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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10여년 전에 표석을 처음 알게 되어 답사하기로 맘 먹고 자료를 수집했는데 그때 용산구 표석 중 한강변에 위치한 표석을 제일 먼저 답사 했던 기억이 난다. 한강을 따라 돌면서 마포에서부터 한강을 타고 내려오면서 여기저기 들렀던 기억이 난다. 독서당 터 표석은 그 당시 길 위 축대 위쪽에 대나무 밭 속에 있어서 기억이 많이 났는데 이번에 표석을 올리려고 확인해 보니 표석이 땅바닥으로 내려와 있었다. 그래서 다시 한번 방문하여 표석을 사진에 담았다. 내용은 같아도 표석 위치가 조금만 바뀌어도 새롭게 변경 사항을 올려드리는 게 예의라고 생각해서 다시 찾아 올리니 이 점 이해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독서당 터 표석은 동호당(성동구 옥수동)과 남호당(용산구 청암동) 두 곳이 서울시 기념표석에 등재되어 있다. 


▣ 독서당(讀書堂)


조선시대에 국가의 중요한 인재를 길러내기 위해 세운 전문 독서연구 기구.

호당이라고도 한다. 독서당 제도는 세종대의 사가독서제(賜暇讀書制)로부터 비롯되었다. 세종은 집현전 소속의 젊은 문신들에게 휴가를 주어 집에서 독서에 몰두할 수 있도록 했는데, 이를 사가독서제라 한다.

그런데 성종대에 이르러 사가독서의 대상자들이 마음놓고 독서에 전념할 수 있는 장소를 상설기구로 설치하자는 서거정(徐居正)의 주청에 따라, 1492년(성종 23) 지금의 마포 한강변에 있던 사찰을 확장하여 남호독서당(南湖讀書堂)을 열었다. 이 독서당 제도는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의 여파로 폐지되었다가, 중종의 적극적인 지원에 힘입어 1507년(중종 2) 지금의 동대문구 숭인동에 있던 정업원(淨業院)에 다시 설치되었다. 그뒤 1517년 두모포 정자를 고쳐 지어 독서당을 설치하고 동호독서당(東湖讀書堂)이라 했다.

이때부터 임진왜란이 일어나서 불에 탈 때까지 학문연구와 도서열람의 기능을 수행하게 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독서당은 1608년(광해군 즉위) 대제학 유근(柳根)의 청으로 한강별영에 임시로 설치되었다. 그러나 이괄(李适)의 난과 병자호란 등으로 사가독서제가 정지됨에 따라 독서당의 기능도 크게 위축되었다. 이후에 독서당은 형식상으로만 존재하다가, 정조 때 규장각이 세워짐에 따라 완전히 그 기능이 소멸되었다. 독서당은 연구기관으로서 옥당(玉堂)인 집현전이나 홍문관 못지않게 평가되었던 기관이다.

따라서 독서당의 권위를 높이기 위하여 사가인원(賜暇人員)을 선발하는 데 있어 그 규정을 엄격히 했다. 당시 사가독서의 대상이 된 인원은 1번에 대체로 6명 안쪽이었고, 대제학은 독서당을 거친 사람이라야 그 임명이 가능하게끔 제도화되어 있었다. 독서당 제도를 통하여 유명한 정치가·유학자가 많이 탄생했다.

<다음백과에서 인용>



▼ 독서당 터(讀書堂址) 표석...


▼ 독서당 터(讀書堂址) 표석...


▼ 독서당 터(讀書堂址) 표석...


▼ 독서당 터(讀書堂址) 표석...


▼ 독서당 터(讀書堂址) 표석... 청암자이아파트 103동 앞쪽 버스정류장에 있다.


▼ 독서당 터(讀書堂址) 표석... 축대 위 대나무가 인상적이다.


▼ 독서당 터(讀書堂址) 표석 옛날 위치는 축대 위 대나무 숲에 있었다.


▼ 독서당 터(讀書堂址) 표석... 옛날 위치가 눈에 잘 띄지 않아 밑으로 내려놓았다.


▼ 독서당 터(讀書堂址) 표석 위치


▼ 독서당 터(讀書堂址) 표석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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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방인야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