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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 이공대를 갔을 때 그곳에서 우연히 표석을 발견하고 사진을 찍어 놓았는데 나중에 표석답사를 하면서 천천히 주변을 살펴보니 묘역 형태가 그대로 남아있었다. 이곳은 고려대에서 애기능으로 불러졌는데 지금도 애기능생활관이 옆에 있어서 찾기는 어렵지 않다. 애기능 도두 부분에 고려대에서 학생들 쉼터를 조성했는데 이곳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어린 나이에 정조의 후궁으로 들어가 채 펴보지도 못한 체 숨을 거둔 홍국영의 여동생을 생각해 본다.

정조로부터 각별한 신임을 얻고 '어떠한 허물도 용서하리라'던 홍국영은 자기 여동생이 갑자기 죽자 왕비(효의왕후)를 의심하여 나인들을 잡아다 고문하였는데 이게 발단이 되어 궁중의 여인들(정순왕후, 혜경궁홍씨, 효의왕후)로부터 탄핵을 당했다. 이후로 급전직하 하루 아침에 권력에서 무너지면서 술로 보내다 33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홍국영을 생각한다. 권력 앞에서 겸손하지 못하면 토사구팽(兎死狗烹)을 당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준 전형으로 남아있다.

인명원은 원빈의 묘인데 원래 으뜸 원(元)자는 후궁에게는 쓰지 않는 글자인데 홍국영의 권세로 이를 쓰게 했고, 죽은 뒤에는 후궁은 묘호(墓號)를 써야 하는데 원(園)이라 쓰고 묘역도 원(園)의 예에 따라 갖춘 것으로 되어 있다. 나중에 이를 원빈묘(元嬪墓)로 강등하고 묘역도 그에 맞춰 조성한 것으로 나온다.

고려대 이공대 인명원 터에 보면 아직도 애기능 터의 모습이 어렴풋이 보이고 그곳을 공원으로 조성해 놓았다. 표석 하나만 덩그러니 있는 이곳에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 인명원(仁明園)


인명원(仁明園)은 1781년(정조 5) 정조의 후궁인 원빈 홍씨의 사후에 내린 무덤의 이름이다. 인명원은 동부 온수동에 조성되었다. 그런데 홍국영이 죽은 이후, 궁원의 호칭이 예에 맞지 않는다는 비판에 따라, 원빈묘(元嬪墓)로 강등되었다.

궁원의 호칭을 받은 원빈 홍씨(元嬪洪氏)의 예제상의 지위는 그녀의 오빠인 홍국영(洪國榮)의 권세에 좌우될 수 있었다. 그런데 홍국영이 퇴진하고 김종수(金鐘秀)의 탄핵 등으로 위기에 몰렸던 그녀가 1781년에 사망하자, 그 이듬해 6월에 좌승지 서유방(徐有防)이 인명원의 ‘원(園)’ 자를 없앨 것을 건의하였다. 첨지 정술조(鄭述祚)도 소를 올려, 순회·소현묘도 원이라 하지 않고 묘라 했는데 빈어의 무덤을 원이라 한 것은 고례(古例)가 아니라며 바로잡을 것을 청하였다.

정조는 그동안 이러한 요청을 묵살해 오다가, 1786년(정조 10) 11월 11일에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의 진달로 이를 수용하였다. 김치인은 저군(儲君)의 위호도 칭원(稱園)한 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 예외의 의절을 창설한 것으로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정조는 인명원의 원호를 강등하는 등의 의절을 예조에서 거행하라고 명하였다.

그리하여 3일 뒤에 김 영빈방(金寧嬪房)의 예에 근거하여 인명원과 효휘궁의 호를 혁파하고 정자각과 홍전문을 훼철하며 비석을 고쳐서 새기고 호석(虎石) 및 수봉관이 구처하는 절목을 없애도록 하였다. 그중에서 정자각은 배위청을 없애고 정당은 그대로 제청으로 사용하라고 하였다. 이렇게 궁원의 호가 혁파됨으로써, 인명원은 원빈묘(元嬪墓)로 강등되었다.


원빈 홍씨(1766~1779)는 정조의 후궁으로, 호조참판 홍낙춘(洪樂春)의 딸이며 홍국영(洪國榮)의 누이이다. 본관은 풍산(豊山)이다. 1778년(정조 2)에 빈으로 간택되어 창덕궁 정전에서 가례를 올렸다. 그런데 갑자기 1779년 5월 7일에 14세의 나이로 창덕궁 양심합(養心閤)에서 졸하였다. 이때 시호를 인숙(仁淑), 궁호(宮號)를 효휘(孝徽), 원호(園號)를 인명(仁明)이라 올렸다. 정조는 원빈의 행장을 직접 지었는데, 그것이 장서각 소장의 『어제인숙원빈행장(御製仁淑元嬪行狀)』이다.

원빈의 상장례는 예장으로 치러졌다. 인명원은 흥인문을 나가 관왕묘를 거쳐서 도착할 수 있는 동부 온수동의 해좌사향(亥坐巳向)에 조성되었다. 그곳은 오늘날 서울특별시 성북구 안암동의 고려대학교 경내이다. 현재는 경기도 고양시 서삼릉(西三陵) 권역의 후궁 묘역에 이장되어 있다.

궁원이 묘묘(墓廟)로 강등되자, 궁방(宮房)이나 절수(折受) 등에 의한 재원의 확보가 어려워졌다. 그래도 제사 등에 대한 조처는 사당의 삭망분향을 중관이 전례대로 하고, 속절 및 시향, 묘소의 기제 및 속절은 거행하되, 제수 준비는 별도로 논의해 정하도록 하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인용>



▼ 인명원 터(仁明園址) 표석



▼ 인명원 터(仁明園址) 표석... 계단 위로 오르면 인명원이 있던 묘역 같은 곳이 남아 있다.



▼ 인명원 터(仁明園址) 표석... 우측에 애기능생활관이 있다.



▼ 인명원 터(仁明園址) 위쪽 묘역 입수도두 위치에 있는 쉼터...



▼ 인명원 터(仁明園址)에는 공원으로 조성하여 예전의 묘역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 인명원 터(仁明園址)로 추정되는 곳



▼ 인명원 터(仁明園址)로 추정 되는 곳... 공원으로 꾸며져 있다.



▼ 인명원 터(仁明園址) 표석... 애기능생활관 옆



▼ 인명원 터(仁明園址) 표석



▼ 인명원 터(仁明園址) 표석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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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방인야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