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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나루 터(廣津址)


광나루 터는 접근이 용이하다. 승용차를 가지고 가면 쉽게 접근하고 지하철도 큰 무리가 없다. 그런데 놓여있는 위치가 위태위태하다. 밀면 넘어질듯 보인다. 실제로 밀어봤더니 생각보다 무거워서 움직이진 않았다. 

이곳은 아차산성이 있고 삼국 시대부터 매우 중요한 길목이었고,  지금도 광진교, 천호대교가 지나며, 지하철 5호선도 지나는 교통의 요지로 남아 있다. 워커힐이 인근에 있어서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 중의 하나다. 지금은 강변쪽으로 구리까지 이어지는 강변북로가 개설되어 옛 나루터의 의미는 표석으로만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 광나루 터(廣津址)


양진(楊津)·광장(廣壯)·광진(廣津)·광진도(廣津渡) 등의 명칭으로도 불리었으며, 진취락(津聚落)을 형성하였던 곳이다. 한강의 중하류에 위치한 광나루는 교통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조선시대 서울에서 부산까지 연결되는 영남로의 주된 간선로는 아니었으나, 부산으로 향하는 도로의 길목에 위치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서울과 부산을 연결하는 파발로가 지나서, 광나루의 교통상 기능은 지속적으로 중요시되었다. 

광진원(廣津院)이 광나루 북쪽 언덕에 위치하였으며, 도승(渡丞)이 있어 사람들의 내왕을 조사하기도 하였다. 당시 좌도수참전운판관(左道水站轉運判官)이 겸직으로 이 지역의 조운을 관장하였을 정도로, 광나루는 서울 주변의 중요한 나루터로서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뿐만 아니라 북쪽에는 백제 초기 몽촌토성·풍납토성 등과 연결되는 아차산성이 있으며, 삼국시대의 서울∼부산간 교통로도 이 지역을 지나고 있어, 광나루는 고대부터 교통로로서의 기능을 수행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현재는 광진교·천호대교가 건설되어 강북과 강남을 연결해주므로 나루터의 기능은 상실하였으나 3번국도와 강변도로가 지나고 있어 여전히 교통이 좋은 지역이다. 

조선시대에는 양주목(楊州牧)에 속하였으나, 1895년 행정단위의 개혁에 의하여 한성부 양주군에 속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개편 때 고양군 독도면에 속하였다가, 1949년 면 전체가 서울로 편입됨에 따라 성동구에, 1995년에는 분구에 따라 광진구에 속하게 되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인용>




▼ 광나루 터(廣津址) 표석




▼ 광나루 터(廣津址) 표석




▼ 광나루 터(廣津址) 표석... 광진정보도서관을 검색하면 쉽게 접근할 수 있다.




▼ 광나루 터(廣津址) 표석




▼ 광나루 터(廣津址) 표석... 광나루역에서 광진01번 버스를 타고 종점에서 내리면 된다.




▼ 광나루 터(廣津址) 표석





▼ 광나루(廣津)에 대한 겸재 그림이 있는데... 네이버뉴스에 국민일보 글이 실려있어서 옮겨왔습니다.


▣ 광나루 터(廣津址)



한강은 아름다운 강이다. 겸재 정선(1676∼1759)은 광나루를 참으로 아름답게 그렸다. 호수처럼 보이는 물 위에는 돛단배들이 지나간다. 나루에 매인 나룻배 두 척은 천호동에서 건너왔을 것이다. 아차산과 용마산은 쌍봉처럼 한강을 굽어보고 있고, 고관들의 별장이 있는 바위산 중턱에서 노송들은 긴 가지를 펼치고 있다. 이 그림은 워커힐호텔과 광진정보도서관이 들어선 광장동과 아차산 일대의 300년 전 모습이다.

서울 일대를 그린 정선의 ‘광진’ 그림은 매우 귀하다. 이렇게 아름다웠던 옛 모습은 상상하기 어렵다. 선 몇 줄로 표현한 산은 지금 형상 그대로다. 아차산과 용마산이 엇갈린 각도를 보면 이 그림은 암사동 어귀에서 그린 듯하다. 충주에서 배를 타면 서울 어귀인 광나루까지 하루 만에 도착했다고 120년 전 기록에 나온다. 물산은 광나루에 모이지 않았다. 마포로 가야 남대문으로 바로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림 속 돛단배들은 광나루를 지나치고 있다.

<네이버뉴스에서 인용, 원문:국민일보, 글 : 최성자(문화재청 문화재위원) http://me2.do/xO6xuN5V>



▼ 광나루 터(廣津址) 표석 위치




▼ 광나루 터(廣津址) 표석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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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방인야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