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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연정 터는 경기중군영터, 청수관 터와 같이 금화초등학교 정문 옆에 있다보니 답사하는 입장에서는 아주 접근이 편해서 흔히 1타3피로 말하는 곳이다. 한꺼번에 세 군데를 답사할 수 있으니 왠 횡재인가?ㅎ 그런데 이런 정자 옛 터까지 우리가 알아야 하는가 하는 의문이 들어서 자세히 옛 자료를 살펴보게 되었는데 이 일대가 경기중군영 등의 기관이 있으면서 영은문, 모화관 등이 있어 중국 사신이나 우리 나라 사신이 중국에 갈 때 환송연을 여는 등 당시에는 상당히 번창 했던 곳으로 여겨진다. 

금화초등학교 자리가 태종 때 인공으로 조성한 서지(西池)였는데 그 서쪽에 있던 정자가 천연정으로 이곳에서 많은 연회가 배풀어졌다고 한다. 아마도 중국으로 가는 사신의 무운장구를 비는 뜻에서 환송연을 이곳에서 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 천연정(天然亭)

조선 영조 17년(1741) 서지 가에 세워진 정자도성 근지에서 제일 크고, 연꽃이 많아서 이백(李白)의 ‘천연스러워 꾸밈에서 벗어났다’는 시구에서 뜻을 취하여 정자의 이름을 지었다.서지 가에는 반송정과 원관정이 있었으며 못 서쪽 언덕에는 경기중영이 있었다. 천연정을 중심으로 한 경기중영(京畿中營) 구내에는 서상헌·청원각 등의 여러 건물이 즐비하여 넓은 못 위의 연잎, 연꽃과 함께 절경을 이루었다. 후에 천연정을 중심으로 경기중영의 건물을 공사관으로 사용하면서 경기중영과 천연동을 더불어 ‘청수관’이라 부르게 되었다.서지는 태종 7년(1407) 돈의문 서북쪽에 모화관을 세우면서 누 남쪽에 판 연못이다. 연못의 규모는 상당히 커서 길이가 380척, 폭 300척 깊이 2~3장이었다. 연못이 완성된 뒤에는 개성 숭교사의 못에 있는 연뿌리를 배로 실어다 심었다. 이 연못은 반송정 옆에 있었으므로 반송지(盤松池)라 하였으나 서대문 밖에 있다 하여 흔히 서지(西池)라 불렀다. 한성에는 서지 외에 동대문 밖에 동지(東池), 남대문 밖에 남지(南池)가 있었다. 이 가운데 서지가 제일 크고 넓었으며 연꽃이 무성하였다. 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당시 서지의 연꽃이 무성하면 서인이 득세하고, 동지의 연꽃이 무성하면 동인이 득세하였으며, 남지의 연꽃이 무성하면 남인이 득세하였다고 한다.김정희(金正喜)의 『완당집(阮堂集)』에 따르면 천연정은 무악재를 오가는 관원들을 맞이하고 전송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연회장이었으며, 주객과 시인들이 시를 읊고, 술을 마시면서 노닐며 태평세월을 뽐내고 자랑한 곳이라고 서술하고 있다.임오군란 때 배일군인과 군중들에게 공격당한 화방과 관원들은 관사에 불을 지르고 탈출하여 인천을 경유하여 귀국하였는데, 이 때 청수관의 여러 건물이 불타고 천연정만 남았다. 서지는 일제 때인 1919년 메워져서 죽첨보통학교가 들어섰다가 광복 후 금화초등학교로 바뀌었다.<문화콘텐츠닷컴에서 인용>

▼ 천연정 터(天然亭址) 표석... 경기중군영터와 같이 있다.

 

▼ 천연정 터(天然亭址) 표석...

 

▼ 천연정 터(天然亭址) 표석...

 

▼ 금화초등학교... 서지(西池)가 있던 자리였다. 

 

▼ 천연정 터(天然亭址) 표석...

 

▼ 천연정 터(天然亭址) 표석...

 

▼ 천연정 터(天然亭址) 표석...

 

▼ 금화초등학교 앞에 세워진 3개의 표석... 청수관 터, 경기중군영 터, 천연정 터(天然亭址) 표석...

 

▼ 천연정 터(天然亭址) 표석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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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방인야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