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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구는 내가 사는 동네다. 특히 삼선교 앞길인 동소문로길은 거의 매일 다니는 길이다. 이 길에 표석이 있다는 것을 표석 답사를 하기 전까지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길가에 조그만 표석이 있었지만 무심코 지나친 때문이다.

이곳은 성신여대앞 지하철역과 한성대역 사이에 있다보니 접근하기가 조금은 힘들지만 대로변에 있어서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예전에 다녀왔었는데 최근에 표석 내용이 바뀌어서 다시 다녀왔다. 5년도 안되었는데 표석 표면이 얼룩이 져 있어서 또 정비해야 할 판이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정비할 때 좀 제대로 하면 최소 몇 십 년은 사용 가능하지 않을까...? 



▣ 동서활인원(東西活人院)


조선시대 빈민의 질병구료사업을 관장하기 위하여 설치되었던 관서.

일명 동서활인서라고도 한다. 1401년(태종 1) 고려시대의 제도를 본받아 동서대비원을 설치하였던 것을 1414년 동활인서와 서활인서로 개칭하였다. 그 뒤 1466년(세조 12)의 관제개혁 때 활인서로 통합되었으나, 관습적으로 동·서로 나뉘어 불렸다.

동활인서는 동대문 밖, 서활인서는 서소문 밖에 위치하였다고 한다. 관원은 초기에 부사(副使)·녹사 등이 있던 것이 1414년 이후 제조 1인, 별제 4인, 참봉 2인으로 개편되었는데, 곧 별제 2인으로 감소되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정식 관원 외에 한의원과 의무(醫巫)·간사승(幹事僧)·매골승(埋骨僧) 등의 실무 인원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이 기관의 주된 임무는 도성의 병난 사람을 구료하는 일이었지만, 그 밖에 무의탁 병자를 수용하고, 전염병 발생 때 병막을 가설하여 환자에게 음식과 약·의복 등을 배급하고 간호하는 일 및 사망자 매장의 소임까지 담당하였다.

이러한 활인서 소임의 특수성 때문에 때때로 은전이 부여되기도 하였는데, 1466년 사사전(寺社田) 중에서 140결을 활인원에 이속시켜 간사승의 의복 공급비용으로 충당하게 한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러나 조선 후기로 오면서 활인서의 소임이 축소되자 1709년(숙종 35) 참봉 2인의 감원과 함께 혜민서(惠民署)에 이속되었고, 1743년(영조 19)에는 완전히 혁파되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인용>


▼ 동활인서 터(東活人署址) 표석



▼ 동활인서 터(東活人署址) 표석... 롯데하이마트 삼선교점 건너편에 있다.



▼ 동활인서 터(東活人署址) 표석... 드림트리빌딩 POLY어학원 앞에 있다.



▼ 동활인서 터(東活人署址) 표석.. 드림트리빌딩 현대자동차 영업점 앞



▼ 동활인서 터(東活人署址) 표석... 마을버스 정류장 옆



▼ 동활인서 터(東活人署址) 표석



▼ 예전 동활인서 터(東活人署址) 표석(참고하시라고 올린다)



▼ 동활인서 터(東活人署址) 표석... 드림트리빌딩 POLY어학원 앞에 위치



▼ 동활인서 터(東活人署址) 표석



▼ 동활인서 터(東活人署址) 표석



▼ 동활인서 터(東活人署址) 표석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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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방인야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