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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수관 터는 경기중군영을 일컷는 말이다. 이곳을 냉동(冷洞)이라고 불렀는데 경기 중군영 앞에 맑고 시원한 샘물이 있어 인근 주민의 사랑을 받아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종래에는 중군영의 건물명마저 ‘청수관()’이라고 하였다. 찬우물골 · 냉정동, 냉천동도 같은 의미이다. 

금화초등학교 자리가 원래 서지 연못이 있던 자리인데 연못을 메우고 일본공사의 이름을 따 죽첨공립보통학교가 들어서고 금화초등학교가 되었다. 인터넷에서 어떤 분이 표석 세개를 같이 놓지 말고 천연정 하나만 남기고 경기중군영, 청수관 표석은 동명여중 앞으로 옮겨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나는 반대다. 독립관 터에서도 밝혔지만 표석의 정확한 위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그 의미를 알리는데 주안을 두어야 한다고 보기 때문에 동명여중 앞으로 했을 때는 깊숙히 들어있어서 잘 알려지지 않게 될 우려가 있다. 예전에 경기중군영이 워낙 큰 면적을 차지하고 있어서 지금 금화초등학교 앞에 세워도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청수관(淸水館)


청수관이란 이름은 경기중영 정문 앞에 청냉한 샘물이 솟아나던 것에서 연유한 것이다.

청수관은 천연정이라는 정자를 중심으로 한 경기중영이다. 청수관 내에는 서상헌, 청원각 등의 여러 건물이 즐비하였고, 넓은 못 위에는 연잎과 연꽃이 함께 승경을 이루어 고종 초 많은 문인 묵객이 이 천연정을 찾아와 연꽃 구경을 하였다.

고종 17년 11월에는 하나부사가 조선 공사로 공식 부임하여 경기중영의 건물을 공사관으로 사용하다가, 임오군란이 발생하여 하나부사가 도피하면서 불을 질러 소실되었다.


청수관(경기중군영)이 기점이 되어 한국에 거주하는 일본인이 급격히 늘어났다. 본래 일본인의 성 안 거주는 허용되지 않았다. 일본인의 성 안 거주는 1880년 서대문 밖 천연정(지금의 서울적십자병원 자리) 청수관(경기중군영)에 공사관을 열면서 40여 명의 일본인이 기거한 것이 시작이었다. 이듬해 임오군란으로 청수관이 불타자, 이들은 성 안으로 들어와 금위대장 이종승 집을 임시로 쓰다가 교동의 박영호 집을 사들여 공사관으로 신축했다. 이때 일한 인부 70명이 서울에 들어온 최초의 일본 민간인이었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일본인들은 1884년 갑신정변을 틈타 조정을 압박해 서울 입경과 거주를 정식으로 허가받았다.

<문화콘텐츠닷컴에서 인용>


청수관(淸水館) 터 표석



▼ 청수관(淸水館) 터 표석... 금화초등학교 정문 앞에 있다.



▼ 청수관(淸水館) 터 표석



▼ 청수관(淸水館) 터 표석



▼ 청수관(淸水館) 터 표석, 경기중군영터, 천연정 터는 모두 금화초등학교 정문 앞에 있다.



▼ 옛날 청수관(淸水館) 터 표석... 표석 위치는 동일하나 내용이 달라졌고... 주변이 조금 더 삭막해졌다.



▼ 금화초등학교 정문 앞에 있는 청수관(淸水館) 터, 경기중군영 터, 천연정 터 표석 위치



▼ 청수관(淸水館) 터 표석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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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방인야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