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둔촌 이집 선생 집터 표석은 한동안 찾지 못하다가 9호선 공사가 끝난 뒤 겨우 찾았다. 공사중에는 표석을 원위치에서 철거한 뒤 따로 보관한 때문이다. 지금은 9호선 둔촌오륜역 2번출구에서 나오면 바로 보인다.

지난 2016년에 서울둘레길을 완주하였는데 그때 일자산에 둔촌선생의 시비가 세워져 있었고 둔촌선생이 은거했던 둔굴이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이 지역은 둔촌선생을 떼놓고 생각할 수 없다.  둔촌(遁村)이란 숨어지내는 마을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그가 말년을 초야에 뭍혀 지내면서 후손들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해 이런 호를 지었다는 말이 있다. 현재 표석이 있는 뒷쪽 언덕에 그의 집터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이곳이 원래 둔촌동이었는데 지금은 송파구 방이동으로 동명이 바뀌어서 둔촌의 유적지로서 아쉬움이 남는다. 또한 둔촌선생의 묘는 성남시 중원구 하대원동에 있다.(둔촌선생 묘 바로가기)

이곳 가까이 둔촌 선생을 모신 구암서원이 있었는데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바위절터 바로가기)


 

 

▣ 둔촌(遁村) 이집(李集)

 

본관은 광주(廣州). 초명은 원령(元齡). 자는 성노(成老)·호연(浩然)이며 호는 묵암자(墨岩子)·둔촌(遁村)이다. 고려수절신(高麗守節臣)의 한 사람으로 정몽주(鄭夢周)·이색(李穡) 등 당대의 거유(巨儒)들과 교유하였다.

광주 향리 생원공 이당(李唐)과 어머니 인화이씨 사이의 다섯 아들 중 둘째로 출생하였다. 아들은 탄천(炭川) 이지직(李之直)이고, 선조는 신라 17대 내물왕 때 내사성령을 지낸 이장성이다.

안보(安輔)의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특히 경서(經書)에 밝았다. 1347년(충목왕 3) 문과에 급제하였고, 1368년(공민왕 17)에는 왕의 측근인 신돈(辛旽)을 논박하다가 미움을 사 생명의 위협을 받자, 아버지를 업고 영천(永川)으로 도피하여 최원도(崔元道)의 집에서 은거하였다. 1371년 신돈이 주살되자 개경으로 돌아와 판전교시사(判典校時事)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이름과 호를 집과 둔촌으로 바꾸고 여주 천녕현(川寧縣)에서 자연을 벗 삼아 시와 학문에 전념하였다.

시에 특히 뛰어나 꾸밈과 가식이 없고, 직설적이면서도 자연스러운 시풍으로 당대에 이름을 얻었다. 저서로는 『둔촌유고(遁村遺稿)』가 있다. 아단문고에서 소장본 2권 1책의 『둔촌유고』는 1995년 4월 3일 보물 제1218호로 지정되었다.

둔촌 이집 묘역은 경기도 성남시 중원구 하대원동 산7-1에 있으며, 2008년 5월 경기도 기념물 제219호로 지정되었다.

조선시대에 의정부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다. 1669년에 광주(廣州) 암사(岩寺) 강상[현재의 서울시 강동구 암사동]에 서원을 세우고, 1697년에 구암서원이라는 사액을 받아 이곳에 제향되었으나 1870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훼철되었다. 1998년 성남시의 재정 지원을 받아 둔촌 이집 묘역 아래 재실과 고옥을 복원한 추모재를 건립하고 이집의 영정을 봉안하였다.

<디지털성남문화대전에서 인용>

 

 

▼ 둔촌 이집 선생 집터(遁村李集先生家址) 표석 

 

 

▼ 둔촌 이집 선생 집터(遁村李集先生家址) 표석은 둔촌오륜역 2번 출구 밖에 있다.

 

 

▼ 둔촌 이집 선생 집터(遁村李集先生家址) 표석... 
둔촌오륜역 2번출구 나오면 자전거주차장이 보인다.

 

 

▼ 둔촌 이집 선생 집터(遁村李集先生家址) 표석... 서하남IC 방면으로 서문교회가 보인다.

 

 

▼ 둔촌 이집 선생 집터(遁村李集先生家址) 표석... 둔촌오륜역 방향

 

 

▼ 둔촌 이집 선생 집터(遁村李集先生家址) 표석...길 건너에서 바라본 표석

 

 

▼ 둔촌 이집 선생 집터(遁村李集先生家址) 표석

 

 

▼ 둔촌 이집 선생 집터(遁村李集先生家址) 표석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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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방인야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