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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일(李鎰)장군(將軍) 묘

 

 10여년 전에 이일장군 묘를 찾았었는데 그때 쓴 답사기를 보니 좋지 않게 쓴 것 같다. 그때 다녀왔는지 처음 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 답사를 하고 둘러보니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이일장군은 임진왜란 때 활약했던 무관인데 평판이 썩 좋지 못하다. 특히 위키백과에서는 임진왜란 최악의 졸장이라고 표현했다. 특히 이순신장군을 모함했다는 사실로 많은 지탄을 받는다.

지금 이일장군 묘역 주변은 오포~용인간 국도건설로 매우 어수선하다. 이곳 용인이씨 묘역 대부분은 이장이 결정되었고 이일의 8대조인 이사위 묘만 향토문화재인 관계로 보존되고 나머지 묘역은 다 옮겨가는 걸로 되었다.

묘역은 가파른 능선상에 위치하는데 앞쪽에는 당시 선조로부터 선물로 받은 말무덤이 있다. 예전에는 말무덤이라는 표식이 없었는데 최근에 어마총(御馬塚)이라고 묘비를 세웠다.

산 위쪽으로 올라가는 묘들은 앞쪽의 수려한 조안산을 바라보고 묘가 위치하는데 이곳도 예외는 아니어서 앞쪽에 근사한 귀인봉이 있다. 그러나 물길이 흘러내려가는 형세여서 재물은 부족해 보인다. 앞쪽 마을입구에 근자에 세운 신도비가 있다. 앞쪽이 도로공사중이라 접근하기도 어렵다. 조만간 공사가 끝나는 것으로 되어 있어서 공사 뒤의 주변환경이 기대된다.

 

이일(李鎰)장군(將軍)
 
이일(李鎰, 1538년 ~ 1601년)은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본관은 용인(龍仁)이며, 자는 중경(重卿), 시호는 장양(壯襄)이다.
1558년 무과 급제 후 경성판관, 전라좌수사 등을 역임하여 1583년 함경도 경원 부사로 이탕개의 난을 진압하였다. 1586년 이탕개가 다시 회령을 재침입하자 이를 다시 물리쳐 1587년 함경북병사가 되었으나, 1588년 녹둔도에 침입한 여진족에 맞서지 않고 부하들과 도망쳤다가 도망치길 거부하고 남은 이순신(李舜臣)과 이경록(李慶祿)이 토벌했다. 그러나 이일은 자신이 도망친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오히려 이순신을 모함했다. 선조는 이일이 신립과 친분이 깊다는 점 때문에 신립을 건드리지 않기 위해 이일을 처벌하지 않고 그 대신 이순신을 처벌했다. 1588년 1월, 북병사 이일은 400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여진족의 본거지인 추도를 기습 공격하여, 200여 호를 불태우고, 적 380여 명을 죽였으며, 말 30필, 소 20두를 획득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경상도순변사 이일은 왜군을 막기 위해 상주로 내려가려 했으나 이일이 이순신을 모함한 사실 때문에 이일은 군관들로부터 평가가 좋지 못했고 그래서 모두들 이일의 부장이 되려고 하는 것을 꺼려했다. 결국 이일은 장기군관 50명을 이끌고 병력은 현지에서 징집하기로 해서 상주에서 전투를 벌였으나 징집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데다가 그나마도 이일을 따라 온 장기군관 50명 중 20명 이상이 도주하여 크게 패했다. 원래 5000명 이상 징집해야 왜구를 막을 수 있었으나 이일이 징집한 병력은 고작 800명 수준이였으며 그나마 그 병력도 전투가 시작되면서 조금씩 도망쳐 실제로는 훨씬 적은 병력이였다. 이후 이일은 충주에 주둔한 신립(申砬)의 군대로 도망쳤다. 그러나 신립마저 충주 탄금대 전투에서 패해 자결하자 황해도와 평안도로 도망쳤다. 

이 때 세자 광해군을 3,000명의 군사로 시위하다가 평양 왕성탄전투(王城灘戰鬪)에서 왜적 80여 명을 사로잡기도 하였다. 조정에서는 패주한 죄가 큰 것을 들어 처벌을 요청하는 신하도 있었으나, 경험이 많은 무장이라 해 용서하였다.
그 뒤 지중추부사·비변사당상·훈련원지사를 지내면서 군사들을 조련시켰으며, 한양이 수복되자 우변포도대장이 되어 난리를 치른 수도의 치안 유지에 힘썼다. 또한 충청도에서 송유진(宋儒眞) 등의 난이 일어나자 순변사로 뒷수습을 맡았다.
1595년 왕의 특지로 다시 함경도북병사가 되고, 지중추부사·행호군을 거쳐 함경도남병사가 되었다. 1601년 부하를 죽였다는 살인죄의 혐의를 받고 붙잡혀 호송되다가 정평에서 죽었다. 좌의정에 추증되고, 시호는 장양(壯襄)이다. 저서로는 『증보제승방략(增補制勝方略)』이 있다.

잦은 무고와 군무이탈로 평가는 최악 수준이다. 원균이 비교대상일 정도로 이일은 후대의 평가가 매우 나쁘며 그 일은 녹둔도에서 재직중이던 시절 이순신을 모함한 일로부터 비롯되었다. 이순신은 분명 적과 맞서 싸워서 승리를 달성하고 추가로 납치된 조선 백성 60여 명을 구출한 공로가 있음에도 이일은 이런 이순신에게 죄를 씌웠기 때문에 평가가 좋을 수가 없다.
적어도 신립은 탄금대 전투에서만큼은 목숨을 바쳐가며 싸워 장렬히 전사했지만 같은 장소에서 싸우던 이일은 여기서마저 또다시 군무이탈을 했기 때문에 신립보다 평가가 더욱 나쁘다.<위키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서 발췌>

 

문화재지정 향토문화재 제21호
문화재명칭 이일(李鎰)장군(將軍) 묘
소재지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매산리 산 108-1
관리자(연락처) 용인이씨

 

▼ 이일(李鎰)장군(將軍) 신도비 전경

 

▼ 이일(李鎰)장군(將軍) 묘역

▼ 이일(李鎰)장군(將軍) 묘 앞에 있는 어마총...

▼ 이일(李鎰)장군(將軍) 묘 전경

▼ 이일(李鎰)장군(將軍) 묘비

▼ 이일(李鎰)장군(將軍) 석물

▼ 이일(李鎰)장군(將軍) 묘 입수도두

▼ 이일(李鎰)장군(將軍) 묘 후경... 앞쪽마을  입구에 신도비가 있다.

 

 

▼ 이일(李鎰)장군(將軍) 묘 동영상

 

 

이사위, 이백지 부자 묘 바로가기yacho2040.tistory.com/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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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방인야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