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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역사문화유적 표석 연재를 시작하며...

 

 

 

역사적인 비중을 들자면 종로구, 중구가 속해있는 한성부를 먼저 올려야 겠지만 나름 원칙을 세우고 가나다 순으로 각 구청에 임시번호를 부여하여 순서대로 포스팅 할 계획입니다. 사진은 이미 몇 년 전에 다녀와서 조금 오래된 것도 있겠지만 수정된 것은 최근에 다녀왔으며, 변동이 없는 것은 옛 것을 그대로 사용할 예정입니다. 느긋하게 맘 먹고 하루에 한 두 표석 만 올릴 예정이니 이점 이해 바랍니다.

 

 

 



 

 

 

 

암사지(巖寺址)

 

 

 

백중사(伯仲寺)라고도 부르는데, 백제시대 때 창건되었다고도 하므로 백제절이라는 뜻으로 백중사라 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그렇다면 한산시대(漢山時代) 최초의 절로 추정할 수도 있다.

그러나 1987년 4월 19일부터 5월 30일까지 동국대학교 발굴조사단이 실시한 바위절터 발굴 때 수습한 유구와 유물은 대부분 신라 말 고려 초의 것으로 그 이전 백제까지 올라가는 작품은 드물어 앞으로 전면 발굴에 의하지 않으면 현재로서는 백제절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신라 말 고려 초 이전의 유물층 위에 신라 말 고려 초의 건물이 세워졌고, 이 당시의 암막새·수막새 기와들이 대량 출토되었으므로 적어도 신라 말 고려 초에는 바위절이 중건되었을 것이다.

이 층위 지표면에서는 옛날식 주춧돌(신라 내지 고려 초기)에 놓여진 정면 4칸, 측면 2칸의 건물유구를 확인할 수 있는데 이것은 옛 주춧돌을 이용한 조선시대의 건물로 추정된다.

이 건물유구는 금당지로 추정되며, 이 건물 앞에서는 고려 말 조선 초의 석탑옥개석 2점이 확인되었는데 금당 앞에 놓았던 탑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이 사찰은 격식을 갖춘 아담한 사찰로 추정된다.

이 사찰에 대한 기록은 《동국여지승람》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백중사는 일명 암사(巖寺)이며 하진참 동쪽에 있다.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절(招提)은 푸른 벼랑에 걸쳐 있으니 어느 날인가 황금을 펴고 지었는가. 낙엽을 쓰는 사람이 없지만 빈집에는 오는 손님이 있네. 산 형세는 물에 다다라 끊어졌고 물굽이는 잔에 부딪혀 돌아 흐르네. 고승(高僧)과 같이 말을 주고받으니 마음은 스스로 티끌이 없어지네.”

이러한 내용으로 보아 조선 초기에는 경승지 사찰로 이름이 나 있었던 서울근교의 명찰이었음도 분명하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는 이 부근에 서원을 세움으로써 사찰은 크게 축소된 채로 조선 말기까지 유지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규모는 현재 중부고속도로 진입로와 암사동 수원지 취수장의 건설 때문에 크게 훼손되어 잘 알 수 없지만, 현 발굴지와 절벽 밑 취수장 진입로 등에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고속도로 진입로와 취수장 일대에도 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므로, 절경의 아담한 사찰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백제사찰 내지 신라 말 고려 초 때 중건된 옛절로서 서울근교의 명찰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므로 바위절의 역사적 의의는 크다고 할 수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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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 절터(巖寺址)

 표석은 깎아지른 절벽 위에 아주 옹삭하게 위치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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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 절터(巖寺址)가 있던 곳은 조선시대 구암서원이 들어섰고 최근에는 암사수원지 취수장이 들어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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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 절터(巖寺址)에서 구암서원터(구암정)로 오르는 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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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 절터(巖寺址)는 올림픽대로와 최근 구리암사대교 건설로 도보로는 접근이 어렵고 자전거나 자동차로 잠깐 들를 수는 있는 정도다.

 

 

 

 

 

 

 

 

 

 

 

 

 

구암서원(龜巖書院) 터
서울특별시 강동구 암사동 굴바위마을에 있었던 서원.1667년(현종 8)에 광주(廣州)지방 유림의 공의로 둔촌 이집(李集1314~1387)·석탄 이양중(李養中)·추탄 오윤겸(吳允謙1559~1636)·소암 임숙영(任叔英1576~1623)·수몽 정엽(鄭曄)·정성근(鄭誠謹?~1504) 등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서 원우를 창건하고 위패를 모셨다.1697년(숙종 23)에 ‘구암’이라 사액되어 사액서원으로 승격되었으며,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70년(고종 7)경 훼철된 후 복원하지 못하였으며, 위패는 땅에 묻고, 현재 그 자리에는 조두비(俎豆碑)가 세워져 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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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암서원(龜巖書院) 터로 오르면 먼저 보이는 정자가 구암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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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암서원(龜巖書院) 터에 세워진 구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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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암정 안내판... 중앙의 글자가 잘 보이지 않는다.

 

 

 

 

 

 

 

 

 

 

 

 

 

 

둔촌 이선생 휘 집 조두 구기(遁村李先生諱集俎豆舊基)
공의 성은 이씨요, 처음 휘는 원령인데 뒤에 집으로 고쳤다. 자는 호연이며 호는 둔촌, 본관은 광주, 벼슬은 전교시 판사를 지냈다. 원나라 태정 4년 정묘년 4년 6월 2일에 태어나서 명나라 홍무 20년 정묘년 8월 6일에 여주의 천령강사에서 서거하여 광주의 세촌면 대원리의 부묘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공은 학문이 고명하고 문장이 뛰어나서 명성이 선비들 사이에 드러났고 덕망이 당대에 관절하여 삼은과 제현들이 아끼고 공경하며 추중하지 않는 이들이 없었다.일찍이 항직으로 역전 신 돈의 미움을 사서 위협을 느낀 나머지 4년간 영표로 피신하였다가 개경으로 다시 돌아와 얼마 아니해서 서거하였고 서거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왕조가 교체되었다. 본조에 들어와서 좌찬성에 증직되었다. 현종 기유년에 사림에서 공은 문학과 지절이 삼은과 병칭할 만하다 하여 광주의 암사의 강변에 사묘를 세웠는데 숙종 정축년에 조정에서 ‘귀암서원’이라고 사액하였다. 이때의 제향 축문에, “도를 지키며 어렵게 살았고, 정도를 지켜 은거하며 지조를 지켰네. 공의 바른 학문은 연원이 있어 백대에 전하리라.”고 하였다. 이곳에는 석탄 이 양중 ·추탄 오 윤겸 · 소암 임 숙영 · 수몽 정 엽 · 정승지 성근의 다섯 선생이 배향되었다.성상 신미년에 여러 곳에 중복으로 설치된 서원의 철폐를 명할 때에 이 서원도 포함되었다. 이곳은 단설된 서원임에도 향사가 끊이게 되었으므로 사림에서 이를 부끄럽게 여기는 마음은 세월이 갈수록 더하기만 하다. 장차 중건할 날을 기다리면서 사판을 20여 년간 삼가 보존해오고 있지만 불초 후손들로서는 이 서원의 옛 터를 바라볼 때마다 서글픈 마음이 그지없으므로, 이에 의견을 모으고 힘을 보태어 내력을 요약하여 적어서 이 비석에 새겨서 후인에게 알린다. 15대 증손 장사랑 효릉참봉 기태는 삼가 짓고,외후손 통훈대부 전 행연원도찰방 강릉 유 한익은 삼가 쓰다.대조선 개국 505년(고종 33, 1896년) 병신년 8월 일 세움.<장달수의 한국학카페 원문, 다음카페 도방이야기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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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암서원(龜巖書院) 터에 세워진 둔촌선생 조두구기비(遁村先生俎豆舊基碑)... 

조두(俎豆)는 제기(祭器)의 이름으로 곧 제례(祭禮)를 가리킨다. 이는 시례(詩禮)와 함께 유가(儒家)의 선비들이 익혀야할 기본 예절을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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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암정(龜巖亭)과 둔촌선생 조두구기비(遁村先生俎豆舊基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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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암정(龜巖亭)에서 바라본 둔촌선생 조두구기비(遁村先生俎豆舊基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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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암서원(龜巖書院) 터에서 바라본 암사동 부근의 올림픽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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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암서원(龜巖書院) 터에서 바라본 바위절터 표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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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 절터(巖寺址)

 표석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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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 절터(巖寺址)

 표석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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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방인야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