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마포 광흥창 터는 공민왕사당에 있었다. 이곳이 예전에 광흥창이 있던 자리이다. 예전 답사 때 표석의 위치는 공민왕사당 안에 보호수 옆에 있었는데 땅에 1/3쯤 파묻혀 있었다. 지금도 그대로 인줄 알고 글을 올리려고 확인해보니 표석이 사당 앞 계단으로 내려와 있었다. 추후에 사진을 찍어서 올릴 예정으로 미뤄 놓았었는데 최근 인근에서 결혼식이 있어서 다녀오면서 광흥창 터를 답사하였다. 

이곳에 왜 공민왕사당이 놓여 있을까? 서울에 공민왕사당이 종묘에도 있는 데, 이 곳은 관료들의 녹봉을 주는 광흥창 창고인데, 공민왕이 원혼이 되어 갈 데 없이 떠돌아다니므로 그렇게 떠돌아다니지 말고 만조백관들의 녹을 주는 창고나 지키고 있으라는 뜻으로 이곳에 공민왕의 영혼을 모시게 되었다고 전한다. 안내판 내용을 확인해 보니 조선왕조가 들어서며 억울함이 없지 않았을 공민왕의 영혼을 달래주고 백성들에게도 전 왕조의 왕을 이렇게 우대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 민심을 안정시키려는 목적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광흥창은 조선시대 관료들의 녹봉을 주는 양곡을 저장해 두던 곳이었으니 상당히 중요했던 곳이다. 인심은 곳간에서 나온다고 했으니 관료들도 자기가 받을 양식이 있는 곳이니 더욱 관심을 가질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곳에 불이라도 나면 사기가 많이 떨어졌을 것이다. 공민왕사당에 제사를 소홀히 하거나 부정한 일이 있으면 자주 불이나곤 했다고 전하는 것으로 봐서 공민왕사당이 있는 이유로 사기진작의 측면으로 보는 것이 좋을 듯 싶다.



광흥창(廣興倉)


고려 및 조선시대에 관료들의 녹봉을 담당하던 관청.

고려 전기에 관료의 녹봉을 담당하던 관청은 좌창(左倉)이었다. 1308년 충선왕이 복위하여 좌창을 광흥창(廣興倉)으로 이름을 바꾸고 사(使) 1명(정5품), 부사 1명(정6품), 승(丞) 1명(정7품)을 두었다. 고려 전기에 좌창의 별감(別監)을 근시(近侍)[내시(內侍)]로 임명했던 것과 달리, 충선왕은 광흥창의 사와 부사를 정식 관리인 품관(品官)으로 임명했다. 이는 광흥창을 비롯한 국가 중요 재정관청의 관리와 운영을 공적으로 하려는 의도였다. 공민왕 때에는 사를 종5품, 부사를 종6품, 승을 종7품으로 낮추고, 대신 종8품의 주부(注簿)를 더 설치하였다.

충선왕 때 정해진 광흥창이란 이름은 조선 건국 이후에도 그대로 유지되었다. 조선 건국 직후인 1392년(태조 1) 7월 정미일의 관제 개편 때 광흥창은 모든 관리의 녹봉을 수입·지출하는 일을 맡는 관청으로 정해졌다. 관원은 풍저창(豊儲倉)과 마찬가지로 사 1명(종5품), 부사 2명(종6품), 승 2명(종7품), 주부 2명(종8)이 설치되었다.

광흥창은 풍저창과 함께 국가 재정 운영의 중심이었기 때문에 조선 건국 직후부터 삼사(三司)의 회계 출납 대상이었고, 사헌부(司憲府)의 감찰을 받았다. 광흥창은 1405년(태종 5) 정월 관제 개편 때 풍저창, 공정고(供正庫), 제용사(濟用司) 등과 함께 호조(戶曹)의 속사(屬司)로 편제되었다. 1466년(세조 12) 1월 무오일의 관제 개편 때 광흥창은 정4품 관청으로 승격되면서, 관원의 명칭과 구성이 바뀌었는데, 이것은 『경국대전(經國大典)』에 그대로 등록되었다. 『경국대전』에 경관직 정4품 아문으로 수록된 풍저창에는 수(守) 1명(정4품), 주부(主簿) 1명(종6품), 봉사(奉事) 1명(종8품), 부봉사(副奉事) 1명(정9품)의 관원과 서리(書吏) 10명이 있었다.

고려시대에 매년 1월과 7월 쌀·조·보리[米粟麥]으로 지급하던 녹봉 지급 규정은 조선 건국 이후 몇 차례 변하였다. 조선 건국 직후 관제 개편과 함께 광흥창의 기능과 관원이 정해진 이래 1407년(태종 7) 정월 신미일에 녹봉제가 개편되었다. 이 때 녹봉 지급 대상을 18과로 나누고, 1년에 두 번 녹미(祿米)와 주포(紬布)·정포(正布)를 지급하였다. 이후 녹미는 중미(中米)·조미(糙米)·전미(田米)·두(豆)·맥(麥)으로 세분화 되었고, 주(紬)·정포 외에 전(錢)도 지급되었다. 1439년(세종 21) 정월부터는 사맹삭반록제(四孟朔頒錄制)가 시행되어 1년에 두 번 주던 녹봉을 1년에 4번 주는 것으로 개편하였고, 거의 그대로 『경국대전』에 실렸다. 『경국대전』에는 매년 1월·4월·7월·10월에 중미·조미·전미·황두·소맥·주포·정포·전·저화(楮貨)를 녹봉으로 지급하도록 규정되었다. 조선 중기 이후 국가재정이 나빠지면서 녹봉액이 크게 감소하고 때에 따라서 녹봉을 매월 지급하는 형태인 산료(散料)[월봉(月俸)]가 나타나다가 『속대전(續大典)』에서는 산료로 정착되었고, 1894년 갑오개혁 때 월봉을 화폐로 지급하게 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조선시대 광흥창이 서강(西江)의 북쪽에 있다고 하였는데, 현재 서울 지하철 6호선 광흥창역 1번 출구 옆 공민왕사당 앞(서울시 마포구 창전동 42-17)에 광흥창 터 표지가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인용>


▼ 광흥창 터(廣興倉址) 표석


▼ 광흥창 터(廣興倉址) 표석... 공민왕사당 앞 계단에 위치한다.



▼ 광흥창 터(廣興倉址) 표석



▼ 광흥창 터(廣興倉址) 표석... 공민왕사당 주변에는 보호수가 여러 수 보인다.



▼ 광흥창 터(廣興倉址) 표석



▼ 광흥창 터(廣興倉址) 표석이 있는 공민왕사당...



▼ 옛 광흥창 터(廣興倉址) 표석이 있었던 공민왕사당 앞 보호수



▼ 옛 광흥창 터(廣興倉址) 표석 위치



▼ 광흥창 터(廣興倉址) 표석 뒤에서 본 모습...



▼ 광흥창 터(廣興倉址) 표석 위치... 서강쌍용예가아파트 108동 앞에서 바라본 모습



▼ 광흥창 터(廣興倉址) 표석을 찾아 가는 길에 많이 핀 능소화



▼ 광흥창 터(廣興倉址) 표석 위치








728x90
반응형
Posted by 이방인야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