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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현동 굴레방다리라고 어린시절 학교 다닐 때 많이 듣던 곳이다. 이곳에서 당시 유행하던 음악다방이 있어서 나도 몇 번 다녀온 기억이 난다. 아현(兒峴)이어서 애고개, 애오개로 불리운 것으로 안다. 한동안은 한양의 시구문이 광희문과 소덕문이어서 이곳에 도성의 애들이 죽으면 묻는 무덤이 많아서 애오개라 불렀다는 말을 들은 기억도 난다. 그런데 문헌을 찾아보니 애오개 즉 아현은 큰고개・대현에 비하여 작은고개, 아이고개, 애고개가 변하여 애오개가 되고, 이를 한자명으로 아현(阿峴)이라고 표기한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애기 무덤이 많아서 애오개라고 한 말은 아마도 이곳에 애기능 즉 의령원이 있었기 때문에 나온 말 같다. 의령원은 지금의 추계예술대학이 있던 곳에 있다가 서삼릉으로 1948년 옮겼다. 표석은 추계대 정문에 있다.



의령원(懿寧園)


의소는 사도세자(思悼世子)의 큰아들로 영조의 손자가 되며 정조의 형이다. 1750년(영조 26) 사도세자와 혜빈홍씨(惠嬪洪氏) 사이의 첫째 아들로 태어나 그 해에 왕세손에 책봉되었으나 불과 3세 만에 죽었다.

영조는 세손의 죽음을 크게 슬퍼하여 예절을 갖추어 묘소를 꾸미고 사당인 의소묘(懿昭廟)를 도성 내 영조가 왕에 오르기 전에 거처하던 창의궁(彰義宮)에 세워 절기에 따라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묘소는 도성 서쪽 안현(鞍峴)의 남쪽 기슭, 현재의 서대문구 북아현동 중앙여자고등학교 내에 세워져 의소묘로 불리다가 1871년(고종 8) 의령원으로 승격되었다. 그 뒤 1949년 서삼릉으로 이장되었다.

현재 묘소에는 표석(表石)·장명등(長明燈)·혼유석(魂遊石)·망주석(望柱石, 1쌍)과 문인석(文人石)·마석(馬石)·호석(虎石)·양석(羊石)이 각 2구씩 설치되어 있는데 규모나 장식은 모두 간소하다. 표석의 전면에 있는 큰 글씨와 음기[陰記 : 표석의 뒷면에 쓴 글씨]는 영조의 친필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인용>


▼ 의령원 터(懿寧園址) 표석... 최근 로드뷰를 보니 우체통이 없어졌다.



▼ 의령원 터(懿寧園址) 표석... 추계예술대학교 정문 옆에 있다.


▼ 의령원 터(懿寧園址) 표석



▼ 의령원 터(懿寧園址) 표석



▼ 의령원 터(懿寧園址) 표석... 추계대에서 북쪽 방향... 중앙문구사가 지금은 없어졌다.


▼ 의령원 터(懿寧園址) 표석.. 추계대 북쪽 방향



▼ 의령원 터(懿寧園址) 표석.. 추계대 남쪽 방향



▼ 의령원 터(懿寧園址) 표석.. 추계대 정문 방향



▼ 의령원 터(懿寧園址) 표석 위치... 추계대 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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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방인야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