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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의 봄 이원수(李元壽), 오빠생각 최순애 묘

 

용인공원묘지에 있는 박목월 문학공원(박목월 묘)을 가보려고 여러번 기회를 봤으나 못가봤는데 근자에 천주교 용인묘지를 찾다가 박목월 묘를 드디어 찾았다. 그런데 다녀와서 답사기를 쓰려고 여기저기 뒤졌더니 같은 용인공원묘지 안에 여러 문인들의 묘가 있다고 한다. 그런데 묘지 위치 같은 것은 없고 묘지 번호만 겨우 찾았다.

 

엊그제 여주에 일이 있어 다녀오면서 일부러 용인공원묘지를 들러 우선 이원수, 양주동 묘를 찾기로 했다. 그런데 어디에도 찾아가는 방법이 나온 답사기가 없어서 맨땅에 해딩하는 심정으로 일단 용인공원묘지 관리사무소를 찾아들어갔다.

코로나 시국에 여러모로 힘든 근무인데도 담당자들이 무척 친절하게 도와주셨다. 감사하게 생각한다. 말로 설명을 해도 찾아갈 수가 없을 것 같았는데 거기 근무하시는 관리인 한분을 내게 붙여주셨다. 그분과 함께 묘역을 올랐다. 이곳은 묘역에 묘지번호가 없다. 그러니 애초에 혼자서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곳이다. 관리인께서 이원수 묘와 양주동 묘를 직접 안내해 주셔서 아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나는 내가 이렇게 어렵게 찾았으니 다른 사람들도 어렵게 찾으라고 위치를 감추거나 요리조리 빼는 것은 하지 않는다. 요즘은 유튜브 시대이다보니 유튜브 하시는 분들은 이래저래 상업적으로 하시다보니 이런 것을 올려야되나 생각도 들지만 이게 돈벌이가 된다면 그분의 능력일테고 나는 내가 좋아 쫒아다니니 이것도 팔자 아닌가 싶다. 아무튼 아직까지는 내가 다녀온 묘역은 거의 예외없이 안내해 드리니 그 마음은 이해해 주시길 바란다.

 

이원수는 '고향의 봄' 동요로 널리 알려진 아동문학가이며, 그의 부인 최순애도 '오빠생각'으로 국민동요라고 할 수 있는 두 동요의 시인이다. 오빠생각은 최순애의 오빠 최영주(최신복을 개명)를 모델로 하여 쓴 동요이다. 일전에 망우리 공원묘지에 있는 최신복 묘역을 포스팅할 때 자세히 쓴 기억이 난다.

 

남현동 예술인 마을에 미당 서정주 집 옆에 이원수 최순애 집이 있었다고 들었다. 한동안 미당 집을 방문하고 실내에 전시된 미당 유물도 관람하고 했었는데 한동안 가보질 못했다. 요즘 뜻있는 분들이 예술인마을에 새로운 콘텐츠를 개발하여 활성화하려고 하는 것을 유튜브를 통해 봤다.

 

이원수 최순애 묘는 용인공원묘지 가8구역에 있는데 이곳 묘역은 묘지번호를 새겨넣지 않아서 번호가 의미가 없다, 오로지 먼저 다녀오신 분들의 수고로운 답사기만이 이정표가 될 수 있다. 매번 공원묘지 관리인께 부탁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자세히 올려드리니 참고하셔서 다녀오시길 바란다.

 

[망우리공원묘지#26]아동문학가 최영주(崔泳柱:최신복) 묘 바로가기

 


동원(冬原) 이원수(李元壽)

 
경상남도 양산 출신. 1930년 마산상업학교를 졸업하고, 함안 가야금융조합에 근무하다가 상경, 1945년 경기공업학교 교사가 되었다. 이어 출판계로 전직하여 1947년 박문출판사 편집국장, 1960년 삼화출판사 편집장 등을 역임하고, 1965년 경희여자초급대학 강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문학 단체에도 적극 참여하여 조선프로레타리아문학동맹 아동문학부 맹원으로 활동했으나, 동란 후에는 한국문인협회 이사, 한국문인협회 아동문학분과위원장, 한국아동문학가협회 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1926년 동요 「고향의 봄」이 방정환(方定煥)에 의하여 『어린이』에 뽑힘으로써 문단에 나와 윤석중(尹石重) 등과 ‘기쁨사’ 동인이 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하였다.

외형률 중심의 재래식 동요에서 내재율 중심의 현실참여적 동시를 개척하여 「헌 모자」·「보리방아 찧으며」·「교문 밖에서」·「찔레꽃」·「이삿길」·「양말사러 가는 길」 등 자유동시를 확립한 대표적인 작품들을 남겼다. 또한, 장편동화 및 아동소설(소년소설)을 확립하는 데 선구적 업적을 남기기도 하였다. 「숲속나라」(1948)는 최초의 장편동화의 시도이며, 『오월의 노래』(1954) 등은 본격적인 소설적 구성과 표현을 구사한 작품이다.

작품활동 외에도 끊임없이 비평 활동을 하면서 비평 부재의 아동문학계에 아동문학이론을 확립하였다. 1950년대 말부터 1960년대에 걸쳐 신문·잡지를 통하여 시평·월평·작가론을 계속 발표하며 아동문학의 본질에 관한 기초이론을 전개하였다. 1966년에는 『교육자료』에 10회에 걸쳐서 「아동문학입문」을 연재하였다.

이원수의 작품은 초기의 율동적이며 감각적인 경향에서, 1940년대 동시 「어머니」(『아이생활』, 1943.9)에 나타난 바와 같은 저항적 현실 의식이 강하게 반영된 경향으로 변천하였다. 6·25동란 이후에는 동요·동시보다는 동화·아동소설에 주력, 현실을 직시한 고발적 사실주의 아동소설을 발표하였다.

이원수의 작품에 등장하는 아동은 세속적 의미의 불행한 요소를 지니고 있다. 전기의 동요·동시로부터 「숲속나라」·「라일락언덕」·「신의 합창」 등에 나오는 불행한 아이들이 현실적 불행을 인내와 끈기로 극복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1970년 ‘고마우신 선생님상’을 받았고, 1973년 한국문학상·대한민국문화예술상, 1978년 예술원상(문학부문), 1980년 대한민국문학상(아동문학본상)을 받았다. 1968년 마산 성호공원에 「고향의 봄」 노래비와 1984년 서울 어린이대공원에 문학비가 건립되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인용>

1940년부터 1945년 사이에 동시 두 편, 자유시 한 편, 수필 두 편 모두 다섯 편의 친일 작품을 조선금용조합연합회 기관지 《반도의 빛 (半島の光)》에 발표했다. 1942년 8월에 실린 친일 동시 《지원병을 보내며》 에서는 일본이 벌인 태평양 전쟁에 참전할 지원병을 위해 후방에서 병역봉공을 다해야 한다고 표현했으며, 자유시에서는 농민시 형식을 빌려 농업보국에 정성을 쏟아 총후봉공의 완수를, 수필에서는 편지글 형식을 써서 어린이들이 하루바삐 내선일체와 황국신민이 될 수 있도록 어른들이 노력해야 함을 강하게 주장했다. 이로 인해 그는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문화예술 중 연극영화 부문에 선정되었다.<위키백과에서 발췌>


 

문화재지정 미지정
문화재명칭 동원(冬原) 이원수(李元壽) 묘
소재지 경기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초부리 699(용인공원묘지 가8-816호)
관리자(연락처) 용인공원묘지

 

이원수와 최순애
 
문학과 글이 매개가 되어 쌍을 이룬 문인들은 많다.<중략> 
마산의 아름다움이 깃든, 온 국민의 노래 '고향의 봄'을 쓴 이원수도 그 일생의 반려가 같은 동요시인인 최순애다. "뜸북뜸북 뜸북새/논에서 울고..."로 시작되는 '오빠생각'으로 이원수보다 먼저 文才를 세상에 알린 뛰어난 여류작가였다. 이원수는 잘 알려진 것처럼 평생을 어린이들을 위한 글쓰기와 보살핌으로 일관된 삶을 살아갔다. <중략>

이원수(1911-1981)와 최순애(1914-1998)가 만나 연을 맺은 것도 다분히 동화적인 요소가 있다. 어릴 적부터 아동문학에 심취해 활동과 글짓기에 몰두하던 이원수가 '고향의 봄'을 소파 방정환이 내던 '어린이'에 발표한 것이 마산공립보통학교(성호초등학교) 5학년이던 1926년 4월, 그의 나이 15세 때다. 하지만 이원수보다 3살 아래인, 경기도 수원에 살던 최순애는 멀리 떠난 오빠를 그리워하며 '오빠생각'을 썼고 이 동시가 이원수보다 몇 달 전인 1925년 11월에 역시 '어린이'를 통해 발표되면서 둘 간의 인연이 시작된다.
둘과의 관계에 있어서 먼저 손을 내민 쪽은 아무래도 이원수인 것 같다. '고향의 봄'을 발표하기 전, 이원수는 '오빠생각'에 감동하고 있었고, '고향의 봄'으로 자신도 아동문학의 전국적인 반열에 함께 서면서 최순애와 서신교환을 하게 된다. <중략>

둘 간의 편지는 해를 거듭하면서 열기를 띠어갔고 이게 사랑으로 변하면서 장래를 기약하는 사이로 발전하는데 그 무렵이 1935년이다. 둘이 혼인으로 맺어지는데 있어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최영주, 바로 '오빠생각'의 오빠인 최순애의 오빠다. 서신으로 사랑이 싹터 열매를  맺으려는 무렵, 이원수에게 사단이 생긴다. 항일사상의 '함안독서회'사건에 연루돼 일본경찰에 체포된 것이다. 혼담이 오가는 와중에 신랑 쪽에 생긴 관재(官災)아닌가. 최순애 집에서는 혼인을 저어하는 분위기가 인다. 이런 상황에서 나서 결혼은 적극 추진한 사람이 바로 최순애의 오빠 영주였던 것이다. 
최영주도 동생 순애와 마찬가지로 방정환 등과 더불어 어린이문화와 계몽운동을 하면서 '개벽'誌를 펴내던 선각자였다. 배제고보를 나와 일본유학까지 한 최영주는 일본경찰의 요시찰인물로 전국을 떠돌다 한창 나이에 요절한, 최순애가 항상 마음에 담아두었던 잊지 못할 오빠였다. <중략>

마산청년 이원수와 수원처녀 최순애는 이런 우여곡절 끝에 1936년 6월6일 결혼해 마산 산호동에 신혼살림을 꾸린다. 이원수는 ‘함안독서회’ 사건으로 일 년 여 간 영어생활을 한 후 그해 1월 출옥했으니,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는 가난한 신혼살림이었다. 그 무렵 이원수는 어찌어찌해 ‘한성당건재약방’에 일을 얻어 호구로 삼은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다 그 이듬해 원래 다니다가 독서회사건으로 파직됐던 ‘함안금융조합’에 복직되면서 생활이 조금 펴진다. 장녀 경화가 태어난 때가 그 무렵이다. 이원수를 둘러싼 이른바 ‘부왜(附倭)’의 친일(親日)글 논란이 지펴 진 곳이 바로 이 금융조합이다.
해방과 함께 이원수는 서울로 올라온다. 경기공업고등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하기도 했고, 카프(Kapf) 문학에도 참여했고 박문출판사 편집국장을 맡아 출판사 일 등도 했다. 그러면서도 작품 활동은 소홀하지 않았다는 건 그가 죽고 난 후 펴내어진 방대한 규모의 ‘이원수 전집’을 통해 드러난다. 6.25동란 중 ‘1.4후퇴’의 혼란스런 와중에서 이원수 부부는 아이들을 잃어버리는 환난을 겪기도 한다. 그나마 큰 딸은 찾았지만, 아이들 중 막내 딸 상옥과 간난 사내아이 둘은 잃어버린다. 이원수와 최순애는 이들 아이들 잃은 슬픔이 평생의 멍에가 된다. 이원수는 이 비극을 동화 ‘꼬마옥이’에 담았다. <중략>

이원수. 최순해 부부가 마지막까지 함께 살며 보낸 곳은 서울 관악산 아래 남현동이다.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에 가기위해 넘었던 남태령이 가까운 곳이라 붙여진 이름이다. 여기에 1960년대 말경 문인과 예술인들을 위한 집들이 조성되면서 이들 부부도 1970년 답십리에서 이곳에 가까스로 집을 마련해 이사 와 살았다. 서정주 시인이 바로 이웃이었다. 이 무렵 이원수는 ‘아동문학가협회’ 초대회장을 맡고 있었는데, 회갑을 맞아 ‘고향의 봄’을 타이틀로 아동문학집을 낸 것도 이때쯤인 1971년이다. 이 무렵부터 세상을 뜬 1981년까지 10년간이 이원수로서는 최순애와 부부로서 가장 평안하게 보낸 시기가 아닌가 싶다.<중략>

이원수는 1981년 1월 세상을 떴다. 아내 최순애는 이원수의 못 다한 배려 덕인지 세상을 더 살다 1998년 6월 남편 곁으로 갔다. 아마도 둘은 지금쯤 저승에서도 알콩달콩 재미나게 살고 있을 것이다.<네이버블로그 '사람' 이원수와 최순애, darby4284님글에서 인용>

 

▼ 동원(冬原) 이원수(李元壽) 최순애(崔順愛) 묘비

▼ 용인공원묘지 안내도... 이것으로는 대략적인 위치를 찾을 때 활용한다.

▼ 동원(冬原) 이원수(李元壽) 최순애(崔順愛) 묘... 박목월 문학공원은 찾기 쉬운 곳에 있어서 박목월 문학공원을 기점으로 하여 찾아야 한다.

▼ 동원(冬原) 이원수(李元壽) 최순애(崔順愛) 묘... 가8구역 주차장에 차를 주차한 후 화살표 방향으로 가면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아무 것도 없을 때야 힘들지만 표식이 있으면 핸드폰 위성사진을 참조하면 쉽다.

▼ 동원(冬原) 이원수(李元壽) 최순애(崔順愛) 묘

▼ 동원(冬原) 이원수(李元壽) 최순애(崔順愛) 묘... 문학비 하나라도 있을 줄 알았는데... 조금 아쉽다.. 두분의 동시 하나씩 앞뒤로 새겨서 해놓으면 찾는 참배객들에게 작은 위안이라도 될텐데... 그런 면에서 박목월 문학공원은 아주 화려한 편이다.

▼ 동원(冬原) 이원수(李元壽) 최순애(崔順愛) 묘 전경

▼ 동원(冬原) 이원수(李元壽) 최순애(崔順愛) 묘비 전, 후

▼ 동원(冬原) 이원수(李元壽) 최순애(崔順愛) 묘 측경

▼ 동원(冬原) 이원수(李元壽) 최순애(崔順愛) 묘 옆에 잔디장으로 해놓은 분이 있는데... 누구 묘인지는 잘 모르겠다.

▼ 동원(冬原) 이원수(李元壽) 최순애(崔順愛) 묘 후경

▼ 동원(冬原) 이원수(李元壽) 최순애(崔順愛) 묘비 측면에 생몰연대가 적혀 있다. 묘는 뒤에 언덕을 등지고 앞쪽 개울을 마주하여 전저후고 형태를 취했다. 경사로에 조성하다보니 안산이 비스듬하게 생겼다.

▼ 동원(冬原) 이원수(李元壽) 최순애(崔順愛) 묘 후경

▼ 동원(冬原) 이원수(李元壽) 최순애(崔順愛) 묘 찾아오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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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방인야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