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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한도(歲寒圖)와 우선(藕船) 이상적(李尙迪) 묘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세한도(歲寒圖) 특별전시회가 열렸는데 엊그제 마지막 하루전날 다녀왔다. 추사 김정희가 그린 세한도는 너무나 많이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국보의 진품을 본다는 것 외에 특별한 의미는 없었다. 그런데 추사가 발문에 써서 그의 제자의 선행이 널리 알려진 우선 이상적에 대해 조금 더 알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우선 이상적 선생은 역관으로 뛰어난 능력을 소유하여 중국을 12차례나 다녀올 정도로 뛰어났다. 그가 중국에 가서 귀한 책을 구해와서 멀리 제주도에 유배 중인 스승에게 전달하기 까지 많은 어려움이 있었음에도 그 정성을 다하여 사제의 정을 나눈 것은 교통이 편리하고 도서 구입하기도 쉬운 현대에서조차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참으로 대단한 선행이다.
추사도 그 고마움을 잊지않고 세한도(歲寒圖)라는 거작을 제자에게 그려주었는데 그 진본이 여러 우여곡절 끝에 얼마전에 손재형 후손들이 국가에 기증하여 특별전을 열어 공개한 것이다.
이상적 선생을 조금 더 알아보기 위해 여기저기 뒤지던 중 묘소가 포천에 있는데 어느 민가가 그 집 후손이라는 단서 하나만 믿고 토요일 오후에 찾아나섰다. 그런데 현장에 도착해서 후손 집이라는 민가에 차를 주차하고 그 집 주인과 대화를 해보니 후손이 아니라고 하신다. 난감한 일이어서 그 마을 어르신들한테 이상적 선생 묘를 물어도 아무도 아시는 분이 없고 또한 모두 외지인들이 현지에 별장식으로 집을 짓고 오신 분들이었다. 동네 반장이 있다고 해서 여쭤보려고 해도 일터에 나가셔서 들어오지 않았다고 하신다.
마지막 궁여지책으로 우봉이씨 대종회에 전화를 걸어보기로 하고 토요일이라 아무런 기대도 안하고 전화를 했는데 사무국장님이 착신전환 해놓고 전화를 받으셨다. 너무 반가워서 이상적 선생 묘소 참배 이유를 설명드리고 위치를 부탁드렸는데 인근 동네에 사시는 분을 소개해 주셔서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이자리를 빌어 우봉이씨대종회 사무국장님께 감사드립니다. 현재는 풀이 무성한데 5월에 벌초를 하신다고 하시니 그때 다녀오시면 멋진 묘역을 보실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뒤에 오시는 분들을 위해 위치를 공개하니 가셔서 참배를 하시고 술 한 잔이라도 올리고 오시길 바랍니다. 

 

 

세한도(歲寒圖)
 
국보 제180호. 세로 23㎝, 가로 69.2㎝. 종이 바탕에 수묵. 지위와 권력을 박탈당하고 제주도 유배지에서 귀양살이하고 있었던 김정희가 사제간의 의리를 잊지 않고 두 번씩이나 북경(北京)으로부터 귀한 책들을 구해다 준 제자인 역관(譯官) 이상적(李尙迪)에게 1844년(헌종 10)에 답례로 그려준 것이다. 김정희는 이 그림에서 이상적(李尙迪)의 인품을 날씨가 추워진 뒤에 제일 늦게 낙엽 지는 소나무와 잣나무의 지조에 비유하여 표현하였다.

세한도(歲寒圖) 발문(跋文) 해석문

지난해에는 계복(桂馥)의 <만학집晩學集>과 운경(惲敬)의 <대운산방문고大運山房文藁> 두 책을 부쳐왔더니, 올해는 또 우경 하장령(賀長齡)이 편찬한 <황조경세문편皇朝經世文編>을 부쳐왔구나. 이는 모두 세상에 늘 있는 책이 아니라서, 천만리 먼 곳에서 사온 것이며, 여러 해 걸려 얻은 것이지, 한 때에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또한 세상의 도도한 물결(인심)은 오직 권세와 이익만을 따르는데, (귀한 책을 얻으려고) 마음을 쓰고 힘을 쓰기를 이와 같이 하고서도, 권세와 이익이 있는 사람에게 돌아가지 않고, 바다 밖 초췌하고 야윈 사람에게 돌아오기를 마치 세상 사람들이 권세와 이익을 따르듯 하는구나.
태사공 사마천이 이르기를, “권세와 이익으로 합한 자는 권세와 이익이 다하면 사귐도 성글어진다”라고 했다. 그대 또한 세상의 도도한 물결 가운데 한 사람으로, 초연히 도도한 권세와 이익의 밖으로 스스로 벗어나니, 권세와 이익이란 기준으로 나를 보지 않음인가, 태사공의 말씀이 잘못되었는가?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안다”라고 하셨다. 소나무와 잣나무는 네 계절을 지내도 시들지 않는 것으로서, 날씨가 추워지기 전에도 한결같이 소나무와 잣나무였고, 날씨가 추워진 뒤에도 한결같이 소나무와 잣나무였다. 그런데도 성인께서는 특별히 날씨가 추워진 뒤를 일컬으셨다.
이제 그대가 나를 대함을 보면, 이전이라 하여 지금보다 더함이 없지만(잘 해준 것이 없지만), 이후라고 하여 지금보다 덜함이 없다(소홀함이 없다). 그러면 이전의 그대는 일컬을 만한 것이 없겠으나, 이후의 그대는 또한 성인에게 일컬을 만한 것이 아니겠는가? 성인께서 유독 이를 일컬었던 것(송백을 칭찬한 것)은 다만 늦게 시드는 곧은 절조와 굳센 절개를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또한 날씨가 추워진 때에 느끼시는 바가 있었던 것이다.
아아! 서한(西漢)의 순후한 세상에서 급암(汲黯)과 정당시(鄭當時) 같은 어짊으로도 빈객들이 시세와 더불어 성하고 쇠하였다. 하규(下邽)의 방문(榜文) 같은 것은 박절함이 극에 달했도다. 슬프다! 완당노인이 쓰다.<다음카페 이보세상 원문을 여행, 바람처럼 흐르다에서 인용>

이상적의 답신

“세한도 한 폭을 엎드려 읽으매 눈물이 저절로 흘러내리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어찌 그다지도 제 분수에 넘치는 칭찬을 하셨습니까. 아! 제가 어떤 사람이기에 권세와 이득을 따르지 않고 도도히 흐르는 세파 속에서 초연히 빠져나올 수 있겠습니까. 다만 구구한 작은 마음으로 스스로 하지 않을 수 없어 그렇게 했을 뿐입니다”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 오주석 저)


우선(藕船) 이상적(李尙迪)
 
본관은 우봉(牛峰). 자는 혜길(惠吉), 호는 우선(藕船). 한어역관(漢語譯官)집안 출신이다. 아버지는 이연직(李延稷)이다. 김정희(金正喜)의 문인이다.
이상적은 1828년(순조 28) 춘당대(春塘臺)에서 개강할 때에 임금으로부터 특별한 관심을 받았다. 1845년(헌종 11)에는 임금으로부터 전답과 노비를 받았으며 1847년(헌종 13)에 이르기까지 다섯 번이나 품계가 올라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올랐다. 1848년(헌종 14)에는 비서성(祕書省)에서 정조·순조·헌종의 『국조보감(國朝寶鑑)』(역대 왕의 업적 가운데 선정(善政)만을 모아 편찬한 역사책)을 간행하는 데 참여했다.
그리고 계속해 『통문관지(通文館志)』·『동문휘고(同文彙考)』·『동문고략(同文考略)』 등을 간행하는 데에 참여했다. 1862년(철종 13) 1월에는 임금의 특명으로 영구히 지중추부사직을 받았으며, 다음 해 7월 충청남도 온양(溫陽)의 군수로 부임했다.
그는 역관의 신분으로 12번이나 중국을 여행했다. 당대의 저명한 중국문인과 친구관계를 맺었으며 그러한 인연으로 청나라에서 명성을 얻게 되어 1847년(헌종 13)에는 중국에서 시문집을 간행했다. 그가 교유한 중국학자들의 면모에 대해서는 그들로부터 받은 편지글을 모아 귀국 후에 펴낸 『해린척소(海隣尺素)』에 잘 나타나 있다. 또 김정희의 「세한도(歲寒圖)」를 북경에 가지고 가서 청나라의 문사 16명의 제찬(題贊)을 받아온 일은 유명하다.
이상적은 시 이외에도 골동품이나 서화·금석(金石)에도 조예가 깊었다. 중국학자 유희해(劉喜海)가 조선의 금석문을 모아 편찬한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에 부치는 글을 쓰기도 했다.
이상적의 저서로는 『은송당집』 24권이 있으며, 이 밖의 작품들은 청나라의 학자들로부터 받은 편지글을 모아 엮은 『해린척소』에 부분적으로 전하고 있다.
그의 문학 작품은 다양한 반면에 두각을 나타냈던 그의 능력을 반영하고 있다. 특히, 역관으로서 언어에 대한 탁월한 재능은 그의 작품에 그대로 드러나, 쓰인 시어가 섬세하고 화려하며 때로는 맑고 우아하다는 평을 얻었다. 「거중기몽(車中記夢)」이라는 작품으로 사대부들 사이에 명성을 얻었으며 헌종이 그의 시를 읊어 ‘은송(恩誦)’이란 별호로 불리기도 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인용>

 

문화재지정 미지정
문화재명칭 우선(藕船) 이상적(李尙迪) 묘
소재지 경기 포천시 관인면 사정리 754-1(주차:관인면 뗏마루길 394)
관리자(연락처) 우봉이씨대종회

 

우선(藕船) 이상적(李尙迪)
 
우봉(牛峰) 이씨는 9대에 걸쳐 30여 명의 역과 합격자를 배출한 세습 역관 집안이다. 증조부 이희인과 조부 이방화가 역관들의 교육 기관인 교회청(敎誨廳) 훈상(訓上, 정3품)을 지냈으며, 생부(生父) 이정직과 양부(養父) 이명유는 사역원 첨정(僉正, 종4품)을 지냈다. 아우 상건, 사촌 상익, 조카 용준도 연행(燕行)의 수역관(首譯官)과 교회청 훈상을 지냈다. 손자 대에 이르러서는 태정, 태영, 태준이 모두 역관으로 중국에 드나들었다.
생부 이정직과 당숙 이정주는 송석원시사에 드나든 위항시인이다. 이상적은 이정주의 시집 『몽관시고(夢觀詩稿)』를 북경에 가지고 가서 청나라 문인들에게 보여 주었으며, “만당(晩唐)의 여러 시인을 닮았다.” 는 칭찬을 들었다.
이상적의 처가인 설성(雪城) 김씨도 역시 역관 집안이어서 장인 김상순, 처남 김경수가 모두 중국에 여러 차례 다녀왔다.

이상적은 제8차 연행을 했던 1847년에 북경 유리창에서 문집 『은송당집』을 간행하였다. 국내외에서 문인들과 주고받은 시문을 12권 목판본으로 간행한 것이다. 표지의 제목과 서문, 찬(贊)을 모두 청나라 문인이 짓고 써 주어, 그의 교유 범위를 짐작할 수 있다.
이상적은 청나라 문인에게 받은 편지를 모아 『해린척독(海隣尺牘)』이라는 10권 분량의 서한집을 편집했는데, 이 책은 출판되지 않고 호사가들에 의해 여러 형태로 필사되어 전해졌다. 해린(海隣)이라는 두 글자는 당나라 시인 왕발(王勃)의 시 “세상에 나를 알아주는 이가 있다면 / 하늘 저 끝도 이웃과 같으리(海內存知己, 天涯若比隣)” 라는 구절에서 나왔다. ‘세상 모두가 이웃(海隣)’ 이라는 생각은 『논어』의 “천하가 다 형제(四海之內 皆兄弟也)” 라는 구절에서 나왔는데, 이상적은 자신의 서재 이름을 ‘해린서옥’ 이라고 하여, 조선에서는 중인이라 차별 대우를 받지만 하늘 저 끝에서는 이웃으로 인정받았다는 자부심을 나타냈다.
<중략>
역과 응시자가 많아지고 경쟁이 치열해지자, 재력이 있는 집안에서는 가정교사를 모셔놓고 과거공부를 시켰다. 일단 역과에 합격해야만 대를 이어 역관 활동을 할 수 있었고, 역관이 되더라도 통역 실력이 뛰어나야만 자주 북경에 가서 무역할 수 있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에 이름난 역관 가문 가운데 하나가 해주(海州) 오씨인데, 이상적과 함께 역과에 응시해 2등으로 합격한 오응현은 동기 가운데 실력이 가장 뛰어난 이상적을 자기 아들 오경석의 스승으로 모셨다. 이상적은 오경석을 비롯한 역관 자제들에게 역과 시험문제만 가르친 것이 아니라, 자신의 해린서옥(海隣書屋)에 소장한 골동 서화를 보여주며 서화(書畵)에 관한 지식도 가르쳤다. 뒷날 오경석이 귀중한 골동서화를 많이 수집한 것도 이상적의 가르침에서 비롯된 것이거니와, 북경에 13차례나 다녀오면서 서구세력의 침략과 청나라의 몰락을 목격하고 개화사상의 선구자로 나서게 된 것도 이상적의 국제적인 안목에서 시작된 것이다. 오경석은 자신의 아들 오세창이 8세가 되자 집안에 가숙(家塾)을 설치하고 역관 수업을 시켰으며,16세가 되던 1879년 5월 역과에 합격하자 가숙을 철거하였다. 역관이자 서예가로 활동하던 오세창은 뒷날 삼일독립선언의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명으로 나서서 독립운동에 헌신했고, 해방 이후 서울신문사 초대 사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추사 김정희는 1840년에 제주도 대정에 유배되어 9년 동안 외롭게 살았다. 추사에게 시(詩) · 서(書) · 화(畵)를 배운 이상적은 중국에 다녀올 때마다 새로운 책과 중국 문인들의 편지를 가지고 스승을 찾아가 전달하였다. 그의 지극한 정성에 감동하여 추사는 그림을 한 점 그려 주었는데 바로 「세한도(歲寒圖)」이다. 세한(歲寒)은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의 잎이 나중에 시드는 것을 안다.” 고 한 공자의 말에서 따 왔다. 여러 친지가 유배객 김정희에게서 떨어져 나갔지만, 외국 여행 틈틈이 풍랑 거센 뱃길에 목숨을 걸고 제주도 유배지까지 찾아와 문안드리며 세상 소식을 알려준 제자에게 ‘세한(歲寒)’ 두 글자를 호(號) 아닌 호로 선물한 것이다.
그림에 “우선은 감상하라(藕船是賞)”고 썼는데, 우선은 이상적의 호이다. 이상적은 이 그림을 혼자 감상하지 않고 청나라 친구들에게도 보여 주었다. 제7차 사행을 마친 1845년 1월 13일에 오정진이 북경 우원(寓園)에서 연회를 베풀어 주었는데, 이상적은 이 자리에서 청나라 문인들에게 「세한도」를 보여 18명으로부터 시와 발문을 받기도 했다. 「세한도」는 현재 국보 제180호로 지정되어 있다.
<조선의 중인들에서 인용>


▼ 세한도(歲寒圖)(국보 180호) 진본을 특별전시회에서 관람하고 찍은 사진

▼ 특별전시회에 전시된 추사 초상과 청나라에서 발행한 이상적의 글을 모은 '은송당집'에 있는 이상적 초상

▼ 우선(藕船) 이상적(李尙迪) 묘 위치... 화적연과 비둘기낭폭포 중간쯤이다.

▼ 우선(藕船) 이상적(李尙迪) 묘... 주차를 민가 마당에 하고 오르면 금방 찾을 수 있다.

▼ 우선(藕船) 이상적(李尙迪) 묘 오르기 위해 민간 마당에 주차를 한다. 빈집으로 사람이 안살고 있다.

▼ 우선(藕船) 이상적(李尙迪) 묘를 가려면 윗집 마당을 통과해야 한다. 양해를 구하고 지나가시길...

▼ 윗집을 통과해서 산길로 접어들면 소로길이 나있다. 멀리 이상적(李尙迪) 묘가 살짝 보인다.

▼ 우선(藕船) 이상적(李尙迪) 묘

▼ 길에 들어서면 찾기는 쉽다. 묘비가 있는 묘가 하나 밖에 없다.

▼ 우선(藕船) 이상적(李尙迪) 묘비... 정확히는 사적비...

▼ 우선(藕船) 이상적(李尙迪) 사적비 내용

▼ 우선(藕船) 이상적(李尙迪) 묘 전경

▼ 우선(藕船) 이상적(李尙迪) 묘... 4월초인데 묘역이 잡풀이 무성하다. 후손께서 5월에 벌초를 하신다고 한다. 묘소 관리를 잘 하는 후손들은 1년에 두번이상씩 벌초를 한다. 봄에 한번 하고 추석 무렵에 한다.

▼ 우선(藕船) 이상적(李尙迪) 묘는 배위 설봉김씨와 쌍분으로 조성되어 있다. 상석은 설치하면서 방향이 조금 틀어진 것 같다. 우선 선생의 묘 좌향과 상석 좌향, 배위 좌향이 다 제각각이다. 특이하다. 

▼ 우선(藕船) 이상적(李尙迪) 묘표...

▼ 우선(藕船) 이상적(李尙迪) 묘 측경

▼ 우선(藕船) 이상적(李尙迪) 묘 현무와 입수도두...

▼ 우선(藕船) 이상적(李尙迪) 묘는 현무에서 우출맥으로 나온듯 하나 회전하면서 바깥쪽으로 급경사를 만들고 있어 정혈처는 안쪽으로 깊게 들어와야 한다.

▼ 우선(藕船) 이상적(李尙迪) 묘 후경... 앞쪽 조산이 희미하지만 삼태봉이다.

▼ 묘 좌향은 계좌정향으로 삼태봉으로 맞추었는데... 문제는 명당이 심하게 경도되어 재물이 힘든 형태이다. 앞쪽에 사철푸른 소나무를 식재하면 비보가 될 수 있다.

▼ 우선(藕船) 이상적(李尙迪) 묘 백호방은 낭떨어지라서 바람이 치고 들어온다. 이곳에도 바람을 막아주는 비보를 해줘야 한다. 묘 봉분이 전체적으로 많이 허물어졌는데 이는 바람의 영향이다. 직계후손이 안계시는듯 보이는데 그나마 문중에서 관리를 하고 있어서 다행이다.

▼ 우선(藕船) 이상적(李尙迪) 묘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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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방인야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