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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수정 터(二水亭址)

이곳은 찾아가기가 까다로운 곳 중 한 곳이다. 현장까지 승용차로 이동한 후에 적당한 곳에 주차한 후 아파트 사이로 들어서면 의외로 안내판이 잘 갖춰져 있다.

이수정은 이덕연, 이덕형 형제가 세웠던 정자터라고 나와서 처음에는 한음 이덕형인줄 알았는데 한음 이덕형은 광주이씨이고, 죽천 이덕형은 한산이씨이다. 비슷한 시기에 관직을 역임하다보니 헷갈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한강은 지금도 좋지만 예전에는 상당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올림픽대로가 건설되면서 턱밑까지 도로가 만들어져서 운치는 반감되었고 복원된 이수정 또한 너무 옹삭하게 자리잡고 있어서 그 옛날의 겸재 정선이 그린 이수정 그림과는 많이 다르다. 그래도 이렇게 복원 해 놓은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일이다.






▣ 이수정 터(二水亭址) 



원래 이 자리에는 조선 초 태종의 차남 효령대군이 세운 임정(林亭)이 있었다. 이 형제의 5대 조모인 비인 현주(庇仁 縣主) 전주 이씨가 효령대군의 정실 외동딸로, 효령대군이 임정 일대를 나눠주면서 이곳이 한산 이씨의 소유가 된 것이다. 

이에 이덕연, 이덕형 형제는 낡은 정자를 고쳐짓고, 이수정이라 하였다. 이수정이란 이름은 당나라 최고 시인인 이태백의 ‘금릉 봉황대에 올라서’라는 시에서 따온 것으로, ‘세 산은 반쯤 푸른 하늘 밖으로 떨어져 나갔고, 두 물은 백로 깃들인 모래벌이 가운데를 갈라놓았다(三山半落靑天外 二水中分白鷺洲)’라는 구절이다. 

실제 이수정에 오르면 눈앞에 삼각산(북한산)의 상봉을 흰 구름이 감싸 반쯤은 푸른 하늘 밖으로 떨어져 나간 듯 보이고, 난지도 모래펄이 한강물을 두 쪽으로 갈라놓았다고 한다. 이 형제는 노후에 관직에서 물러나 이수정에 기거했는데, 이산해, 이덕형 등 조선 명신과 명나라 사신 주지 등이 이 정자를 보고 읊은 시가 전한다. 이수정은 개항 후에 훼손된 것으로 보이는데, 1891년 편찬된 '양천현지'의 기록을 보면 당시 이수정은 터만 겨우 남아있다고 한다. 영조 16년(1740)에 겸재 정선이 양천현령으로 부임하여 이수정을 그린 것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그 당시에는 존재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현재 이곳에는 마을 주민의 치성단이 있어 도당산으로 불리고 있다. <문화콘텐츠닷컴에서 인용>



▼ 이수정 터(二水亭址) 표석


 


▼ 이수정 터(二水亭址)는 한강동아아파트 옆길로 들어선다.




▼ 이수정 터(二水亭址)로 가는 길은 시가 있는 염창동둘레길이다.




▼ 이수정 터(二水亭址) 앞에는 염창동 명칭 유래가 자세히 안내되어 있다.




▼ 이수정 터(二水亭址)에는 현재 염창정 정자가 세워져 있다.




▼ 염창정 안내판




▼ 진입로에서 살짝 보이는 염창정(그 안쪽에 이수정 터(二水亭址) 표석이 있다.)




▼ 염창정 뒤쪽에 이수정 터(二水亭址) 표석이 보인다. 그 너머로 한강...




▼ 염창정 현판





▼ 이수정 터(二水亭址) 표석




▼ 겸재 정선이 그린 이수정(二水亭).


영조 16년(1740)에 겸재 정선이 양천현령으로 부임하면서 이수정을 그린 그림이다. 두 폭 돛을 단 나룻배가 보이고, 강가엔 네그루 버드나무 뒤에 마을이 옹기종기 숨어있다. 오른쪽 골을 따라 계단을 오르면 반듯한 기와집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이수정이라 한다. 도당산은 봉우리가 낮은데 정자를 가파른 절벽 위에 올려놓아 깊은 산중 절집처럼 묘사하고 있다...


 


한산이씨 이축선생(이덕형 6대조) 묘, 이덕형 묘 바로가기


이덕연(李德演)


1555(명종 10)∼1636(인조 14).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윤백(潤伯), 호는 이수옹(二水翁). 고려 판문하부사 색(穡)의 9대손이다.선조 때 음보로 전설서별제(典設暑別提)가 되었다.

그뒤 감찰을 거쳐 외직인 양성·진천의 현감을 역임하였다. 광해군 때에 문화부사가 되었으나 대북파의 문란한 정치를 보고 사직, 철원에 은거하였다. 인조반정 후인 1625년(인조 3) 동지중추부사가 되고 한산군(韓山君)에 습봉되었다. 1634년 노인직으로 정2품이 되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사전에서 인용>



◐ 죽천(竹泉이덕형(李德泂)


1566년(명종 21)∼1645년(인조 2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원백(遠伯), 호는 죽천(竹泉). 관찰사 이언호(李彦浩)의 증손으로, 호군 이오(李澳)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민원종(閔元宗)의 딸이다.

1590년(선조 23)에 진사가 되고, 1596년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예문관검열이 되었다. 이어 1597년에서 1608년까지 봉교·정언·지평·수찬·부교리·헌납·전적·문학·집의·교리·부응교·사간·사예·사섬시부정·응교·시강원보덕·사도시정(司䆃寺正) 등을 거쳤다.

광해군 때에도 응교·동부승지·승지·대사간·좌부승지·부제학·이조참의·우승지·병조참판·도승지 등의 경관직(京官職)과 나주목사·전라감사·황해감사 등의 외관직을 지냈다.

특히, 광해군이 영창대군(永昌大君)을 해치고 인목대비를 유폐시킬 때에 직접 반대의 입장에 서지 않고 왕의 뜻에 따르거나 아니면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였고, 광해군 말년에 도승지로 있을 때 어지러운 세태가 극도에 달하자 병을 이유로 사직하려고 소를 올렸으나 허락받지 못하였다.

인조반정을 당하여 광해군을 죽이지 말 것을 주장하였으며 이를 본 능양군(綾陽君: 仁祖)이 그를 충신이라고 판단하여 반정후 인목대비를 맞이하는 의식에서 그를 앞세워 반정을 보고하였으며 능양군에게 어보(御寶)를 내리게 하는 데 공을 세웠다.

인조 때는 한성부판윤이 되어 이괄(李适)의 난 진압에 공로가 있어 숭정(崇政)으로 승계하고, 주문사(奏聞使)로서 명나라에 다녀온 바 있다.

1627년 정묘호란 때에는 왕을 강화에 호종하고, 1636년 병자호란 때에는 남한산성에 왕을 호종하였다. 환도 후 숭록(崇祿)으로 승계하여 예조판서·판의금부사·지돈령부사·우찬성 등을 지냈으며,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죽창한화(竹窓閑話)》·《송도기이(松都記異)》 등이 있다.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사전에서 인용>





▼ 이수정 터(二水亭址)에서 바라본 한강




▼ 이수정 터(二水亭址)에서 바라본 한강과 너머 난지 하늘공원




▼ 이수정 터(二水亭址)는 지금은 마을에서 치성단으로 이용되고 있다.




▼ 강변 올림픽대로에서 바라본 염창정(이수정 터(二水亭址)) 




▼ 이수정 터(二水亭址) 표석에 접근하는 방법으로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은 힘들다. 저도 처음에는 버스타고 마냥 걸어서 갔었는데 두번째 갈 때는 차를 가지고 가서 적당한 곳에 세워두고 답사를 진행했다.




▼ 이수정 터(二水亭址) 표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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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방인야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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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창터는 예전에 소금창고 터였던 곳이다. 염창동도 이곳에서 유래된 것이다. 이곳은 주소만 있으면 쉽게 접근할 수 있고 아파트 입구에 표석을 세워 놓아서 많은 사람들이 알고 볼 수 있어서 표석의 의미가 있는 곳이다. 그런데 경비실 앞쪽이 아니라 뒷쪽 한쪽 구석에 쳐박아 놓은듯한 모습은 보기가 별로다. 승용차로 가서는 주차할 곳이 없으니 적당한 곳에 정차하고 얼른 사진만 찍고 돌아왔다. 아파트에 페인트칠을 하면서 표석에도 화장을 시켰는지 페인트가 떨어져 흉하게 보인다. 표석관리에 주민들이 좀 더 신경쓰면 더 좋을 것 같다.

내가 사는 동네가 터의 이력이 좋으면 거기 사는 사람들도 좋은 기운을 받는다. 염창 터는 예전 전매하던 소금창고 였기 때문에 재물과 연관이 많다. 이곳 사람들은 재물을 끼고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표석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여 주었으면 좋겠다.







염창 터(鹽倉址)


조선시대 경기, 충청, 전라 등지에서 조세로 바쳐 올라온 소금 을 저장하여 필요할 때 공급하던 소금 창고 터이다. 의염창(義鹽倉)은 한강 하구를 통해 뱃길로 한성에 올라오는 소금을 보관하는 창고로서 전일의 김포군 양동면 염창리, 현재 강서구 염창동에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본창도 고려의 제도를 본받아 조선건국 초에 설치한 것으로 염세(鹽稅)에 관한 일을 관장하였다. 본창의 관원으로는 승(丞) · 주부(主簿) · 판관(判官) 등을 두었다. 

<문화콘텐츠닷컴에서 인용>



 의염창(義鹽倉) 


소금은 곡물과 더불어 중요한 식품의 하나로서 고려시대에는 초기부터 전매물로 정하여 도염원(都鹽院)을 설치하고 이에 관한 업무를 관장하게 하였다. 소금의 생산지인 염분(鹽盆)주 01)에서 수납하는 염세(鹽稅)는 이득이 많아 국가에서는 공로가 특별히 큰 사람에게 염분을 하사하였다. 고려 중기 이후에는 귀족의 특권이 강대하여지면서 소금의 전매정책이 해이하여지고, 왕실과 귀족이 사리사욕으로 염분을 점탈하는 현상까지 보였다. 그리하여 1298년 충선왕이 즉위하면서 소금의 전매정책을 강화하여 각염법(榷鹽法)을 실시, 왕실과 귀족이 사사로이 점탈한 염분을 국가에서 회수하고, 도염원을 민부(民部)에 이관시키며, 아울러 의염창을 설치하여 민간의 수요에 응하게 하였다. 당시 소금의 가치는 은(銀) 1근에 64석, 포(布) 1필에 2석이었다. 공민왕 때 민부에서 독립시켜, 관원으로 종7품의 승(丞) 1인, 종8품의 주부 1인을 두었다. 조선을 세운 태조도 의염창을 계속 운영하다가, 1394년 그 업무를 사재감(司宰監)에 이관하고 혁파하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인용>  



 사재감(司宰監) 


고려 문종 때 어량과 산천에 관한 일을 관장하기 위해 사재감을 처음 설치하였다. 1298년(고려 충렬왕 24) 사진감(司津監)과 사재시(司宰寺), 1308년 도진시(都津寺)와 사재시, 1356년(고려 공민왕 5) 사재감, 1362년 사재시, 1369년 사재감, 1372년 사재시로 명칭이 여러 차례 바뀌었다. 조선 건국 후 1392년(태조 즉위) 7월에 고려의 제도를 본받아 사재감을 설치하여 어량·산천에 관한 일을 맡게 하였다. 1403년(태종 3)에는 전함(戰艦)의 수리와 운송을 감독하는 사수감(司水監)과 합병하여, 사재감은 선박 관리 업무와 운송 관련 업무도 관할하였다. 그러나 어량·산천을 관리하는 일과 선박을 관리하는 일이 크게 달랐기 때문에, 1432년(세종 14) 선박 관리 업무를 전담할 사수색(司水色)을 독립시켰다. 1470년(성종 1)에는 사재감에 소속된 수참(水站)의 배와 전라도·충청도의 조선(漕船)에 관한 업무를 모두 사수색을 개칭한 전함사로 옮겼다. 이로써 사재감의 업무는 건국 초기와 같이 궁중에 어물, 소금, 육류, 땔감을 공급하고 어량, 산택을 관리하는 업무만 담당하는 관서로 자리 잡았다. 이 업무 외에도 사재감에서는 궁중에 횃불[炬火]을 공급하는 업무도 담당했으나, 19세기 이후 이 업무는 폐지되었다. 

<위키실록사전에서 인용>



 

▼ 염창 터(鹽倉址) 표석 




▼ 염창 터(鹽倉址) 표석... 초창기에는 관리번호를 부여했었다.




▼ 염창 터(鹽倉址) 표석




▼ 염창 터(鹽倉址) 표석




▼ 염창 터(鹽倉址) 표석




▼ 염창 터(鹽倉址) 표석... 염창우성1차아파트(한강우성1차아파트) 103동 경비실 옆에 있다.




▼ 염창 터(鹽倉址) 표석... 위치가 한 눈에 들어온다.(다음 로드뷰 옮겨옴)




▼ 염창 터(鹽倉址) 표석 위치




▼ 염창 터(鹽倉址) 표석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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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방인야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