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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호 장군(崔湖 將軍) 묘
군산답사를 하면서 여러가지 근대문화유산은 봐야할 곳이 많은데 막상 묘지답사를 할만한 곳이 별로 안보인다. 여기저기 확인한 결과 임진왜란 때 활약한 최호장군 유지와 묘가 있어서 반갑기 그지 없다.
군산은 이름에서 풍기는 이미지는 산이 많을 것으로 보이지만 실은 나즈막한 산들이 군집을 이뤘다는 뜻으로 보는게 좋다. 원래 고군산군도(古群山群島)의 이름이 처음에는 군산도(群山島)라고 했는데 이는 섬의 모습이 산이 무리지어 있는 것 처럼 보여 군산(群山)이라는 이름이 태어난 것이다. 지금은 옛 고(古)자를 덧붙여 군산과 구별짓고 있다.
낮은 산이 구릉을 이루면 평야가 넓게 펼쳐져 풍수적으로 보면 인물보다는 재물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인지 이곳에는 큰 묘가 없고 이곳 최호장군 묘가 문화재로 지정된 유일한 묘가 아닐까 한다. 이번 답사에서 임피역사를 방문하다가 우연히 인근에 있는 애국지사 송병선 묘를 찾았지만 유명인 묘는 그리 많지 않은듯이 보인다.
최호장군 묘는 갑좌경향으로 서향이다. 원래부터 이곳에 묘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곳은 안산이 없어서 앞이 휑하니 열려있는 곳이다. 그래서 바람이 사정없이 불어온다. 주차장에서 볼 때 묘역은 3단으로 계단을 조성한 상단에 위치하고 장군의 묘 청룡쪽에는 부친과 아들, 손자 묘가 함께 있다. 묘역 우측 백호방에는 새로 만든 사당과 기념관이 있다.
묘역 뒤쪽으로는 진남정이라는 국궁활터가 있다. 원래 최호장군유지는 산 넘어 진남정을 가로질러 있는데 동향으로 있다. 이 활터를 조성하면서 산 용맥을 잘랐는지 최호장군 묘지 입수도두는 활터하고 막바로 경계를 이루고 있다. 좋은 기운이 들어온다고 볼 수 없다.
군산시에서 문화재로 지정하고 잘 가꾸어놓아 애국사상과 충효교육장으로 활용하고 있는데 답사객으로서도 아주 반가운 일인것 같았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선열들의 유지는 잘 보존하고 기억해야 한다.
최호장군유지(崔湖將軍遺址) 전라북도 기념물인 최호 장군 유지는 최호 장군의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무장으로서 여러 관직을 거치고 정유재란 때 전사한 장군과 관련된 유품과 군산시 향토 문화유산인 삼인보검 등이 보관되어 있다. 최호 장군 유지는 국도 26호선을 타고가다 최호 장군 교차로를 지나 대황 마을 버스 정류장에서 북쪽으로 최호 장군길을 거쳐 동쪽으로 원발산길을 따라 원발산 마을을 지나면 숲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근래에 새로 조성된 최호 장군 유지는 서쪽으로 숲 건너편에 위치하고 있다. 최호[?~1597] 장군은 1576년(선조 9) 무과에 장원 급제한 후 함경도 병마절도사, 충청도 수군절도사 등의 여러 관직을 거쳤다. 정유재란 때 칠천량 해전에서 전사하였다. 후손 최호선이 1729년(영조 5)에 사당을 최초로 건립하였고, 1906년에 보수하였으며, 1976년 4월 2일 전라북도 기념물 제32호로 지정되었다. 2002년 최호 장군 유지 성역화 사업에 따라 최호 장군 유지를 새로 조성하였다. 최호 장군 유지는 충의사와 삼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충의사는 정면 3칸, 측면 2칸 건물로 석축 기단 위에 자연석 주초를 놓고 기둥을 세운 후 소로 수장에 홑처마 맞배지붕을 올렸다. 목조 가구는 3량가이다. 전면에 툇간을 둔 전형적인 사당 형식의 건축물이다. 2002년 새로 조성된 최호 장군 유지에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충의사가 새로 지어졌다.. 최호 장군 유지는 원발산 마을 북쪽 숲 속에 동향하여 자리 잡고 있다. 최호 장군 유지의 뒤쪽 동쪽으로 새로 조성된 진남정이 위치하고 있고, 동쪽으로 역시 새로 조성된 최호 장군 유지가 서향하여 자리 잡고 있다. 충의사 건물을 담장으로 둘러싸고 동쪽에 삼문을 두었다. 최호 장군 유지에는 무과에 급제한 교지를 비롯하여 많은 벼슬장과 1596년에 선조가 하사한 삼인보검이 보존되어 있다.<군산시 문화관광에서 인용> 최호 장군(崔湖 將軍) 1536년 (중종 31년)~1597년 (선조 30년) 8월 27일 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 활약하다 칠천량 해전에서 전사한 무관. 1536년(중종 31년) 경주 최씨 최치원의 15대손 최한정의 사남 중 막내로 현 전라북도 군산시 개정면 발산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무인으로 1552년(명종 7년) 무과에 급제한 후 북방을 지키는 중요 요직을 두루 거친 유명한 노장군이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8년 전 1574년(선조 7년) 39세에 무과 병과에 급제 하면서 중앙 무대로 진출하게 되었다. 2년 후(선조 9년, 1576년) 무과 중시 갑과에 장원으로 합격한다. 이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서울에서 의주까지 2개월 동안 선조 일행의 파천 길을 뒤에서 지켰고 3개월 간 의주를 지켰다. 이후 9월 22일 함경남도 병마절도사로 임명받아 가토 기요마사를 상대로 의주를 수호하는 등 활약한다. 이윽고 선조 26년 4월 18일 1년 만에 서울이 탈환되고 10월 18개월 만에 선조는 서울로 환도하였다. 최호는 함경도와 두만강 일대의 야인들의 약탈 침범 속에서 민심을 안정시키고 치안 유지와 민생고 해결에 3년간 애썼다. 화의의 진행에 따라 싸움이 소강 상태일 때 최호는 휴직을 청원한다. 이미 전란 중에 아버지의 상을 당하였지만 전란 중 병마절도사의 직을 떠나지 못하고 비로소 선조의 윤허를 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정유재란이 일어나기 10개월 전 기복 출사, 즉 상복기를 마치기도 전에 충청도 수군절도사로 명받았다. 이후 충청 수사 부임 3개월에 이몽학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웠다. 1597년(선조 30년) 2월 26일 이순신이 파직된 후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자 그의 휘하에서 종군하다 정유년 7월 16일, 칠천량 해전에서 도주하는 원균을 뒤로 하고 끝까지 왜군에 맞서 싸우다가 이억기 등과 함께 전사했다. 임란이 끝난 6년 후 1604년(선조 37년) 공신 책록에서 이몽학의 난 평정의 공신으로 청난 공신 이등 공신으로 책록되었고, 정2품의 자헌대부에 병조판서, 판의금부사로 추증 되었으며, 계성군으로 봉군 되면서 충원공(忠元公)의 시호를 받았다.<나무위키에서 인용> |
문화재지정 | 전라북도 기념물 제32호 |
문화재명칭 | 최호장군유지(崔湖將軍遺址) |
소재지 | 전라북도 군산시 개정면 최호장군길 134 |
관리자(연락처) | 경주최씨 문중 |
▼ 최호장군유지(崔湖將軍遺址) 지도
▼ 최호장군유지(崔湖將軍遺址) 앞쪽에 있는 목공체험공방
▼ 최호장군유지(崔湖將軍遺址) 전경... 우측계단 맨 위쪽에 최호장군 묘지가 있고 좌측 끝에 사당이 있다.
▼ 최호장군(崔湖將軍) 묘 입구
▼ 최호장군유지(崔湖將軍遺址) 안내문
▼ 최호장군(崔湖將軍) 묘 전경
▼ 최호장군(崔湖將軍) 묘비
▼ 최호장군(崔湖將軍) 묘 입수도두...
▼ 최호장군(崔湖將軍) 묘 후경... 허허벌판이 펼쳐져 무안산을 매김된다. 바람을 조심해야 한다.
▼ 최호장군(崔湖將軍) 묘 후경... 아무래도 이상해서 20여년 전 사진을 찾아봤더니 앞쪽에 대나무를 식재했었다. 지금은 이 대나무를 모두 뽑아내고 허허벌판을 직접 마주하고 있는데 썩 좋은게 아니다.
▼ 최호장군(崔湖將軍) 묘 후룡자리는 국궁활터로 바뀌어 용이 사라졌다. 가운데 부분에 예전 최호장군유지가 남아있는데 언덕 너머에 있어서 보이지는 않는다.
▼ 최호장군(崔湖將軍) 묘 측경
▼ 최호장군(崔湖將軍) 부모 최한정(崔漢禎) 묘
▼ 최호장군(崔湖將軍) 부모 최한정(崔漢禎) 묘표... 글자가 마모되어 식별이 안된다.
▼ 최호장군(崔湖將軍) 부모 최한정(崔漢禎) 묘 후경
▼ 최호장군(崔湖將軍) 부모 최한정(崔漢禎) 묘 측경... 윗쪽이 최한정, 아랫쪽에 최호장군의 아들, 손자 묘가 있다.
▼ 최호장군(崔湖將軍) 아들 최몽란(崔夢鸞) 묘
▼ 최호장군(崔湖將軍) 아들 최몽란(崔夢鸞) 묘비
▼ 최호장군(崔湖將軍) 아들 최몽란(崔夢鸞) 묘 상석...
▼ 최호장군(崔湖將軍) 아들 최몽란(崔夢鸞) 묘 후경
▼ 최호장군(崔湖將軍) 손자 최효열(崔孝說) 묘
▼ 최호장군(崔湖將軍) 손자 최효열(崔孝說) 묘비
▼ 최호장군(崔湖將軍) 손자 최효열(崔孝說) 묘 상석
▼ 최호장군(崔湖將軍) 손자 최효열(崔孝說) 묘 후경
▼ 최호장군(崔湖將軍) 아들, 손자 묘 후경
▼ 최호장군(崔湖將軍) 유지 충의문
▼ 최호장군(崔湖將軍) 사당 측경
▼ 최호장군(崔湖將軍) 사당 삼문
▼ 최호장군(崔湖將軍) 사당 충의사
▼ 충의사 보관된 최호장군(崔湖將軍) 영정
▼ 최호장군(崔湖將軍) 유물전시관... 코로나로 문이 잠겨있다.
▼ 최호장군(崔湖將軍) 유물중 삼인보검(參寅寶劒) : 군산시 유형문화재 제 2호<사진:군산시청>
조선 전기 무신 최호 장군에게 선조가 하사한 호신용 보검.
삼인보검은 1590년(선조 23) 제작되어 1596년(선조 29) 최호 장군이 충청도 수군절도사로 임명될 때 임금으로부터 하사받은 보검으로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을 무찌르는데 이용한 검이다. 최호 장군은 함경도 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다가 의주로 피난한 선조를 옆에서 직접 호위하였고, 정유재란 때 원균의 통제사가 이끄는 연합 함대의 부산 해전의 선봉장으로 활약했다. 칠천량 해전에서 적의 주력 함대에 큰 타격을 주었으나 왜군의 집중 포화를 받고 62세에 순국했다. 최호 장군이 칠천량 전투에서 전사하자 선조는 직접 치제문을 내리기도 했다.
길이 94㎝ 가량의 삼인보검은 최호 장군이 받았던 교지와 교첩, 유서등과 함께 남아 있으며, 현재 군산 근대 역사 박물관에 영구 위탁되었다. 최호 장군이 직접 선조에게 하사받아 임진왜란 당시에 왜적을 무찌르는데 이용했던 것으로 역사적 가치가 크다.<군산시문화관광사이트에서 인용>
*삼인검 (三寅劒) : 인검(寅劍)은 호랑이를 뜻하는 “인(寅)”자가 들어가는 때에 제작하였기 때문에 양(陽)의 기운이 강하여 나쁜 기운을 물리칠 수 있는 힘을 지녔다고 여겼다. 인년(寅年), 인월(寅月), 인일(寅日), 인시(寅時) 네 가지가 모두 적용되는 시기에 제작된 칼을 사인검(四寅劍)이라고 한다. 칼 한쪽에는 북두칠성, 다른 쪽에는 “三寅劍(삼인검)”이 금상감 되어있다. 칼 상단에는 만자문(卍字文), 기하문이 상감되어 있고 칼자루에는 “三寅劍(삼인검)”이라고 은상감 되어 있다. 칼머리는 여의두문(如意頭文)이다.<국립고궁박물관유물이야기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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