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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봄이 되면 중랑천 끝에 있는 응봉산에는 노란색으로 산 전체가 물들게 됩니다. 개나리가 봄을 알리는 3월말부터 응봉산을 완전 뒤덮고 조금 있다가는 뚝섬 서울숲에서 벚꽃이 만개해서 이 일대가 봄꽃으로 장관을 이룹니다. 이 맘 때 쯤 우리 집에서 자전거를 타고 출발해서 이곳까지 오는 데는 약 1시간 정도 걸리는데 1년에 한 두 번 자전거 하이킹을 하는 때 입니다. 요즘엔 그나마도 못하고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응봉산과 뚝섬 서울숲을 찾곤 합니다.

응봉산 정상을 오르면 응봉산정이라는 팔각정자가 제일 먼져 눈에 들어옵니다. 이곳을 오르면 서울 숲 일대 한강이 훤하게 조망이 되어 아주 멋진 풍광을 안겨 줍니다. 봄철에 이곳을 오르는 가장 큰 목적이 바로 이곳에서 바라보는 잠실쪽 한강의 풍광 입니다. 예전에는 한강과 중랑천이 만나는 곳에 저자도라는 섬이 있었는데 그 섬의 풍광이 그렇게 멋졌다고 나오는 걸 보면 이 작은 응봉산에 얼마나 많은 시인묵객들이 찾아을까 짐작이 갑니다.

응봉산 정상에 입석포 터라는 기념표석이 있어서 매우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산 꼭대기에 낚시터라니... 하면서 놀랐던 적이 있는데 실은 응봉산 아래 지금은 전철이 지나가는 철길 부근에 입석포라는 선돌이 많은 지형이 있었는데 그곳에 기념표석을 세울 수 없어 산 정상에 세운 것으로 해석 됩니다. 아무튼 이곳 정상에 가야 입석포 터 기념표석을 만날 수 있으니 답사객은 조금 힘들더라도 다리품을 팔아야 할 표석입니다.


▣ 입석포(立石浦)


한강 본류와 중랑천이 합류하는 서울 성동구 응봉동 한강변에 있는 조선시대의 작은 나루였다. <동국여지승람>에 입석포는 두모포 상류에 있다고 되어 있는데 두모포는 지금의 옥수동 한강변 동호대교 북단에 있었던 포구를 가리킨다. 한강변의 큰 바위들이 사람처럼 서 있다 하여 입석포(立石浦)라 불렀으며, 우리말로는 선돌개라 하였다.

뒤로는 응봉이 높이 솟아 있고, 강변 곳곳에 기암이 있어 경치가 뛰어났던 곳으로, 예로부터 많은 시인 묵객들이 찾아 들어 풍광을 예찬했다. 입석포는 천연의 낚시터로도 이름 높았다. 조선 초기 성종(재위 1469∼1494) 때 성종의 형 월산대군(月山大君)을 비롯하여 강희맹(姜希孟), 서거정(徐居正), 이승소(李承召), 성임(成任) 등의 문신들이 한성의 아름다운 풍경 열 개를 정해 한도십영(漢都十詠)이라 칭하고 그에 관한 시(詩)를 남겼는데 한도십영 중 하나로 꼽힌 것이 바로 입석조어(立石釣魚; 한강 입석포에서의 낚시)이다.

입석포 앞 한강에는 저자도(楮子島)라는 섬이 있었다. 닥나무가 많아 저자도라 불렸던 이 섬은 절경을 자랑하는 유명한 명승지로, 유람객들이 많았다 한다. 저자도에는 고려 말의 문신 한종유(韓宗愈)의 별장이 있었고, 조선 세종은 이 섬을 둘째딸 정의공주에게 하사하여 공주의 아들 안빈세가 물려받았다. 1930년대만 해도 길이 2㎞(동서)에 달했던 저자도는 1970년대의 강남 아파트건설 때 무분별한 골재 채취로 지금은 형태만 겨우 남아 있는 상태다. 입석포 동남쪽으로는 뚝섬과 광나루를 연결하는 드넓은 살곶이벌(전관평) 평야지대가 펼쳐져 있어 그 풍치 또한 뛰어났다 한다.

조선시대에 입석포는 강 너머 지금의 압구정으로 건너가려는 행인과 저자도 유람객들, 입석포에서 낚시와 경치를 즐기려는 이들로 북적였으며, 여인들은 입석포의 입석(선돌, 선바위)에 치성을 들이고, 아이들은 놀이터로 삼았다 한다. 입석포의 수려했던 경관은 국철 1호선 경원선 철로 아래에 묻혀 버렸다.

<성동의 역사,문화 이야기 입간판을 적어 옮기다.>


입석포 터(立石浦址) 표석... 봄날에 답사 하였다.



▼ 응봉산 정상에는 입석포(立石浦) 안내판을 성동구청에서 세워 놓았다.



▼ 입석포 터(立石浦址) 표석



▼ 응봉산 정상에 위치한 응봉산정 팔각정



▼ 응봉산에서 바라본 강변북로...



▼ 입석포 터(立石浦址) 표석이 있는 응봉산 정상에서 바라본 한강과 중랑천 하류...



▼ 봄날 개나리가 만발한 응봉산... 중앙에 팔각정이 보인다.



▼ 입석포 터(立石浦址) 표석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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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방인야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