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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 도성 밖에 4대원(四大院)이 있었는데 바로 동대문 밖의 보제원, 남대문 밖의 이태원, 서대문 밖의 홍제원, 광희문 밖의 전관원을 말한다. 지금은 교통이 발달되고 전국이 반나절 생활권이지만 당시에는 공무나 어떤 일로 길을 나설 때 숙식을 제공할 수 있는 곳이 필수 시설이 되었다. 

역(驛)은 주로 관리들이 이용하였는데 사람이나 말이 숙박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원(院)은 역(驛) 가까이 설치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일반 여객들에게 숙식의 편의를 제공하는 일종의 여관 기능을 하였다. 

이곳 전관원 터는 살곶이 다리 서북쪽에 위치하는데 지금의 행당중학교 터가 된다. 표석은 행당중학교 정문 앞에 있다. 


▣ 전관원(箭串院)


살곶이다리 근처에 으레 나그네들이 묵어 가던 여관인 원이 있었다. 『동국여지승람』권3에 "전관원이 살곶이다리 서북쪽에 있다"라고 한 지리는 살곶이다리 서북쪽 중랑천 북쪽 언덕께였다. 이곳 전관원은 동대문 밖 보제원, 무악재 넘어 홍제원, 남산 남쪽 기슭의 이태원과 함께 도성 교외 사대원의 하나였다. 일찍이 원 제도는 고려 때부터 시작되었다. 그 때에는 주로 중들이 원을 맡아 보며 해가 저물면 길손들을 묵어가게 하고 또 병이 나면 약을 베풀기도 하였다. 원은 역로에 부수되는 역과 같은 것이었으나, 역이 나라의 공문서, 체전 등과 관용물의 운수 및 공무를 띠고 여행하는 관리들의 숙박 등의 편리를 도모하던 관영기관이었던 데 비해서 원은 관영이 아닌 일반 사람들이 이용하던 민영 숙박소였다.

나라에서 토지만 제공하였을 뿐 원관이나 물자는 일체 지방유지가 맡아서 공급하며 운영하였다.『세종실록』 7년 11월조에 그 이후로 중이건 보통 사람이건 마음씨 착한 사람을 골라서 원주(元主)로 삼고 그들에게는 부역이나 길 안내 또는 밤중에 횃불을 들게 하는 등의 일을 일체 시키지 말게 하고 오로지 원관을 잘 챙기고 운영하는 일에만 전념하게 하여 원객들이 쉬어갈 수 있도록 운영방침을 결정한 기록이 보인다. 이때 서울 도성 밖 성저 십리 안에 있는 보제원, 홍제원, 이태원, 전관원을 한성부로 하여금 직접 보살피고 수리하게 하였다. 전관원은 대재 나루를 건넜으나 도성 문을 닫는 인정종이 울리기 전에 도성으로 들어갈 수 없게 된 나그네나 파루(罷漏鐘) 따라 도성문이 울리는 시각보다 더 이른 새벽에 곧장 나루를 건너서 먼 시골까지 가려는 나그네들이 묵어가던 여관이었다.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한강 생활문화), 2006., 한국콘텐츠진흥원에서 인용>



▼ 전관원 터(箭串院址) 표석



▼ 전관원 터(箭串院址) 표석... 행당중학교 정문 앞에 있다.



▼ 전관원 터(箭串院址) 표석



▼ 전관원 터(箭串院址) 표석



▼ 전관원 터(箭串院址) 표석



▼ 전관원 터(箭串院址) 표석... 한양대 역에서 나와 육교를 건너서 진입하면 편하다.



▼ 전관원 터(箭串院址) 표석은 살곶이 다리 북서쪽에 위치한다. 지금의 행당중학교 자리.



▼ 전관원 터(箭串院址) 표석... 찾기는 어렵지 않다.



▼ 전관원 터(箭串院址) 표석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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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방인야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