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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제학(大提學) 박시용(朴時庸)

 

옥천, 영동지역 답사를 계획하고 동선을 확인해보니 거리가 상당히 멀어 자동차로 이동하는데만 1시간 이상이 소요되어 영동은 고속도로변에 있는 김수온 묘만 가려도 했는데 의외로 금강 가에 선현들의 생가가 많아서 생가탐방으로 방향을 전환하면서 영동도 자연스럽게 답사하게 되었다.

대제학 박시용 묘는 먼저 다녀온 분이 차량진입이 힘들다고 해서 일단 부딪혀보고 차량진입이 안되면 포기하려고 찾은 곳인데 의외로 묘역 입구까지 차량으로 진입이 가능했다. 오히려 생각하지 않은 체 찾은 곳이지만 괜시리 횡재한 기분이 들었다.ㅎ

대제학(大提學) 박시용(朴時庸) 묘역 입구에는 이 묘를 찾게된 연유를 심묘유래비로 자세히 기록해 놓았다. 그동안 실전되었던 묘를 지석을 확인해서 찾았다고 하니 후손들이 참 대단한 일을 한 것으로 보여진다. 조상을 이렇듯 받들고 유업을 잇는 모습을 보면 남의 문중이지만 존경심도 들고 그 후손들에게도 감사의 마음이 저절로 든다. 후손들이 자부심을 내세울만 하다고 보여진다.

새로 찾은 묘역을 올라 간산을 해보니 조안산에 아름다운 귀봉이 두개가 보인다. 좌우 용호가 잘 둘러주고 있고 현무는 어류산인데 청룡쪽으로 비켜있다. 영동에서도 깊은 산골에 해당하는 이곳에 그 옛날에 묘를 쓸 정도이니 후손발복에 대한 기대가 어느 정도인지 실감이 간다. 조안산의 사격을 보고 이 터를 잡은 듯 보인다. 묘비에 새겨진 좌향과 현장에서 확인한 좌향이 다소 차이가 있다. 그런데 백호방에 험한 암석이 드러나 있어서 지손계에서는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

이 넓은 터에 자리를 잡고 다른 문중은 들어오지도 못하고 오로지 밀양박씨들 묘역만 있는데 다소 어려운 면이 있으면 어쩌랴? 후손들 중에 인물은 분명히 나올테니 그것으로 만족을 해야하겠지...

 

대제학(大提學) 박시용(朴時庸)
 
박시용(朴時庸)의 자는 도부(道夫) 초명은 시무(時茂) 시호는 문간(文簡),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증조는 감찰어사 박혁공(朴赫公), 조부는 감무 박이온(朴而溫), 아버지는 평장사 박순중(朴純中), 배위는 전객시령 김영이(金鈴貽)의 따님 영산김씨이다. 
박시용(朴時庸)에 대한 자료가 별로 없어서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내용을 짜깁기 하여 재구성해 본다.
밀직군 박언인(朴彦仁) 복야공파 파조의 7세손으로 대대로 밀성 지금의 밀양에서 세거 하였다. 박시용(朴時庸)이 영산김씨와 결혼한 이야기가 있어 전한다.
박시용(朴時庸)이 밀양에서 개성으로 과거를 보러 가던길에 영산(고려의 영동의 옛 지명) 냇가에서 말을 매어놓고 큰 버드나무 아래서 잠시 쉬고 있었는데 그만 잠이 들었다. 그곳이 바로 영동읍 토금리 전객사령 김영이(金鈴貽)의 집 앞이었다. 전객사령 김영이(金鈴貽)가 낮잠을 즐기는데 황룡이 버드나무 아래서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신기한 꿈을 꾸어, 즉시 사람을 시켜 그곳으로 가서 보게하니 고하기를 영특한 젊은이가 안천(고려때 영동천의 지명)위에 있는 버드나무에 기대어 잠을자고 있노라 하였다.
김영이(金鈴貽)가 직접가서 상견해 보니 보통 젊은이가 아니어서 사랑하는 마음이 들어서 젊은이에게 말하길, "자네는 이번 과거에 반드시 장원급제 할 것이니  돌아갈 때 꼭 나를 찾아달라"고 하였다.
김영이(金鈴貽)는 그사이 밀양으로 사람을  보내 사위로 삼을 것을 청하였고, 박시용(朴時庸)은 장원하여 김영이의 넷째 딸과 정혼 하였다.
이렇게 하여 밀양에서 영동으로 이사를 하게되어 그후 벼슬은 전교시교감(錢校侍校勘), 감찰 규정 도관정랑(監察 糾正 都官正郞), 판도 좌랑(版圖佐郞)을 역임하였다. 자금어대(紫金漁袋)를 사하였고 성균직강 지제교(成均直講 知製敎)로 뒤에 대광문하 찬성사 우문관 대제학(大提學)에 이르렀으나 사양길로 접어드는 고려의 국운을 바로 잡을길이 없어 장인과 함께 영동으로 낙향하였다.
중국 진나라의 낙광(樂光)과 위개衛介)와 같이 경치가 아름다운 기산팔경에서 강학을 하는 한편 나라를 걱정하고 임금을 그리워하는 마음에서 매일같이 북향사배로서 여생을 보냈다 한다.<밀양박씨 충헌공파 홈페이지, 네이버까페 개미실사랑방, 기타 인터넷자료에서 발췌>


 

문화재지정 미지정
문화재명칭 대제학(大提學) 박시용(朴時庸) 묘
소재지 충북 영동군 심천면 기호리 산 35-2
관리자(연락처) 밀양박씨 복야공파

 

▼ 대제학(大提學) 박시용(朴時庸) 묘 위치

 

▼ 심묘유래비(尋墓由來碑)

 

심묘유래비(尋墓由來碑)
 
저 단(壇)은 260여년을 내려온 밀양박씨(密陽朴氏) 밀성대군(密城大君) 13대손 증(贈) 우문관(右文館) 대제학(大提學) 시(諡) 문간(文簡), 휘(諱) 시용(時庸)공과 그의 2자 한성판윤(漢城判尹) 천귀(天貴)공의 양대(兩代)의 제단(祭壇)이다. 양대(兩代)에 걸친 분묘(墳墓)가 380여년을 내려오다가 어떠한 연유(緣由)에서인지 실전(失傳)하여 영조(英祖) 무오(戊午) 서기(西紀) 1738년에 종중(宗中)공의(公議)로 저곳에 단(壇)을 축조(築造)하였으나 언제 실전(失傳)되었는지 확실(確實)한 문헌(文獻)은 없다.
 연(然)이나 미능(未能)변별(辨別)한 양대(兩代) 분묘(墳墓)지만 후손(後孫)들이 매년 끊이지 않고 벌초(伐草)는 하여왔고, 그간 많은 후손들은 안타까운 심정(心情)으로 항상 심묘(尋墓)의 일념(一念)만은 간직하여 오던 중 고분(古墳) 계하(階下)에 위치한 후손(後孫) 연천(漣川)공(公) 휘(諱) 광침(光琛) 묘소(墓所) 표음(表音)기(記)에 오래되어 희미(稀微)한 각자(刻字)를 발견하고 탁본(拓本)을 떠서 고증(考證)한 결과 상(上) 10보(步)가 고조고(高祖考) 판윤(判尹)공(公) 묘(墓)라는 것이 밝혀지고 각 문헌(文憲)과 각파(各派)의 구(舊) 족보(族譜) 등을 통하여서도 확증(確證)할 수 있어 서기(西紀) 1995년 3월10일 복야(僕射)공파(公派)대동종약회(大同宗約會) 대의원(代議員) 이사(理事) 합동(合同) 정기총회(定期總會)에서 만장일치(滿場一致)의 찬성(贊成)으로 대제학(大提學)공(公)과 판윤(判尹)공(公) 묘(墓) 위치(位置)를 확정(確定)하고 단(壇)은 기념물(記念物)로 영구(永久)히 보존(保存)토록 하였다.
양대(兩代)의 묘소(墓所)는 새로이 난계(蘭溪)공(公)·국당(菊堂)공(公)·이요당공(二樂堂公) 3파(派)가 성금(誠金)을 모아 축조(築造)하기로 합의(合意)하였다. 돌이켜 보건데 판윤(判尹)공(公) 묘(墓) 위치(位置)를 확증(確證)해 주는 각자(刻字)가 당대(當代)에 와서 뒤늦게나마 발견(發見)된 것은 전(全) 성손(姓孫)의 심묘(尋墓)정성(精誠)에 천심(天心)이 감동(感動)하여 260여년동안 변별(辨別)하지 못한 묘소(墓所)의 위치(位置)를 640여년이 지난 오늘에서야 계시(啓示)하여 준 것이라고 우리는 믿는다. 
이제 우문관(右文館) 대제학(大提學) 문간공(文簡公)과 한성판윤(漢城判尹)공(公)의 심묘(尋墓)의 오랜 숙원(宿願)이 풀렸으니 우리는 거족적(擧族的)으로 마음을 합(合)하여 묘역(墓域)을 성역화(城役化)해야 된다. 우리 모두 등운동(登雲洞) 좋은 자리에 새로운 마음의 고향(故鄕)을 건설(建設)하자. 특히 본(本) 공사(工事)에 성의(誠意)를 베푼 후손(後孫)들의 명단(名單)과 찬조(贊助)액(額)을 다음과 같이 표기(表記)한다.

서기(西紀) 1997년  6월  일
밀양박씨(密陽朴氏) 복야(僕射)공파(公派)대동종약회(大同宗約會)

회장(會長) 박 희 택 근찬(朴喜宅 謹撰)
후손(後孫)    주 범 근서(周範 謹書)

 

▼ 대제학(大提學) 박시용(朴時庸) 묘역... 아래쪽이 2자 박천귀, 위쪽이 박시용 묘

 

▼ 대제학(大提學) 박시용(朴時庸) 묘 전경

 

▼ 대제학(大提學) 박시용(朴時庸) 묘... 앞쪽이 배위 영산김씨 묘, 뒤에 봉분이 박시용 묘

 

▼ 대제학(大提學) 박시용(朴時庸) 봉분

 

▼ 대제학(大提學) 박시용(朴時庸) 묘비

 

▼ 대제학(大提學) 박시용(朴時庸) 묘 석물... 근자에 심묘를 해서 석물은 모두 최근 것이다.

 

▼ 대제학(大提學) 박시용(朴時庸) 배위 묘 후경

 

▼ 대제학(大提學) 박시용(朴時庸) 묘 후경

 

▼ 대제학(大提學) 박시용(朴時庸) 묘 백호방에 험한 바위가 드러나 있다. 썩 좋게 보지 않는다.

 

 

▼ 박시용(朴時庸) 묘 아래쪽에 2남 한성판윤(漢城判尹) 박천귀(朴天貴) 묘 전경

 

▼ 한성판윤(漢城判尹) 박천귀(朴天貴) 묘

 

▼ 한성판윤(漢城判尹) 박천귀(朴天貴) 묘비... 배위 옥천육씨와 합폄(合窆)

 

▼ 한성판윤(漢城判尹) 박천귀(朴天貴) 묘 석물

 

▼ 한성판윤(漢城判尹) 박천귀(朴天貴) 묘 후경

 

▼ 박시용5대손, 박천귀 고손인 연천공(漣川公) 박광침(朴光琛) 묘

 

▼ 연천공(漣川公) 박광침(朴光琛) 묘비... 오래되어 글자 판독이 어렵다.

 

▼ 연천공(漣川公) 박광침(朴光琛) 배위 숙인 제주고씨 묘비... 묘비 뒤면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기를... 원래 제주고씨 묘는 부군과 상하장(上下葬)으로 되어 있었는데 선조들 묘를 심묘하다보니 선조 묘와 너무 가까워 할 수 없이 부군과 합장을 하였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 연천공(漣川公) 박광침(朴光琛) 묘 석물

 

▼ 연천공(漣川公) 박광침(朴光琛) 묘 후경...

 

 

▼ 박시용 고손, 박천귀 증손인 동몽교관(童蒙敎官) 박형보(朴亨堡) 묘

 

▼ 박시용 고손, 박천귀 증손인 동몽교관(童蒙敎官) 박형보(朴亨堡) 묘비... 글자 식별이 희미해서 판독이 어렵다.

 

▼ 박시용 고손, 박천귀 증손인 동몽교관(童蒙敎官) 박형보(朴亨堡) 묘 후경

 

▼ 대제학(大提學) 박시용(朴時庸) 묘역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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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방인야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