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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리창 터 표석을 답사할 때 의아했던 기억이 난다. 창고가 언덕 위 끝에 있어서다. 창고라고 하면 낮으면서 교통이 편리한 곳에 있기 마련인데 만리창이 이곳에 있는 이유는 뭘까? 자료를 찾아보니 만리창 위치가 확정되지 않고 의견이 분분한 모양이다. 효창공원 삼의사 묘 앞이라는 설도 있고,  청파초등학교 뒷산이라는 설도 있다. 어찌되었든지 언덕에 창고가 있었다는 것은 아직도 의아스러운 것은 사실이다.

현재 만리창 터 표석 위치는 언덕 중턱쯤에 위치한다. 상당히 가파른 길이 효창공원에서 공덕동 쪽으로 이어지는데 언덕을 넘기 전에 길 옆에 위치한다. 

자료를 찾아보니 만리창은 아주 늦게 만들어진 선혜청 별창으로 새창, 신창이라고 불리었다 한다. 백과사전에 자료가 거의 없어서 자세한 내용이 부족한 표석 중 하나다.


만리창(萬里倉)


만리창(萬里倉)은 지금 서울시 용산구 청파초등학교 뒷산 중턱에 있던 창고였다. 만리창을 설치한 기관인 군자감(軍資監)은 태조 이성계가 1392년에 설치한 군수품 저장 및 출납을 담당하던 군사기구였다. 군자감은 대략 30만 섬규모의 곡식을 관리하였는데도성 안의 본감(本監)과 숭례문 안쪽의 분감(分監), 그리고 도성 밖 한강 변의 강감(江監)으로 나누어 유지하다가 영조때 본감을 폐지했고 그 뒤 연이어 분감도 폐지하였지만 강감만은 계속 두었다. 강감은 지금 원효로3가 1번지 그러니까 용문동 우체국 뒤쪽 땅에 있었던 강변의 군자감으로 용산 일대의 창고를 관할했다.

임진왜란 뒤에도 용산지역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선조 29년인 1596년에 새로이 별영창(別營倉)을 설치하였고 또한1640년 대동법 실시 이후 선혜청(宣惠廳)의 별고(別庫)는 물론 그 밖에도 호서창(湖西倉), 호남창(湖南倉), 영남창(嶺南倉)을 증설해 나갔다. 그러므로 용산 일대는 군량미와 군수물자를 관리하는 거대한 창고였던 셈이다. 그 가운데 만리창은 어느 창고보다도 뒤늦게 설치하였는데 새로 지었으므로 신창(新倉)이라고 불렀다. 

<다음카페 오디오와 컴퓨터에서 발췌>



새창고개


용산구 효창동에서 마포구 도화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로서, 고개 부근 효창동 213번지 일대에 조선시대 선혜청의 별창고인 만리창을 이곳에 새로 지었던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신창고개라고도 하였는데, 인근 마을을 새창마을이라고 하였다. 만리창의 창고 규모는 진휼청에 소속된 창고가 35문, 해서 소속 3문, 호남 소속 20문 등 모두 58문이었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때 일본군의 혼성여단이 만리창에 임시사령부를 설치하고 청일전쟁 수행의 주요거점으로 삼았다 한다.

<서울지명사전에서 인용>



▼ 만리창 터(萬里倉址) 표석


▼ 만리창 터(萬里倉址) 표석


▼ 만리창 터(萬里倉址) 표석... 횡단보도 바로 옆에 위치


▼ 만리창 터(萬里倉址) 표석... 건너편 효창교회


▼ 만리창 터(萬里倉址) 표석.. 효창공원앞역 방향, 가파른 경사로 상단에 위치한다.


▼ 만리창 터(萬里倉址) 표석... 효창파크푸르지오아파트 106동 앞 횡단보도 옆에 위치


▼ 만리창 터(萬里倉址) 표석... 봄꽃이 만발할 때 찾았다.


▼ 만리창 터(萬里倉址) 옛날 표석... 위치는 그대로 인데 내용 일부가 바뀌었다.


▼ 만리창 터(萬里倉址) 표석 위치


▼ 만리창 터(萬里倉址) 표석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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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방인야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