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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용인공원묘지 예술인들 묘

 

천주교 용인공원묘지는 광주,용인 답사 할 때마다 찾는 곳이다. 이곳에 김수환추기경 묘가 있어서다. 그런데 이곳에 문인들 묘가 있다는 것을 최근에 알았다. 일단 파악된 문인들 묘역을 지도로 꼼꼼히 살핀 뒤에 날을 잡아서 다녀왔다. 

묘역이 넓어서 한꺼번에 다녀오기는 쉽지 않지만 동선을 잘 짜면 편하게 다녀올 수도 있다. 이곳은 차를 가지고 갈 수 밖에 없는 곳이어서 먼저 차를 김수환추기경 묘 앞의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제일 먼저 전혜린-->박완서 묘역을 보고 내려와서 육당 최남선-->김영랑 묘를 보고 마지막으로 산 능선에 있는 고복수 묘를 답사하면 동선이 겹치지 않아 편리하다.

공원묘지에는 유명하신 분들이 많은데 누군가 알려주지 않으면 알기 어렵다. 관리사무소에 가도 잘 알려주지 않는다. 명확하게 고인의 이름을 대고 목적을 잘 말씀드려야 겨우 알려준다. 예전에 어느 공원묘지에 가서 이 곳의 유명하신 분들 묘를 알려달라고 했다가 핀잔만 잔뜩 듣고 왔던 기억이 난다.

용인에는 공원묘원이 많다보니 유명하신 분들도 많이 묻혀 있다. 그 중에서도 시인, 소설가 등 문인들이 많아서 용인시에서 문학인의 탐방로를 계획하는 것으로 보인다. 아직까지는 확실한 결과가 없는듯 보인다. 또 다른 용인공원묘원에는 청록파 시인 박목월, 양주동, 이원수 등의 문학인들의 묘가 있는데 이곳도 조만간 올려드릴 예정이다.

꽃이 만발한 산야를 오르내리면서 선현들 묘지를 찾는 사람들을 보면 주변 사람들이 이상하다 할만도 하다. 묘역을 사전에 완벽하게 준비해서 가면 누구한테 물어볼 일이 없으니 다행이지만 모를때는 바로 옆에 묘가 있는데도 몰라서 그냥 오기 일쑤다. 엊그제 찾아간 이상적선생 묘도 마을 입구에 있었지만 그 마을 사람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그러니 내가 꼬치꼬치 물으면 왜 쓸데없는 것을 묻냐는 식으로 나를 위 아래로 훑어본다. 세상이 험해서 뭘 물어봐도 잘 안가르쳐 주는 것이 요즘의 인심이다.

 

 

 

천주교용인공원묘원(天主敎龍仁公園墓園)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오산리에 있는 공원 묘지.
신자들의 편의를 위해 1967년 명동성당에서 최초로 묘지를 개발하였으나 관리·운영상의 어려움으로 1978년 8월초 서울교구청으로 이관되었다. 현재는 재단법인 천주교서울대교구유지재단에서 관리하고 있다. 1998년 묘지가 만장 처리된 이후로 매장 묘지 분양은 하지 않고 있다. 천주교 신자들의 수요가 늘어나는데 비해 추가 묘지 확보가 어려워지게 되면서 1991년 6월부터 20년 기한제 묘지 제도를 실시해오고 있다. 
골짜기 안쪽 전체 사면이 묘원으로 개발되어 있다. 매장 묘의 경우 신자들의 관리가 철저하여 매우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고 수목이 많이 식재되어 있어 공원처럼 아름다운 경관을 보이고 있다.
총면적은 712,028㎡이고 현재 20,723기가 매장되어 있다. 오산리 대지고개 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북쪽의 대지산에서 남쪽의 법화산으로 이어지는 산 능선의 동쪽 사면을 차지하고 있다. 국도 43호선으로 가다가 양촌에서 남쪽 본동 방향으로 작은 길을 따라 4㎞ 정도를 가면 된다. 이 도로는 비포장도로였으나 2007년 10월 말에 포장되었다.<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에서 인용>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
 
1890년 서울 출생으로, 본관은 동주(東州), 아명은 창흥(昌興), 자는 공육(公六)이다. 호는 육당(六堂)·한샘·남악주인(南嶽主人)·곡교인(曲橋人)·육당학인(六堂學人)·축한생(逐閑生)·대몽(大夢)·백운향도(白雲香徒)이다. 관상감(觀象監)에서 근무하며 한약방을 경영했던 아버지 최헌규(崔獻圭)와 어머니 진주(晉州) 강씨(姜氏)의 3남 3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1902년 경성학당에서 수학한 후 1904년 대한제국 황실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 도쿄부립제일중학교[東京府立第一中學校]에 입학하였으나 곧 중퇴하였다. 1906년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고등사범부 역사지리과에 입학하였으며, 같은 해 7월부터 대한유학생회에서 발간하는 『대한유학생회보』의 편집인으로 활동하였다. 1907년 6월 와세다대 정치학과 주관의 모의(模擬) 국회가 조선국왕이 일본에 알현하러 오는 가상의 상황을 토의 안건으로 삼자 이에 반발하는 한국인 유학생의 총대(總代)를 맡았고, 이로 인해 학교에서 퇴학당했다.
1906년 겨울 귀국 후 신문관(新文館)을 설립하고 1908년 11월 잡지 『소년(少年)』을 출판하였다. 1910년 3월 안창호(安昌浩)가 설립한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의 평사원 겸 변론과장을 지냈고, 같은 해 10월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를 설립해 조선의 고서(古書)를 발간하고, 조선어 사전을 편찬하고자 하였다.
한일강제병합 이후에도 1912년 『붉은 저고리』, 1913년 『아이들보이』, 1914년 『청춘』 등의 잡지를 발행하였다. 1919년 3·1운동 때에는 「독립선언서」를 작성해 일제에 체포되어 2년 8개월간 복역하기도 하였다.
1921년 10월 출옥하였고, 1922년 동명사(東明社)를 창립해 주간지 『동명』을 발행하였다. 1924년 『시대일보』를 창간하였고, 1925년 조선의 문화와 역사를 연구하는 계명구락부(啓明俱樂部)에 참여하였다. 1922년 『동명』에 「조선역사통속강화개제(朝鮮歷史通俗講話開題)」를 연재하였고, 1926년 「불함문화론(不咸文化論)」과 근대 최초의 창작 시조집 『백팔번뇌(百八煩惱)』를 간행하였다. 같은 해 옛 백제 지역을 방문한 『심춘순례(尋春巡禮)』, 1927년 『백두산근참기(白頭山勤參記)』, 1928년 『금강예찬(金剛禮讚)』을 발표하였다.
1928년 10월 조선사편수회 촉탁이 되었고, 같은 해 12월부터 조선사편수회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33년 12월 조선총독부 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회 위원, 1935년 2월 조선총독부 임시역사교과용도서조사위원회 위원을 지냈다.
1937년 11월 『재만조선인통신』 제39호의 「만주가 우리에게 있다」, 『삼천리』 1938년 10월호의 「건국대학과 조선청년」, 1939년 7월호의 「전쟁과 교육」, 1941년 6월호의 「동방고민족의 신성(神聖) 관념」등 일본의 전쟁수행을 지지하는 글을 기고하기도 하였다.
이밖에 잡지 『방송지우(放送之友)』에 1944년 3월 제2권 제3호 「도의(道義)는 이긴다」, 같은 해 4월 제2권 제4호 「신세계 건설의 도화선」, 1945년 1월 제3권 제1호 「특공대의 정신으로 성은(聖恩)에 보답합시다」 등의 글을 발표하였다.
광복 후 1949년 2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에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으나 곧 보석으로 풀려났고, 같은 해 5월 공판을 받았다. 1950년 한국전쟁 당시 해군전사편찬위원회에서 일하였고, 휴전 후 서울시사편찬위원회 고문을 맡으며, 언론을 통해 기고활동을 지속하였다. 1957년 10월 10일 사망하였다.
최남선의 일제시대 활동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제2조 제4·9·11·13·20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Ⅳ-17: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pp.690~730)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인용>

 

문화재지정 미지정
문화재명칭 천주교용인공원묘원(天主敎龍仁公園墓園)
소재지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오산로 154-62
관리자(연락처) 천주교서울대교구

 

▼ 천주교용인공원묘원 예술인들 묘 위치

▼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 묘 가는 길

▼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 묘역... 

▼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 묘 전경

▼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 묘비

▼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 묘비.... 후면에 독립선언서를 써놓았다.

▼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 신,구 묘비

▼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 묘 근경

▼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 묘 석물

▼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 묘 측경

▼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 묘 후경

▼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 부친 최헌규 묘, 아들 최한웅 묘

 

 

영랑(永郞) 김윤식(金允植)
 
본관은 김해(金海). 본명은 김윤식(金允植). 영랑은 아호인데 『시문학(詩文學)』에 작품을 발표하면서부터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전라남도 강진 출신. 아버지 김종호(金鍾湖)와 어머니 김경무(金敬武)의 5남매 중 장남이다.
1915년 강진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혼인하였으나 1년반 만에 부인과 사별하였다.
그뒤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관에서 영어를 공부하고 난 다음 1917년 휘문의숙(徽文義塾)에 입학, 이 때부터 문학에 대한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이때 휘문의숙에는 홍사용(洪思容)·안석주(安碩柱)·박종화(朴鍾和) 등의 선배와 정지용(鄭芝溶)·이태준(李泰俊) 등의 후배, 그리고 동급반에 화백 이승만(李承萬)이 있어서 문학적 안목을 키우는 데 직접·간접으로 도움을 받았다.
휘문의숙 3학년 때인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고향 강진에서 거사하려다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6개월간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0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아오야마학원[靑山學院] 중학부를 거쳐 같은 학원 영문학과에 진학하였다. 이무렵 독립투사 박렬(朴烈), 시인 박용철(朴龍喆)과도 친교를 맺었다.
그러나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인해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하였다. 이후 향리에 머물면서 1925년에는 개성출신 안귀련(安貴蓮)과 재혼하였다. 광복 후 은거생활에서 벗어나 사회에 적극 참여하여 강진에서 우익운동을 주도하였고, 대한독립촉성회에 관여하여 강진대한청년회 단장을 지냈으며, 1948년 제헌국회의원선거에 출마하여 낙선하기도 하였다.
1949년에는 공보처 출판국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평소 음악에 대한 조예가 깊어 국악이나 서양명곡을 즐겨 들었고, 축구·테니스 등 운동에도 능하여 비교적 여유있는 삶을 영위하다가, 9·28수복 당시 유탄에 맞아 사망하였다.
시작활동은 박용철·정지용·이하윤(異河潤) 등과 시문학동인을 결성하여 1930년 3월에 창간된 『시문학』에 시 「동백잎에 빛나는 마음」·「언덕에 바로 누워」 등 6편과 「사행소곡칠수(四行小曲七首)」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이 후 『문학』·『여성』·『문장』·『조광(朝光)』·『인문평론(人文評論)』·『백민(白民)』·『조선일보』 등에 80여편의 시와 역시(譯詩) 및 수필·평문(評文) 등을 발표하였다. 
그의 시세계는 전기와 후기로 크게 구분된다. 초기시는 1935년 박용철에 의하여 발간된 『영랑시집』 초판의 수록시편들이 해당되는데, 여기서는 자연에 대한 깊은 애정이나 인생태도에 있어서의 역정(逆情)·회의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다.
‘슬픔’이나 ‘눈물’의 용어가 수없이 반복되면서 그 비애의식은 영탄이나 감상에 기울지 않고, ‘마음’의 내부로 향해져 정감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요컨대, 그의 초기시는 같은 시문학동인인 정지용 시의 감각적 기교와 더불어 그 시대 한국 순수시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1940년을 전후하여 민족항일기 말기에 발표된 「거문고」·「독(毒)을 차고」·「망각(忘却)」·「묘비명(墓碑銘)」 등 일련의 후기시에서는 그 형태적인 변모와 함께 인생에 대한 깊은 회의와 ‘죽음’의 의식이 나타나 있다.
광복 이후에 발표된 「바다로 가자」·「천리를 올라온다」 등에서는 적극적인 사회참여의 의욕을 보여주고 있는데, 민족항일기에서의 제한된 공간의식과 강박관념에서 나온 자학적 충동인 회의와 죽음의식을 떨쳐버리고, 새나라 건설의 대열에 참여하려는 의욕으로 충만된 것이 광복 후의 시편들에 나타난 주제의식이다.
주요저서로는 『영랑시집』 외에, 1949년 자선(自選)으로 중앙문화사에서 간행된 『영랑시선』이 있고, 1981년 문학세계사에서 그의 시와 산문을 모은 『모란이 피기까지는』이 있다. 묘지는 서울 망우리에 있다가 지금은 천주교용인공원묘지에 있고, 시비는 광주광역시 광주공원에 박용철의 시비와 함께 있으며, 고향 강진에도 세워졌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발췌>

 

▼ 영랑(永郞) 김윤식(金允植) 묘 원경

▼ 영랑(永郞) 김윤식(金允植) 묘비... 시인인데 시 한구절도 없다.

▼ 영랑(永郞) 김윤식(金允植) 묘 측경

▼ 영랑(永郞) 김윤식(金允植) 묘 후경

 

전혜린(田惠麟)
 
평안남도 순천 출생. 법률가인 전봉덕(田鳳德)의 1남 7녀 중 장녀이다.
1953년 경기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였고, 같은 해 서울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하였으나 1955년 3학년 재학 중 전공을 독문학으로 바꾸어 독일로 유학하였다. 1959년 독일 뮌헨대학 독문학과를 졸업하고 이 학교 조교로 근무하였다. 유학 중 1955년 가톨릭에 귀의하여 막달레나(Magdalena)라는 영세명으로 영세를 받았으며, 이듬해 법학도인 김철수(金哲洙)와 혼인하였다.
1959년 5월 귀국하여 경기여자고등학교·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이화여자대학교의 강사를 거쳤고, 1964년 성균관대학교 조교수가 되었다. 펜클럽 한국본부 번역분과위원으로 위촉되어 일하기도 하였다. 1965년 1월 11일 31세로 자살하였으며, 뜻하지 않은 죽음은 전혜린의 총명을 기리는 모든 이에게 충격과 아쉬움을 남겼다.
독일 유학 때부터 시작된 전혜린의 번역작품들은 정확하고 분명한 문장력과 유려한 문체의 흐름으로 많은 독자들에게서 사랑을 받았다.
사강(Sagan,F.)의 「어떤 미소」(1956), 슈나벨(Schnabel,E.)의 「안네 프랑크(Anne Frank)-한 소녀의 걸어온 길」(1958), 이미륵(李彌勒)의 「압록강은 흐른다(Der Yalu Fliesst)」(1959), 케스트너(K○stner,E.)의 「화비안(Fabian)」(1960), 린저(Rinser,L.)의 「생의 한 가운데(Mitte des Lebens)」(1961), 뵐(Boll,H.)의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Und Sagte Kein Einziges Wort)」(1964) 등 10여 편의 번역작품을 남겼다.
그밖에 수필집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1966)와 『미래완료의 시간 속에』(1966)가 있고, 『이 모든 괴로움을 또 다시』라는 제명으로 1976년 대문출판사(大文出版社)에서 일기가 유작으로 출간되기도 하였다.
순수와 진실을 추구하고 정신적 자유를 갈망하던 전혜린의 모습은 지금까지도 당대의 새로운 여성상으로 평가받는 한편, 완벽한 정신세계를 지향하는 지성적인 현대 여성의 심리로서 분석되는 등 관심의 대상으로 지속되고 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인용>

 

▼ 전혜린(田惠麟) 묘 가는 길

▼ 전혜린(田惠麟) 묘

▼ 전혜린(田惠麟) 묘 전경... 왼쪽은 부친 묘, 뒷쪽에는 조부, 외조부 묘

▼ 전혜린(田惠麟) 묘비 전 후 측면

▼ 전혜린(田惠麟) 묘는 아주 작게 만들어져 있다. 묘비의 전헤린은 제자들이 평소 헤린이라고 쓴 스승을 위해 일부러 헤린이라고 썼다 한다.

▼ 전혜린(田惠麟) 묘 부모 묘

▼ 전혜린(田惠麟) 묘에서 박완서 묘로 가는 길

 

박완서(朴婉緖)
 
소설가. 1931년 경기도 개풍에서 태어나 1944년 숙명여자고등학교에 입학했으나 곧 호수돈여자고등학교로 전학했고 해방이 되자 다시 숙명여자고등학교로 돌아왔다. 이때 한말숙·박명성 등과 사귀었으며, 담임교사인 월북 소설가 박노갑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
1950년 서울대학교 국문과에 입학했으나 6·25전쟁으로 학교를 그만두었다. 오빠와 삼촌이 죽자 생계를 잇기 위해 미8군 PX 초상화부에서 일했으며, 이때 화가 박수근을 알고 그의 그림에 감명받았다. 1970년 〈여성동아〉에 장편 〈나목 裸木〉이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했고 이어 〈부처님 근처〉(현대문학, 1973. 7)·〈주말농장〉(문학사상, 1973. 10)·〈겨울나들이〉(문학사상, 1975. 9) 등 많은 작품을 발표했다.
1976년 〈동아일보〉에 〈휘청거리는 오후〉를 연재했다. 수필집으로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1977)·〈살아있는 날의 소망〉(1982) 등이 있으며〈서 있는 여자〉(1985)·〈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1989)·〈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1992) 등의 소설을 펴내 베스트셀러 작가로서 자리를 굳혔다. 40세의 늦은 나이로 출발하여 20년 동안 100편 안팎의 소설을 썼으며 많은 문제작품을 써냈다.
6·25전쟁의 아픔과 분단의 사회현실을 그대로 그려내고 개성을 잃어가는 순응주의를 날카롭게 비판했다. 1980년 한국문학작가상, 1981년 이상문학상, 1990년 대한민국문학상, 1993년 현대문학상, 1994년 동인문학상, 1999년 만해문학상, 2000년 인촌상, 2006년 호암예술상을 받았다. 지병인 담낭암으로 투병하다 2011년 1월 세상을 떠났다.<다음백과에서 인용>

 

▼ 박완서(朴婉緖) 묘 전경

▼ 박완서(朴婉緖) 묘비... 올해로 서거 10주년...

▼ 박완서(朴婉緖) 묘 후경

▼ 박완서(朴婉緖) 묘 측경

▼ 박완서(朴婉緖) 묘 내려오면서 원경 모습

 

고복수(高福壽)
 
1932년 콜롬비아레코드사가 주최한 전국신인가수선발대회에서 3위를 차지함으로써 가수의 길에 들어섰다.
오케이레코드에 스카우트되어 1933년 손목인이 작곡한 〈타향〉과 〈사막의 한〉을 불러 인기가수가 되었다. 훗날 〈타향살이〉로 개칭된 〈타향〉은 일제강점기 최고의 대중가요 중 하나로 꼽힐 만큼 크게 유행했다. 그후 1939년까지 오케이레코드의 전속가수로 활약하면서 〈짝사랑〉·〈휘파람〉·〈이원(梨園)의 애상〉·〈풍년송〉 등을 불러 인기 절정에 달했다. 그러나 1930년대 후반 남인수와 백년설이 등장하면서 인기가 수그러들어 조선악극단 등 무대공연 위주로 활동을 전환하게 되었다.
1940년 빅타레코드의 반도악극좌에서 활동하던 중 〈알뜰한 당신〉의 인기가수 황금심과 만나 1941년에 결혼하여 스타 커플로서 엄청난 화제를 뿌렸다. 일제강점기 말기 그는 황금심과 함께 '고복수와 그 악단'을 결성해 일본 등지로 공연을 다녔으며, 광복 후에는 전옥이 주관하던 백조악극단의 주요 단원으로 활약하였다. 한국전쟁이 일어난 1950년 북한군에 붙잡혀 의용군에 강제 입대되었으나, 그해 늦가을 국군에게 구출되어 군예대에 편입되어 활동하였다.
1957년 8월 서울 명동에 있는 시공관에서 가수생활 25년을 결산하는 은퇴공연을 가졌다. 1959년 우리나라 최초의 가요학원인 동화예술학원을 경영하면서 이미자·안정애 등 인기가수를 배출하였으나, 1960년 제작한 극영화 〈타향살이〉가 흥행에 실패하며 서적 외판원 생활을 하기도 했다.<다음백과에서 인용>


황금심(黃琴心)
 
황금심은 〈울산 아가씨〉 등 수많은 히트곡들을 남겼으며, 마이크 대신 육성을 고집할 정도로 아름다운 목소리를 지녀 꾀꼬리의 여왕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1934년 〈외로운 가로등〉으로 데뷔한 이후, 1935년 오케레코드 전속가수 선발 모집에서 1등으로 입상했다. 1938년 남자에 대한 여자의 애정을 적극적으로 표현한 파격적인 노랫말의 〈알뜰한 당신〉을 통해 인기가수의 자리에 올랐다. 1930년대 말에는 해외로 위문공연을 다니며 나라 잃은 동포들의 애환을 달랬다. 1970년대까지 4000여 곡을 발표하며 수많은 히트곡을 남겼고, 민요조의 구성진 창법으로 대중의 큰 사랑을 받았다. 1990년 원로 연예인들의 모임인 상록회 최고위원을 지냈으며, 1992년 대중문화에 기여한 공을 인정받아 옥관문화훈장을 받았다.<다음백과에서 인용>

 

 

▼ 고복수(高福壽) 황금심(黃琴心) 묘역 위치

▼ 고복수(高福壽) 황금심(黃琴心) 묘

▼ 고복수(高福壽) 황금심(黃琴心) 묘비

▼ 고복수(高福壽) 황금심(黃琴心) 묘 후경

 

 

천주교용인공원묘지(김수환추기경 묘)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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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방인야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