 그 선조의 역사는 알 수 없다.

시조 박사공께서 송도(松都)에 올라가 과거를 보시던 때가 명종조 어느해라는 기록은 없으나 모든 정세(情勢)로 보아 아마도 경대승이 정중부를 물리친 명종9년 이후가 아닌가 한다. 왜냐하면 무지난폭(無知亂暴)한 정중부가 집권하고 있을때는 기존(旣存) 문신(文臣)들이 모두 박해를 당하고 있을 때인데 천하에 이름이 나있는 박사공께서 그 밑에 입조했을 리가 없었으리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입조하신후 이의민·최충헌등의 계속적인 무인천하(武人天下)에서 웅지(雄志)를 펴지 못하고 벼슬이 겨우 정8품에 그치고 말았음은 그시대의 상황으로 어쩔 수 없었으리라고 짐작된다.

박사공의 관직인 국자감사문박사는 지금의 국립대학교수와 같다.
배위는 상서좌복야신번진극유(尙書左僕射新繁陳克柔)의 따님이다.
아드님 세분이 있었으니 1자(子)는 호부원외랑(戶部員外郞) 준구(俊龜)공이요, 2자(子)는 한림학사(翰林學士) 준룡(俊龍)공인바 후사(後嗣)가 없었고, 3자(子)는 대장군(大將軍) 준린(俊麟) 공이시다.
그런데 씨족원류(氏族源流)에는 준봉(俊鳳)이라는 아들이 또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우리 족보(族譜)에는 구보(旧譜)에도 기록이 없다. 그리고 공에게는 담한(曇漢)이라는 형(兄)이 있었으나 기해보에 실전(失傳)된 것으로 되어있다.
공의 묘소는 1716년 간행된 기해보(己亥譜)는 물론 다른 문헌에도 기록(記錄)이 없어 알 길이 없다.
1960년에 대종회내에 시조박사공설단건비위원회(始祖博士公設壇建碑委員會-委員長瓚泳)가 조직되어 전국적으로 모금운동을 전개한결과 단시일내에 재정이 확보되어 1961년 5월 16일에 경상남도 통영군 도산면 원산리(慶尙南道 統營郡 道山面 院山里) 4世 문하찬성사 우(門下贊成事 祐)공의 묘역내(墓域內)에 공의 3자(子) 대장군 준린공(俊麟公) 및 손(孫) 판도판서 경성공(景成公)과 더불어 3위의 제단(祭壇)을 봉축(封築)하고 신도비(神道碑)를 건립(建立)하였으며, 1970년에는 공의 제1자(子) 호부원외랑 준구(俊龜)공 및 손(孫) 처사 묘성(昴成)공의 제단을 병설함으로써 부조손(父祖孫) 3세(世)5위(位)를 동일국내(同一局內)에 모시고 음력 10월13일에 시제를 올리다가, 지금은 경기도 양평군 강하면 왕창리 선영에 옮겨 모시고 매년 양력 4월 둘째 일요일에 시제를 모신다.<연안김씨대종회에서 인용>

 

문화재지정 미지정
문화재명칭 연안 김씨(延安 金氏) 시조(始祖) 김섬한(金暹漢) 묘
소재지 경기도 양평군 강하면 왕창리 526-3
관리자(연락처) 연안김씨 대종회

 

 

▼ 연안 김씨(延安 金氏) 시조(始祖) 김섬한(金暹漢) 묘 전경

▼ 연안 김씨(延安 金氏) 시조(始祖) 김섬한(金暹漢) 묘 아래에는 실전된 2세, 3세 선조들의 단이 조성되어 있다.

▼ 연안 김씨(延安 金氏) 시조(始祖) 김섬한(金暹漢) 묘비

 

▼ 연안 김씨(延安 金氏) 시조(始祖) 김섬한(金暹漢) 묘

▼ 연안 김씨(延安 金氏) 시조(始祖) 김섬한(金暹漢) 묘 전경

▼ 연안 김씨(延安 金氏) 시조(始祖) 김섬한(金暹漢) 묘표

▼ 연안 김씨(延安 金氏) 시조(始祖) 김섬한(金暹漢) 묘 석물

▼ 연안 김씨(延安 金氏) 시조(始祖) 김섬한(金暹漢) 묘 입수도두에 바위가 박혀있다.  깊게 박힌 돌은 혈이 뭉쳐있다고 보고 혈증으로 보기도 한다. 

▼ 연안 김씨(延安 金氏) 시조(始祖) 김섬한(金暹漢) 묘 후경... 조안산이 중첩되어 있는 것은 후손이 크게 번창한다는 의미가 있다.

 

▼ 연안 김씨(延安 金氏) 시조(始祖) 김섬한(金暹漢)을 비롯 7세조까지 위패를 모신 경원재 삼문...

▼ 연안 김씨(延安 金氏)  경원재 건립 기념비

▼ 연안 김씨(延安 金氏) 경원재 사당...문틈으로 찍고 ... 담장 너머로 찍었다.

▼ 연안 김씨(延安 金氏) 경원재 뒷모습... 멀리 예쁜 탐랑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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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방인야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