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한산군 이계린(李季疄)(이색 손자, 정순공주 사위)

 

남양주 지세마을 답사는 오래 전에 원주변씨 시조 묘를 답사할 때 이 일대를 다 돌아본 것 같다. 그때 맨 윗쪽에 묘가 있었는데 무슨 공주 묘라고 하길래 가려다가 냇가를 건너야 하고 힘이 들어서 다른 사람들만 가고 나는 안갔었는데 근자에 남양주 답사를 이제 마무리 지으려고 찾다보니 자꾸만 그 묘역이 심기를 건드린다. 
하는 수 없이 정순공주 묘, 이계린 묘를 답사하지 않을 수 없어서 기회를 엿보다가 얼마전 견성암을 다녀오면서 마침 그곳을 지나길래 무작정 안쪽 이계린 묘를 찾아 들어갔다.
예전이나 별 다른게 없이 이곳은 비닐하우스가 밀집되어 있고 이계린 묘를 접근하는 방식도 개울을 건너는 수 밖에 다른 방법이 안보였다. 나중에 답사 끝나고 나오면서 보니 묘역 진입은 옆구리로 들어가는 길이 있었다. 물론 그곳에는 다른 집 비닐하우스를 통과해야 갈 수 있다.
남양주의 빈터들은 대부분 신도시나 개발로 인해 거의건물들로 채워지고 있는데 이곳 지세마을은 아직도 미개발상태로 남아 있다. 조만간 개발물결이 이곳까지 침범하리라 예상 되는데 이곳에 원주변씨 시조 묘가 있어서 아마도 조금은 시끄러울 것 같다.
서울 인근에 산이란 산마다 크고 작은 묘들이 너무 많다. 그것도 몇백년 지난 묘들이 대부분이다. 묘는 오래 되었어도 묘 석물 특히 묘비나 신도비는 최근에 새로 한것이 많다. 옛 묘들을 보존하다가 어쩔 수 없이 개발을 한다든가 할 때는 자연스럽게 묘를 이장하거나 납골묘 형태로 옮길 수 있도록 석물을 새로 하는 것은 고려해봐야 할 듯 하다.
이곳 이계린 묘비도 근자에 새로 한 것이다. 그런데 그 위쪽에 있는 이백강, 정순공주 묘비는 옛것을 그대로 놔두고 새로 하지 않았다. 물론 후손이 없어서 안했다고도 보이지만 있는 그대로 보존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 생각든다.
이곳은 지세마을 가장 안쪽에 위치하여 분지형태를 이룬 끝자락이다. 앞쪽 안산이 백호로 이어지는 본신인데 너무 가까이 있고 능선들이 묘들을 비껴나는 사선으로 배치되어 묘역을 포근히 안아주는 정겨움이 부족하다.

 

 

한산군 이계린(李季疄)(이색 손자, 정순공주 사위)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자경(子耕). 할아버지는 이색(李穡)이고, 아버지는 지중추원사 이종선(李種善)이다. 태종의 장녀인 정순공주(貞順公主)의 사위이다.
1416년 16세의 나이로 돈녕부판관(敦寧府判官)에 임명되었다. 태종이 이계린이 젊어서 관직에 나가는 것을 마땅치 않게 여겨 오랫동안 관직에 나가지 않다가, 1436년 세종의 명으로 동부승지로 발탁되었다. 1441년 형조참판, 다음 해 경기도관찰사, 1444년 호조참판, 이듬 해 경상도관찰사를 거쳐 1446년 대사헌이 되었다.
다음 해인 1447년 황해도관찰사로 임명되어, 각 지방의 사정을 살피면서 계속된 가뭄으로 백성들의 생활이 처참한 것을 보았다. 백성 중에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 사람의 고기를 먹는 사례도 있다는 계문(啓聞: 관찰사·절도사 또는 지방에 출장중인 봉명사신이 공무수행 내용을 문서로 아룀)을 올려 조정을 놀라게 하였다. 임금은 이와 같은 해괴한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도록 동부승지였던 아우 이계전(李季甸)에게 하명하였다.
조사가 시작되자 두려움을 느껴 이백강(李伯剛)의 하인 김간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계문했다고 말하였다. 이에 형조에서 김간을 문초하니 조수명으로부터 들었고, 조수명은 다시 해주에 사는 복덕이가 자기 집 울타리 밑에 어린이의 머리가 있었다는 말이 와전되어 이계린에게 전달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당시 황해도를 비롯한 각 지방에서는 굶어 죽은 자가 많아 인심이 흉흉해 이러한 풍문이 났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계린은 풍문만 믿고 사실 여부를 확인하지 않아 많은 무리를 빚어 파직되었다.
그 뒤 1449년 별시위절제사로 임명되었다. 이 관직은 실직은 아니지만, 이를 계기로 벼슬 길이 열려 같은 해 개성유수, 1451년(문종 1) 지중추부사, 1453년(단종 1) 형조판서가 되었다.
이어 1454년 호조판서로 임명되었다가, 세조의 왕위 찬탈에 협력한 아우 이계전과 함께 좌익공신(佐翼功臣) 2등에 녹훈되고 한산군(韓山君)에 봉해졌다. 1455년 좌찬성이 되었다. 시호는 공무(恭武)이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인용>



정순공주(貞順公主)
 
제 3대왕 태종의 맏딸로, 어머니는 원경왕후 민씨(元敬王后閔氏)이다. 
1399년(정종 1)영의정부사서원부원군(領議政府事西原府院君) 이거이(李居易)의 아들인 사헌부감찰 이백강(李伯剛)에게 출가하였다.
1400년(태종 즉위년) 11월 태종의 즉위와 함께 정순공주에 봉해지고, 이 후 태종·세종·문종·단종·세조의 두터운 은총을 받았으나, 1451년(문종 1)과 1455년(세조 1)에 남편과 사위를 연이어 여의는 고통을 당하면서 쓸쓸한 만년을 보냈다. 슬하에 한산이씨 좌찬성 한산군(左贊成漢山君) 이계린(李季疄)에게 출가한 1녀를 두었다.


청평부원군(淸平府院君) 이백강(李伯剛)
 
본관은 청주(淸州). 아버지는 영의정 이거이(李居易)이며, 태조의 부마인 이저(李佇)의 동생이다.
1397년(태조 6)에 음보로 별장이 되었으며, 1399년(정종 1)에 감찰이 되었고, 이방원(李芳遠: 후의 太宗)의 맏딸(후의 貞順公主)과 결혼하여 청평위(淸平尉)가 되었다.
병조좌랑과 형조좌랑을 지낸 뒤, 1400년 제2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을 도와 공을 세워서 아버지와 함께 공신에 들었으며, 이듬해 우장군을 거쳐 대장군에 올랐다. 태종이 즉위하자 숭정대부(崇政大夫) 청평군(淸平君)에 봉하여졌다. 1404년에 아버지 이거이가 두 마음을 품어 불궤(不軌)를 도모한다 하여 서인으로 폐하여지고, 동성에서 유배생활을 하였으나 이듬해 풀려났다.
1418년(세종 즉위년)에는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청평부원군(淸平府院君)에 봉하여지니 부마를 부원군으로 봉하기는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1422년에 진하사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450년에 수록대부(綏祿大夫) 청평위(淸平尉)가 되고 궤장(几杖)을 하사받았다. 부마들 중에서 청렴하고 근면하다고 일컬어졌으며, 슬하에 딸이 하나였는데 이계린(李季疄)에게 출가하였다. 시호는 정절(靖節)이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인용>

 

 

문화재지정 미지정
문화재명칭 한산군 이계린(李季疄)묘, 이백강,정순공주 묘
소재지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용정리 산 209-2
관리자(연락처) 한산이씨 종중

 

▼ 뒷쪽이 이백강,정순공주 묘이고 앞쪽이  사위 한산군 이계린(李季疄) 묘이다.

 

▼ 한산군 이계린(李季疄) 묘 전경

 

▼ 한산군 이계린(李季疄) 묘비

 

▼ 한산군 이계린(李季疄) 묘 

 

▼ 한산군 이계린(李季疄) 묘 석물

 

▼ 한산군 이계린(李季疄) 묘 후경

 

 

▼ 청평부원군(淸平府院君) 이백강(李伯剛), 정순공주(貞順公主) 묘... 옛 석물들을 그대로 놓아둔 것이 오히려 좋아 보인다. 후손들이 없어서 그럴수도 있겠지만 온 산천이 돌로 가득해지는 것을 막는 것도 하나의 방법...

 

▼ 청평부원군(淸平府院君) 이백강(李伯剛), 정순공주(貞順公主) 묘비... 마모 되어서 잘 안보인다.

 

▼ 청평부원군(淸平府院君) 이백강(李伯剛), 정순공주(貞順公主) 묘 석물

 

▼ 청평부원군(淸平府院君) 이백강(李伯剛), 정순공주(貞順公主) 묘 후경

 

이계린(李季疄) 묘, 이백강(李伯剛), 정순공주(貞順公主) 묘 동영상

 

▼ 이계린(李季疄)의 아들 이돈(李墪) 묘... 이계린 묘 청룡방에 있다.

 

▼ 이계린(李季疄)의 아들 이돈(李墪) 묘 석물

 

▼ 이계린(李季疄)의 아들 이돈(李墪) 묘 후경

 

728x90
반응형
Posted by 이방인야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