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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문, 독립관은 학창시절부터 많이 들어온 유적이다. 그런데 내가 어릴 때는 독립문이 지금 위치보다 아래쪽에 있었는데 금화터널을 뚫고 현저고가도로를 설치하면서 독립문을 너머가게 되어 보기 흉하게 되어 지금의 위치로 옮기게 되었다. 

 

표석 답사 초기에는 독립회관 터라 해서 표석이 우리은행 독립문지점 앞에 있었는데 지금은 독립문역사거리 쪽 독립문 문화공원 안에 설치되어 있는데 잘 보이지도 않게 설치했다.

 

표석의 디자인을 새롭게 해서 간소하게 단촐하게 만든 것은 좋으나 역사유적지, 문화유적지를 소개하는 취지에서 보면 너무 초라하게 보인다. 어느 정도 권위를 심어주고 유적지의 중요성을 알리는 측면에서는 표석도 고급스러워야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단순히 정보만 제공 하고 누가 보든 말든 할바에야 표석을 세우는 의미는 없다고 본다.

 

이곳 독립관 표석은 제고 되어야 한다. 예전처럼 돌로 만들어 공원 앞쪽으로 설치하여 국민들이 보고 느끼도록 해야 할 것이다.


 

 

 

 

독립관(獨立館) 터

 

 

 

독립관은 조선시대 중국사신들의 영접연과 전송연을 베풀던 영빈관의 하나였던 모화관 건물을 1894년 이후 서재필이 발의하고 독립협회의 주도로 개수하여 독립회관으로 개칭한 것이다. 이곳에서는 애국토론회를 개최하여 자주, 민권, 자강 사상을 고취하는 장소로 사용되었고, 독립문과 함께 독립사상의 상징물이 되었다.

 

현재 옛 독립회관 자리에는 터를 알리는 표석만이 남아있고, 독립관은 한식 목조건물로 복원하여 순국선열들의 위패봉안 및 전시실로 사용하고 있다. 독립회관은 독립협회의 사무실 겸 집회소로 사용되었지만 일제에 의해 강제 철거되었다.

 

<문화콘텐츠닷컴에서 인용>

 

 

▼ 독립관(獨立館) 터 표석... 새로 디자인한 표석인데... 돌이 아니니 표석이라 칭하기도 그렇고... 유적을 소개하는 표석인데 조금 고급스럽게 해서 관심을 갖도록 해야 하며, 표석의 위치도 고증만 염두에 두고 세우기 보다는 고증은 학자들이 지도에 잘 표기해 두고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곳, 눈에 잘 띄는 곳에 세워서 사람들에게 문화유적에 대한 것을 느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 독립관(獨立館) 터 표석... 고양이가 떠나지 않아 그냥 함께 사진에 담았다.

 

 

 

 

 

 

▼ 독립관(獨立館) 터 표석.... 영천시장 초입

 

 

 

 

 

 

▼ 독립관(獨立館) 터 표석.... 왼쪽 아래로 영천시장이 있다.

 

 

 

 

 

 

▼ 독립관(獨立館) 터 표석.... 표석이 독립문 문화공원 안쪽에 있어서 잘 보이지도 않는다.

 

 

 

 

▼ 독립관(獨立館) 터 표석.... 독립문역 사거리와 그 위로 지나는 현저고가차도...

 

 

 

 

▼ 독립관(獨立館) 터 표석.... 앞쪽에 독립문 문화공원 공중화장실이 있다. 하필 세워도 화장실을 바라보고 세워야 했는지... 아마 고증을 해보니 이곳이 독립관 터의 중심이 아니었나 생각되지만 넓은 터에서 꼭 중심 보다는 사람들이 많이 볼 수 있는 곳에 세워야 한다. 

 

 

 

 

▼ 독립관(獨立館) 터 표석.... 길에서 보면 한 점으로 보인다.

 

 

독립관(獨立館)

 

 

 

1884년(고종 21)의 갑신정변 실패 후 미국으로 망명한 뒤, 국내 개화파의 귀국 요청에 따라 1895년 12월 하순에 귀국한 서재필(徐載弼)은 독립문·독립공원과 함께 자주독립의 상징으로 독립관 건립을 주장하였다.

 

이에 독립협회는 당시 중국사신을 접대하는 영빈관(迎賓館)으로 사용하여오던 사대(事大)의 상징적 건물로, 갑오경장 이후에는 사용하지 않아 방치되어오던 모화관을 개수하여 독립관이라 부르고, 독립협회의 사무소 및 집회장소로 사용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약 2000원 정도의 경비를 소요하여 1897년 5월 개수를 끝내고, 5월 23일 왕태자의 한글로 된 ‘독립관’의 친서 현판식을 거행하였다. 독립협회에서는 독립관을 사무실로 사용함과 동시에 매주 일요일 오후 3시 회원들이 독립관에 모여 견문과 학문에 도움이 되는 강연회를 개최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강연회가 큰 성과가 없게 되자, 서재필·윤치호(尹致昊) 등은 강연회를 토론회로 바꾸어 운영하기로 하고, 1897년 8월 29일독립관에서 제1회 토론회를 가졌다.

 

그 뒤 토론회에 참가하는 인원이 증가함에 따라, 그리고 같은 해 12월의 제12회 토론회부터는 길이 멀어 참석자가 내왕하기에 불편할 것을 염려하여, 전경기감영내아(前京畿監營內衙)로 옮겨 개최하였다. 독립관은 한말 열강의 침투 속에서 독립을 이룩하고자 한 독립협회활동의 근거지이자 자주독립의 상징적 건물이었다. 현재의 건물은 1997년에 다시 지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인용>

 

 

 

▼ 서대문 일대,,, 모화관, 영은문이 보인다. <경기감영도12곡병(京畿監營圖十二曲屛)> 중 5~12폭 부분 <서울, 한양의 기억을 걷다, 김용관, 인물과사상사에서 인용>

 

 

 

 

▼ 독립문과 모화관(독립관) 원경... <출처:독립문과 모화관 원경...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인용-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대한제국 말년의 독립관(獨立館) 신문 기사... <출처:신형준 기자 (블로그)hjshin.chosun.com/ 네이버블로그 포근한 5월의 한낮에서 인용>

 

 

▼ 독립문과 현저고가차도... 독립문 원래의 위치는 고가차도 바로 아래다.

 

 

 

 

▼ 새로 복원한 독립관(獨立館)

 

 

 

 

▼ 옛날 독립회관(獨立會館) 터 표석.... 표석이라고 하면 적어도 이 정도는 되어야 사람들이 관심을 갖을 것 같다.

 

 

 

 

▼ 옛날 독립회관(獨立會館) 터 표석은 우리은행 독립문점 앞에 있었다. 지금은 표석 이름, 내용, 위치도 바뀌었다.

 

 

 

 

 

 

▼ 독립관(獨立館) 터 표석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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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방인야초