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삼호정(三湖亭) 터는 처음 표석답사를 시작할 때는 없었는데 뒤에 새로 추가된 표석이다. 그래서 이번에 용산, 마포지역 표석을 다시 답사할 때 포함시켜 답사를 했다. 이곳은 용산성당을 중심으로 높은 언덕이 있는 곳인데 아마도 한강이 보이는 언덕 위에 삼호정 정자가 있지 않았을까 추정해 본다.

그런데 삼호정 한자가 표석에는 三好亭으로 되어 있는데 모든 자료에는 三湖亭으로 되어 있어서 헷갈린다. 오류인지 원래 三好亭인지 잘 모르겠다. 용산구문화관광 사이트에서도 三湖亭의 오류라고 보는듯 하다. 빨리 정리가 되었으면 하고 바래본다.

삼호정은 김금원, 김운초 등 미녀 시인들의 삼호정(三湖亭) 시회(詩會)가 벌어진 곳으로 유명하다. 아마도 여류시인들의 시회로는 최초가 아닐까 생각든다. 금원의 일생을 살펴보니 재주가 뛰어나고 금강산을 가기 위해 남장을 한 사실도 있는 것으로 봐 당시 신분사회에 적잖은 불만을 지녔을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 마음을 시회(詩會)를 통해 풀어냈을 것이다. 

현재 삼호정(三湖亭) 터 표석은 산천동부군당 아래 산천동 마을마당 소공원 화단에 움푹 들어가 있어서 자세히 살펴보지 않으면 잘 보이지 않는다. 새로 설치한 표석은 플라스틱으로 되어 있어서 품격이 떨어지고 시민들이 보기에 중요한 옛 터 표식으로 인식도 안된다. 예전 돌로 된 표석이 가격이 많이 비싼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돌 표석이 주는 무게감과 품위면에서 우리에게 주는 느낌이 다른 것 같아서 나는 돌 표석을 선호한다.


▣ 삼호정(三湖亭)


삼호정(三湖亭)은 용산 산머리의 남쪽 아래쪽에 있었던 정자로, 조선시대에 김금원, 김금초 등 여류 시인들이 자주 올라와 아름다운 한강과 주변을 내려다보며 주옥같은 시를 읊던 정자였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로 추정되는 시기에 이 정자는 없어졌고, 그 일대에는 수녀원과 성당이 들어섰다. 이 정자로 인해 인근에 ‘삼호정’이란 이름이 들어간 삼호정고개, 삼호정 마을 등이 생겼다.


생몰연대가 정확하지 않은 조선 헌종 때의 여류시인 금원(錦園, 1817~?)은 원주 출신으로 삼호정시단(三湖亭詩壇)의 동인이다. 시랑(侍郞) 김덕희(金德熙)의 소실로 어려서부터 글을 배워 경사(經史)를 통독하였고, 고금의 문장을 섭렵하여 시문에 능했다.

평생 남자로 태어나지 못한 것을 한탄하여, 같은 시우(詩友)이며 고향 친구인 죽서(竹西)의 《죽서집》 발문에서, “함께 후생에는 남자로 태어나 서로 창화(唱和)했으면 좋겠다”는 글을 남길 만큼 남성위주의 양반제도에 한을 간직했다.

1830년(순조 30) 3월 남장을 하고 고향인 원주를 떠나 여러 곳을 거쳐 금강산을 구경하던 중 만난 인연으로 고향인 원주로 돌아가는 대신에 서울로 시랑(侍郞)이며 규당(奎堂) 학사인 김덕희를 찾아와 그와 인연을 맺어 소실이 되었다. 《한국의 여행 문학》 이화여자대학 출판부. 2006.3

 

1843년(헌종 9) 27세로 문명(文名)을 떨쳐서 세상에서 ‘규수 사마자장(司馬子長)’이라고 불렀다.

1845년(헌종 11) 남편을 따라 충청도·강원도·황해도·평안도 일대, 즉 호동서락(湖東西洛) 등의 명승지를 두루 구경하고, 또 내·외금강산과 단양일대를 2년 동안 두루 편력하면서 시문을 메모했으며, 이때의 여행기인 《호동서락기》(湖東西洛記)를 남겼다. 


오랜 국내 여행 생활을 끝내고 1847년 다시 서울에 돌아와 남편의 별장인 용산(龍山) 삼호정에서 김운초(金雲楚), 경산(瓊山), 박죽서(朴竹西), 경춘(瓊春) 등의 여류시인들과 시를 읊으며 여성시단을 형성하여 우수한 시와 글로 당시의 남성시단에 도전하며 여생을 보냈다. 대부분의 삼호정 시단 동인들은 기생 출신이거나 소실들이었는데, 김운초는 김이양의 소실, 박죽서는 서기보의, 경산은 이정신의 소실이었다.

 

《조선의 여성들》이란 책에서는 부윤이 된 김덕희를 따라 의주로 간 금원이 김덕희가 벼슬을 물러날 때 함께 서울로 돌아와 삼호정(三湖亭)에 머물렀다면서 삼호정 시회가 태어난 과정을 비교적 자세히 서술하고 있다.


“이때 (금원의) 나이 서른한 살이었다. 삼호정은 용산(지금의 원효로에서 마포로 넘어가는 삼개고개)에 있던 김덕희 소유의 정자이다. 당시 용산 한강 부근은 풍광이 좋아 사대부들의 정자나 별장이 많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강가에 자리잡은 삼호정은 특히 경치가 아름다웠다.

날씨가 좋을 때면 금원은 동생인 경춘, 고향 친구인 죽서(竹西), 기녀로 있을 때 종종 어울리던 시인 운초(雲楚), 이웃에 사는 경산(瓊山) 등 마음이 맞는 네 친구를 삼호정으로 부르곤 했다. 봄이 오면 꽂과 새가 기분을 돋우었고 강변이라 종종 끼는 안개와 강물 위를 떠가는 구름은 젊은 날의 꿈을 떠오르게 했다. 간혹 세차게 들이치는 비바람도, 눈 내리는 정원도 아름답지 않은 때가 없었다. 금원과 친구들은 언제 모여도 반갑고 애틋하고 즐거웠다. 처지가 비슷했고 시와 음악을 좋아하는 것도 비슷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이들은 모여서 거문고를 뜯고 시를 지으며 한껏 즐기다 헤어졌다.

금원의 삼십 대는 이렇게 마음에 맞는 친구들과 어울리며 지나갔다. 남성들의 시회는 많았지만, 이렇게 여성들이 모여 시를 짓고 즐기는 모임은 흔치 않았다. 그래서 뒤에 사람들은 이 모임이 금원이 살던 삼호정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고 해서 ‘삼호정시회’라 부르기도 했다.“

<카페 다음 배우리의 땅이름 기행-배우리의 삼호정과 용산의 풍류에서 발췌>


▼ 삼호정(三湖亭) 터 표석


▼ 삼호정(三湖亭) 터 표석



▼ 삼호정(三湖亭) 터 표석... 리버힐레미안아파트 201동으로 찾으면 쉽다.



▼ 삼호정(三湖亭) 터 표석



▼ 삼호정(三湖亭) 터 표석... 산천동 마을마당 소공원에 위치한다.



▼ 삼호정(三湖亭) 터 표석



▼ 용산구에서 설치한 삼호정(三湖亭) 터 표석... 훨씬 더 자세하고 정감이 가는 표석이다.



▼ 용산구에서 설치한 삼호정(三湖亭) 터 표석



▼ 삼호정(三湖亭) 터 표석 위치... 우측에 산천동부군당이 있다.



▼ 삼호정(三湖亭) 터 표석 위치



▼ 용산구, 마포구 서울시기념표석 위치







728x90
반응형
Posted by 이방인야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